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운명.
도나르는 익숙하게 방독면을 쓰고 제 몸의 이곳저곳에 빈틈이 없는지 살피다 문을 바라보았다. 고작 하나뿐인 문이었다. 그저 평소처럼 열고 닫을 수도 있는 문인데 저 문을 열고 들어가기 위해선 꼭 준비가 필요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의 침대에는 여전히 어셔가 누워 있었고 그 옆에는 시프가 있었다. 구석 즈음엔 병의 원인이란 이유로 함께 이 방에 있는 캐트시 소년이 있었지만 그는 구태여 시선을 그리로 돌리진 않았다.
"일은 다 끝냈어요?"
"여유가 생길 만큼은 처리하고 왔어."
시프와도 그렇게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어셔를 지켜보다 열을 내리기 위해 약을 먹이고 몸을 닦아주기도 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요즘엔 이 녀석이 없으니까 시간이 간다는 느낌이 잘 안 들어."
매일 아침마다 훈련하며 어떻게든 강해지겠다며 악바리를 쓰는 것을 보며 떠들썩하게 하루를 시작했었는데. 이제는 자리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 도나르에겐 그것이 크게 느껴졌다.
"그러게요.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벨카를 찾을 것 같은데."
시프에게도 떠들썩했던 어셔가 이렇게 누워만 있으니 지금의 조용한 생활이 더 낯설었다. 어쩌면 너무 큰 성으로 와버린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벨카도 걱정이네요."
"...하필 이럴 때 그런 일도 벌어졌으니까."
벌써 며칠 전이 되어버린 이야기지만 지하 감옥에는 아직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퍄랴르가 갇혀있었다. 그날 밤 그의 저택에서 잠들었던 그들이 소녀에게 깨워져 퍄랴르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한 일을 말할 땐 어찌나 놀랐던가? 한밤중에 입고 있던 옷이 찢긴 상태라 이불로 몸만 가린 채 울먹이며 그를 깨우던 모습이 지금도 떠올랐다. 그만큼 자신들을 신뢰하고 의지해 주었다는 것이기에 도나르는 혼란스럽고 화가 나는 도중에도 약간의 기쁨을 느꼈을 정도였다.
그날 밤엔 소녀에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방에 놓여 있던 향을 챙기고 증거들을 챙겨서 퍄랴르가 발뺌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셔가 깨어나지 못하니 그들의 일상에 활기를 되찾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어셔와 벨카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수수께끼 같은 아이들이었다. 분명 말을 타고 돌아다니기엔 무리가 있는 황야. 기사들이라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곳에 있던 아이들.
"빨리 병이 나으면 좋을 텐데."
한편 약초상에서 뛰쳐나온 헬레나는 벨카를 껴안고 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우산도 제대로 쓰지 못해 옷자락이 젖었지만 그조차 신경 쓸 거리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품에 안고 있는데도 무게감 하나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소녀를 이대로 놓쳐버릴 것만 같아서.
"숨, 막혀."
벨카에게서 그런 말이 들려왔을 때에야 헬레나는 자신이 그녀를 너무 강하게 끌어안고 있었음을 깨닫고 조금이나마 힘을 풀고 멈춰 섰다. 얼마나 정신없이 뛰었는지 그녀들은 이미 성 앞에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크게 숨을 내쉬는 소녀를 보고 물었다. 그 순간에 어떤 말이 돌아올지 깨달아버렸지만.
"응,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야."
정작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안색은 창백했고 가슴께에 올려둔 작은 손은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지만 그런에도 벨카는 그녀에게 별것 아니라는 듯이 벅찬 숨을 골랐다. 헬레나는 오늘따라 멎지 않는 비가 원망스럽다고 생각했다. 비만 아니었다면 소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저 이슬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내려줘."
"하지만."
"정말로 괜찮으니까."
결국 헬레나는 그런 소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춤에서 벗어난 벨카는 어지러운 듯 여린 몸을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면서도 혼자서 걸어나갔다. 헬레나는 그런 소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다 어셔의 방으로 향했다.
"벨카가 쓰러졌었다고요?!"
헬레나의 말에 시프가 놀라 소리쳤다. 옆에 있던 도나르도 놀란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혹시 지금까지 저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그것이 이 상황이 익숙한 이들의 것은 아니었기에 헬레나는 물었다.
"몸이 조금 약하긴 해도 그렇게 쓰러질 아이는 아니었는데."
헬레나는 시프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지만 그간 지켜본 그들의 모습을 보면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 이들이 아니었기에 갑자기 쓰러진 소녀의 상태가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그녀가 어셔의 상태를 확인할 때였다.
"괜찮으시다면 아가씨의 상태를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헬레나가 상태를 직접 살피고 싶었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벨카에겐 그녀보다도 시프가 필요하다는걸.
"벨카, 안에 있니?"
시프는 벨카의 방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그러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작게 열리는 문. 그 틈으로 소녀의 금빛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들어가도 괜찮을까?"
그녀가 이어서 묻자 벨카는 조용히 문에서 물러났다. 시프가 그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삭막한 방이었다. 그들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것도 아닌데도 정말 필요한 물건만 들여놓은 모습이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벨카에게도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벨카는 침대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치 생기를 잃은 인형 같은 모습에 마음이 아파 그녀의 곁에 다가가 나란히 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니?"
그녀의 물음에 벨카는 입을 열었다.
"응."
소녀는 긍정했지만 그 이후로 대답이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말하기 힘든 거지?"
"...응."
"우리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니?"
시프의 차분한 물음에 벨카는 그녀를 흔들리는 눈으로 올려다보다가도 고개를 숙이며.
"안아 줘."
정말, 의지하고 싶다면 마음 편히 의지해 주면 좋을 텐데.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니 작게 덧붙이는 소녀의 모습에 시프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그녀를 안아주었다. 최근 들어 소녀의 웃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벨카에게 표정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소녀는 생각보다 다양한 표정을 짓는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있을 땐 가면을 쓰지 않으면 부끄러워하고 시프가 일을 한다 싶으면 다가와 가르쳐 달라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고 그러다 일을 가르쳐주면 곰곰이 되짚으며 하나하나 세심하게 노력하던 소녀.
그 모습이 기특해 칭찬하면 선홍색으로 물드는 말간 볼이 그렇게 귀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조용한 아이인데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아이였다. 그녀와 단둘이 집안에 남는 날이면 함께 차를 타 마시고. 단 과자를 조금씩 먹으며 오물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벨카는 안 그런 척 단 과자를, 그중에서도 쿠키를 가장 좋아했다. 그러다 어셔가 찾아왔다 싶으면 쿠키도 마다하고 쪼르르 집안을 가로질러 현관을 기웃거리던 모습까지.
차에 퐁당 떨어트리면 녹아드는 설탕처럼. 공기에 녹아들어 신경 쓰지 않으면 모를 꽃내음처럼. 노을을 닮은 벨카를 시프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말없이 서로를 껴안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먹구름 때문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 먹구름의 색을 보고 다가오는 일몰을 알 수 있었다. 곧 어두워져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시간인데도 그는 외출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그가 머무르던 약초상의 문이 거세게 열린 것은.
"야,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냐? 그 좋은 거 우리도 같이 좀 알자고?"
그리고 들어온 것은 아까 그에게 시비를 걸다 헬레나와 소녀의 모습에 꼬리를 말고 도망쳤던 패거리들이었다. 그가 콧노래를 멈추고 조용히 쳐다보자 그들은 퍽 우습다는 듯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오늘 그 아가씨랑 만나는 것도 다 봤거든? 좋게 말할 때 빨리 안내해라?"
"...."
그들이 그를 둘러싸고 위협적으로 굴었는데도 쉽게 겁을 먹던 평소와는 달리 로브를 뒤집어쓴 채 미동 하나 없이 그들을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으니 그들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입을 다물자 정적으로 가득한 약초상 안에는 비가 내리는 소리만이 가득 차올라 그들의 숨통을 죄이는 것 같았다. 발끝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듯한 소름에 가만히 있는 것도 잠시.
"확 씨! 뭘 꼬나봐! 기분 나쁘니까 그 로브부터 벗어!"
그들은 기분 탓이라 여긴듯 로브 아래에 가득한 칠흑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기분이 나빠 그가 뒤집어쓴 로브를 붙잡아 벗기려 했을 때였다.
"하? 요놈 봐라?"
로브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로브를 벗기려는 손을 잡아챈 것은. 그 손은 낡은 붕대 같은 것에 둘둘 말려 피부 하나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돌처럼 딱딱하고 차가웠다.
"요즘 내가 너를 안 팼더니 만만해지긴 했나 보다? 이거 놔라?"
그러면서 그는 붙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뒤늦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놓으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잡힌 손을 빼내려 하고 있었지만 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단단한 돌덩이가 스스로 움직여 그를 붙잡아 고정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을 깨달으니 지금까지 애써 부정했던 감각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머릿속을 지독하게 울리는 경종과 온몸을 자극하는 소름 끼치는 느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는 본능의 경고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더 어이가 없었다.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동네에서도 약하고 모자라기로 유명한 알비스였다. 그런 보잘것없는 녀석에게 이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 더 열이 받고 자존심이 상했다.
"난 놓으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손이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잊고 자신의 다른 팔로 알비스를 치려 했을 때였다. 그가 무어라 중얼거린 것은.
"'나우티즈'"
듣는 것만으로 사람을 누르는 듯한 소름 끼치는 저음이 그를 짓누른다.
"뭐라고 씨불이는...!"
하지만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끅, 끄어억!"
온몸의 감각이 폭주해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그를 찾아온 것은. 그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에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뭐, 뭐야?"
"야!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그와 함께 알비스를 찾아왔던 이들은 손을 붙잡혔다가 로브의 남자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전신을 부르르 떨며 고통스러워하다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그것이 그의 장난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작 장난으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지려버린다는 게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정말, 어지간히 덜떨어지는 놈들이로구나."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던 녀석을 쓰러트려버리곤 쓰레기를 버리듯 손목을 놓아 바닥에 던져두는 그의 모습에 그들도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너 뭐야?! 대체 누구야?"
그들은 왜 약초상에 있다는 것만으로 그를 알비스라고 생각했는지 후회했다. 저 로브가 알비스가 입고 다니던 것과 비슷해서? 아니면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 것이 알비스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들이 아는 알비스가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로브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그들을 굳어버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희들."
그 목소리는 알비스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알비스의 목소리지만 알비스의 목소리가 아니라는걸.
"내가 아가씨와 그런 관계라고 몰아붙일 땐 언제고?"
"히익."
평소대로의 알비스의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그 사실이 더 소름이 돋았다. 그 목소리가 로브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다른 한 명은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가게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페이휴'"
"끅?! 끄으!?"
다시 한번 그가 소름 끼치는 소리로 중얼거리자 도망치려 했던 녀석이 그대로 굳어 어떻게든 움직이려 노력하지만 그대로 멈춰버린 모습이 보였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에 붙잡혀 버린 것처럼. 그 모습에 마지막으로 남은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이는 딱딱 부딪히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었고 후들거리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풀릴 것만 같았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오는 로브 속의 어둠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래서 너희는 무슨 일로 왔다고 했더라?"
"사, 살려 줘...!"
"틀렸다. 자신이 하려던 일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한심하군."
그의 붕대로 칭칭 감긴 차가운 손이 그의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하고 끝내 그의 눈앞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