소설리스트

〈 142화 〉운명. (142/220)



〈 142화 〉운명.

헬레나는 책을 오래 들여다본 탓인지 아픈 눈두덩을 문지르며 잠시 창밖을 보았다. 밖은 이미 어두컴컴한 암흑만이 자리 잡아 투둑투둑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들려왔다. 그것 외에는  고요한 밤이었다. 그녀의 마음 또한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처럼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후우,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몇 권이나 되는 책들을 읽었던가? 이미 그녀가 앉은 책상 주변에 쌓여있는 책들만 보아도 그것을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며칠을 중복되거나 잘못된 내용을 거르며 마지막 책까지 읽었지만 소녀가 그렸던 아마라트라는 약초에 대한 것은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가장 비슷한 식물이라고 한다면 회전초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약효는커녕 특별한 용도조차 없는 식물이었다.

그녀는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회전초에 대한 그림과 내용을 따로 모아 정리해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창밖처럼 깜깜한 어둠이다. 원래라면 깊은 밤까지 고용된 하녀들이 당번을 맡아가며 복도를 밝혔겠지만 지금은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나마 고용된 경험이 있었던 그녀가 그럭저럭 성이 굴러가도록 관리하고 있었지만 개인의 몸으로는 한계가 많았다. 그녀의 일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헬레나는 어쩔  없이 자신의 방을 밝히던 촛대를 들고 나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그녀가 든 촛불의 빛만이 간신히 어둠을 밝히는 가운데 그녀의 발소리만이 또각또각 복도를 울렸다. 규모로만 보자면 상당한 심지어 훌륭한 성이었으나 그것도 관리할 인원이 있을 경우의 일이었다. 성안의 대부분이 텅 비어 사용하는 이들조차 없는 성은 껍데기만 남은 폐성이나 다름없으니.


"고용인을 하루빨리 늘리는  좋겠군요."


그녀의 혼잣말조차도 적막한 어둠 속에서 크게 울리며 빗소리를 가로질렀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오랫동안 비어있던 성치고 나름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다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리 달가운 사실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성이 지나치게 깔끔하다는 것이 의문이었는데 얼마 전에 그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퍄랴르라고 했던가? 감히 소녀에게 손을 대려 했던 자가. 재판이 이루어진 뒤 그녀는 추가적인 죄를 조사하기 위해 그를 심문했었다.


감히 영주의 가족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그런 짓을 저지르려 했을 때부터 지나치게 대범하다고는 느꼈지만 영주 대리라는 직함으로 해 먹은 것이 많으니 그만큼 자신감과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던 모양이다.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이 구니 그녀는 웬만해서는 사용하지도 않는 자백제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때문에 알고 싶지 않은 사실도 여럿 알  있었다.


"설마 아무리 영주가 공석이었다지만 마을의 촌장이라는 자가 영주 노릇을 해왔을 줄은."

그렇다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성이 생각보다 관리가 더 잘 되어있으며 이곳저곳에 관리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이해할  있었다. 심지어 이곳저곳에 남은 오래전의 것이라 보기 힘든 가구의 흔적과 벽에 있는 무언가 쓸린 듯한 흔적들까지. 덕분에 그녀가 처음 이 성에 왔을 때부터 느꼈던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남은 것은 찝찝함이었다. 가끔 이상하게 깨끗한 흔적을 발견하면 더욱 그랬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그자가 성의 비밀 통로 또한 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도나르와 가족이 온 뒤에도 비밀 통로를 통해 그들의 생활을 엿보았다는 것까지 알았다. 그래도 영주의 성이었기에 그 이상으로 수작을 벌이진 못해 기회를 엿보다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녀를 좋아하는 약초꾼을 꼬드겨 공범을 만들고 죄를 뒤집어 씌울 계획까지. 철두철미하면서도 허술한 것이 그가 얼마나 자신감이 넘쳤는지 알 만했다.

그녀는 텅 빈 성에 아직도 비밀통로를 통해 퍄랴르 같은 자가 기회를 엿보고 있을까?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어셔의 방이었다. 그녀는 방독면과 장갑을 쓰고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안쪽에서 들려오는 허락을 듣고 들어가면 그곳에는 벨카가 어셔의 이마에 수건을 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시간도 늦었으니 약간은 졸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텐데 소녀는 그를 돌보는 것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병은 호전되지는 않아도 그 이상으로 진전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헬레나는 그녀에게 자신이 정리해 온 책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찾아도 아마라트라는 약초에 대한 것은 찾을 수 없더군요. 일단 가장 비슷한 식물에 대한 자료를 가져왔으니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벨카는 그제야 헬레나를 돌아보고 자료를 받아들었다. 자료라고는 해도 고작 두 장 밖에 되지 않는 양이었다. 회전초란 고작  정도 가치밖에 없는 잡초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그녀가 가져온 자료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림만 보아도 아마라트라는 있는지도 모를 약초와는 확연히 차이가 날 텐데도.


"고마워."

이윽고 자료를 전부 읽은 듯 침묵의 끝에 소녀가 중얼거린 것은 그녀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네? 혹시 그게."
"아니. 꽃의 모양도 식물의 모습도 다른 걸."
"...그렇다면 어째서입니까?"

헬레나의 물음에 벨카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래도 노력한 거지? 이상한 거짓말이라고. 지어낸 허상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는데도."


그녀는 마치 제 생각을 들켜버린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벨카는.

"헬레나는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는걸."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소녀의 위로 또다시 그리운 추억의 잔재가 겹쳐지며 그녀의 가슴을 찌른다.

"그런 게 아닙니다."

벨카의 말에 답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져 새어 나왔다. 헬레나는 소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호의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였을까? 그녀가 소녀에게 지나칠 정도로 호의를 보인 건. 스스로도 알 수 없었던 그 이유가 지금 확실해졌다. 헬레나는 추억 속의 그녀와 한없이 닮은 소녀를 통해 과거를 기억하고 지독한 공허감을 떨쳐내려 애를 썼을 뿐이었다.  증거로 그녀는 과거의 행동을, 그리운 이가 있던 시절을, 엇비슷하게 답습하고 있지 않았는가?


사샤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녀는 벨카를 따라 이곳으로 올 것이 아니라 메디아를 위해 일했어야 했다. 자신의 사랑을, 추억을, 그리움을, 아픔을, 친구를, 맹세를 앗아간 아이올로스에 대한 개인적인 마음조차 미루어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이곳에 있었다. 그저 추억을 닮았다는 이유로 헬레나는 벨카를 쫓아왔다. 그리곤 아마라트라는 약초가 없을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단정 짓지 않았나?


정말로 벨카를, 소녀의 사랑을 받는 어셔를, 환자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래선 안 되었다는 걸 헬레나는 깨달아버렸다.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도. 조금만 생각할 수 있다면 결론을 내리는 것을 빠른 일이었을 텐데. 비겁하게도 자기 연민에 빠져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도 깨닫지 못하다니. 울컥 목을 타고 올라오는 거뭇한 감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역겨움이요 죄악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해결책을 알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의식 밖으로 밀어내었었나? 타지에서 온 병이라면 그 병이 원래 머물던 곳에 해결법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사실을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소녀에게서 비치는 과거에 연연하며 그녀를 위하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었던 자신이 끔찍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이 일찍이 했어야만 하는 말을 해야만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그녀의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기만의 끝을 고했다. 그래, 어셔가 이 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녀가 반드시 했어야만 하는 말이었다. 그가 걸린 병을 치료할 약초는 원래  병이 있었을 파르즈에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아마라트란 약초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들이 그 약초를 손에 넣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밖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캐트시의 고향, 파르즈는 구름 지대 너머에 있었으니까.

구름 지대, 언제고 비를 내려주며 주변의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였으나 역으로 바로 아래는 인세에 존재하는 지옥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끔찍한 곳. 불안정한 대기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우박들과 번개가 내리치는 것은 예삿일이며 땅은 거의 물과도 같아서 힐디스비니 같은 생물이 아니면 마차를 끌지도 못한다. 그 모든 걸 운 좋게 피해도 이어서 거대하고 사나운 가재들에게 조각조각 뜯어먹힐 것이다.


구름 지대의 아래를 건넌다는  그런 도박의 연속이었다. 치료제를 구하겠다고 지나가려 했다간 그 아래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치료제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고마워."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벨카를 헬레나는 이해할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제가 그런 말을 들을만한 자격은..."


그러나 소녀가 고개를 젓는 모습에 그녀의 말은 끊어졌다.

"우리를 속였다고 해도 어셔를 치료하고 싶다는 헬레나의 마음만큼은 진짜였으니까. 찾아다녔던 거잖아. 아마라트를 대신할 약초를."


소녀의 다정한 금빛에 덜컥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헬레나에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제조법들이 있었지만.


"그건 결국 실패작이었을 뿐입니다."

병의 억제는 가능할지라도 치료는 불가능했다. 그것이 그녀의 한계였다. 결국 파르즈로 가야만  병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헬레나는 자신의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 끼치는 감각을 느낀 건. 그와 동시에 시야 한구석, 밥을 먹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면 항상 몸을 말고 눈을 감고 있던 캐트시 소년이 몸을 떨며 눈을 부릅 뜨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소년의 눈은 바로 그녀의 뒤를 향하고 있었다.

"그거  흥미로운 이야기로군그래."


그 낮고 무거운 사내의 목소리에 헬레나가 직감적으로 소매에서 단검을 빼들어 뒤돌아 찍어내리는 순간.

"'라이도우'"
"윽?!"

그녀는 머리를 뒤흔드는 듯한 두통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단검으로 무언가를 노렸지만 방금 전의 두통으로 자세가 흐트러져 상대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어이쿠. 살벌한 하녀군. 요즘 하녀는 호신용으로 나이프 하나 정도는 들고 다니는 건가?"

헬레나는 아무런 전조조차 없이 나타난 불청객의 존재에 경악하면서도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으며 역수로 쥔 단검을 상대를 향해 치켜들었다. 상대는 칙칙한 로브와 어둠으로 빈틈 없이 몸을 두르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중얼거린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룬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의 두통까지.


"마법사!"

그것이 뜻하는 바를 헬레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연금술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마법이 존재하는 이유와 마법의 원리를 해명하는 것이었으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겁니까!"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곳이지. 안 그러나?"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도 그녀는 단검을 치켜들며 기세를 가다듬었다.

"'페이휴'"


헬레나는 그의 손짓과 말을 듣자마자 조금이라도 마법을 이해할  있을까 싶어 외웠던 룬에 따른 마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대상을 속박, 구속하는 마법이었다. 때문에 곧바로 그녀의 몸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으읏...!"


곧바로 굳은 몸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뒤에 있던 소녀에게서 작게 새어 나온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이올로스에게 벨카가 마녀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이상으로 특별한 존재였을 줄이야. 그녀가 미처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을 때.

"똑똑한 여자라. 싫지는 않지만 지금은 좀 방해되는군."


마법사가 그녀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녀는 그것을 곧바로 쳐냈지만 그것이 실수가 되었다.

"이건?! 콜록! 끄윽!?"

마법사가 날린 것은 가루가 든 주머니였다. 때문에 시야를 방해받은 순간. 헬레나는 배에서 느껴지는 충격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자, 이제 우리 둘만 남았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분명 방의 구석에 캐트시 소년이 지켜보고 있었는데도 그는 둘뿐이라 주장하며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벨카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몸을 떨고 있었지만 그는 그대로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네가 마법을 없앤 거야. 그렇지 않아? 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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