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0화 〉비를 맞으며. (140/220)



〈 140화 〉비를 맞으며.

다음날,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마을의 촌장이라는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니라 영주의 딸을 겁간하려 한 사건이었으니까. 여전히 비가 쏟아지는 궂은 날이었지만 그래도 사건이 사건인지라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영주성의 재판장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재판이 그리 순조롭지는 않았다.

"제가 아닙니다! 영주 님께서 속으신 겁니다!"


퍄랴르가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저는 알비스 저놈이 아가씨를 범하려던 걸 막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누가 봐도 억울한 표정을 짓는 것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죄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여 긴가민가할 지경이었다.

"확실히 촌장님이 그럴 분은 아니지 않아요?"
"퍄랴르가 뭐가 아쉬워서."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퍄랴르가 굳이 자신을 끌어들였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들은 퍄랴르의 사주를 받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접점이 있던 이들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저들이 의혹을 말하니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 싶어 그를 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바보 취급  때는 언제고 이런 일이 벌어지니 그들이 아는 바보가 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한 일들을 벌여서 이런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니 참.

"자기가 하려고 했다가 퍄랴르에게 들켜서 뒤집어 씌운  아니야?"
"빨리 말하지 못해?!"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할 생각인가? 성은 사람 없이 오랫동안 비어있던 탓인지 비가 내리는 날 특유의 축축한 공기와 먼지가 섞여 쿰쿰한 냄새가 났다. 이곳에 모여든 사람들의 말소리가 울리며 그들의 냄새가 배어들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알비스가 죄인인 양 굴고 있었다. 재판 선 상대도 잊고서 다른 이들이 알비스를 의심하며 몰아가려는 것을 보고 있으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영락없이 그의 죄가 될 뻔한 순간이었다.


"모두 그만. 그런다고 해서 죄인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영주가 입을 연 것은. 그가 입은 차가운 갑옷처럼 냉엄한 목소리와 말투에 소란스럽게 굴던 이들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 그에 퍄랴르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그저...!"
"퍄랴르, 내가 직접 일을 겪은 당사자의 말도 들어보지 않고 재판을 열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퍄랴르가 다른 이들을 수작질로 부추겼어도 영주만큼은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하지만 따님이 밤중에 잘못 봤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어둡고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지만 난쟁이와 인간을 헷갈린다?"


그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코웃음 쳤다.

"헬레나. 가져와라."
"예."


영주의 말에 걸어 나온 헬레나는 무언가를 내밀었고 그 모습에 퍄랴르는 눈을 부릅 떴다.

"이게 뭘로 보이지?"

그건 바로 그가 들고 갔던 약초를 이용해 퍄랴르가 피워두었다고 했던 수면향이었으니까.


"그, 그것은 영주님과 아내분께서 편히 잠들었으면 하여."
"편하게라. 그게 한 번 잠들면 쉽게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인가? 이런 조합이면 정말 독한 것이라는데."
"아닙니다! 제가 놓아두려고 했던 건...!"
"설마 이것도 알비스가 바꿔서 피웠다?"


퍄랴르가 뭐라 더 변명하기 전에 영주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다른 어디도 아닌, 자네가 부른 청년이 우리가 자네의 집에 방문할 것을 우연찮게 알고 그날 이런 약초들을 뽑아가서 준비하고 자네의 눈과 고용인의 눈을 피해서 향을 바꿔치기하고 딸을 겁탈하려 했다?

"잘도 그러겠군."


사람들 사이에선 더 이상 퍄랴르를 옹호하는 목소리도 알비스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퍄랴르는 그대로 죄인으로 낙인찍혀 감옥에 가두어져 사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 재판도 벌써 며칠 전의 일이다. 이후로는 영주의 개인적인 감사 인사와 함께 그가 받고 있었던 벌을 감면받고 오히려 포상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소녀를 볼 수는 없었다. 재판 당일에도 소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결국 그는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단  번도 소녀를 만날  없었다. 지금 그의 신분으로는 원래 만나기 힘든 소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나니 괜히 그녀가 자신을 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떨결이라도 퍄랴르와 함께 일을 벌이려 했다가 도중에 그만둔 것이니 어쩔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가게를 보고 있으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의 모습에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 이게 누구야! 알비스 아니야?"


그들이 직접 찾아온 주제에 마치 그를 발견했다는 듯하는 건들거리는 말과 행동까지. 알비스와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은 이 마을에서 골칫덩이로 자리 잡은 좀 노는 녀석들이었다. 그동안은 밖에서 잠깐 마주치면 몇 대 얻어맞거나 약초를 빼앗겨 짓밟히는  다였는데 그 재판 이후로 이렇게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이유란 소녀에 대한 것 때문이었다.

이전에 소녀가 잠깐 그의 약초방에 들렀을 때 그녀의 모습을  누군가가 있었는지 그날 이후 마을에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마을 청년들 중에는 누가 먼저 그녀를 직접 보고 말을 걸 수 있는지 은근한 경쟁까지 있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아무리 대담하다 자부하며 혈기가 넘치는 이들이라도 감히 영주의 성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근처를 기웃거리며 혹시 외출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기다리는 것이 다였는데. 그 와중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이제 좀 말해 봐라. 어제처럼 해보지도 못했다고 구라까지 말고. 퍄랴르 때려패고 네가 대신 좀 즐겼을 거 아니야?"

그들은 마치 그가 소녀를 겁탈했을 것이라 확신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냥 바보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엄청 무서운 놈이었잖아? 안 그러냐?"
"키야. 지가 강간해놓고 남한테 뒤집어 씌우고 말이야."
"뿐만이겠냐? 얼마나 밤기술이 좋으면 강간당한 아가씨가 너한테 푹 빠져서 누명 씌우는 걸 내버려 두냐? 좀 가르쳐주라."

흥미진진하게 일그러진 놈들의 표정이 참 꼴불견이다. 안 그래도 열이 받는데 그를 더욱 화가 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그때 소녀를 풀어주기 전에 한 번쯤은 즐기면 좋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습을 눈에 담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 텐데. 퍄랴르에게 옷이 찢겨 드러난 소녀의 뽀얀 속살과 척 봐도 무척 부드러워 보이는 가슴의 융기, 자꾸만 떠올리게 되는 다리 사이의 작은 균열과  달큼한 향기까지.

이들은 그의 깊숙하고 은밀한 욕망을 끄집어내려는 듯 굴어서 더욱 성가셨다.

"아씨! 진짜 못 해먹겠네! 너 요즘 우리가 좀 잘해주니까 만만해 보이냐?"

그러다 그에게 친한 척 구는 것도 질렸는지 놈들 중 하나가 앉아있던 거칠게 의자를 넘어트리며 일어섰다.

"제대로 맞은 지 좀 오래되긴 했지? 퍄랴르도 니가 버렸으니까  막아줄 사람도 없어."
"하여간에 범죄자 새끼. 좋은 말로 할 때 아가씨랑 몰래 만나기로 한곳을 불 것이지."

다른 녀석들도 연달아 일어나며 그를 겁박했다. 정말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을 텐데. 이젠 한계라고 생각했을 때.

"당신들 뭐 하는 짓입니까?"


여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와 그들을 찔렀다. 그들이 당황하며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비가 오는 날임에도  점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의 헬레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보다도 그녀의 뒤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을  소녀가 있었으니까. 아마도 떨어져가는 약초를 구하러 온 모양이었다.

"저, 그게,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야기가 끝나서 곧 가려던 참이라."
"쯧, 너 나중에 보자."

녀석들은 헬레나와 소녀의 모습에 당황하다 이내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러는 중에도 그에게 협박하려는 듯 속삭이는 것이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맞았다고 여기는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사실이 그리 신경 쓰이진 않았다. 평소에는 헬레나가 그와 대화하고 약초를 가져갔지만 어쩐 일인지 소녀가 앞서 그에게 다가왔으니까. 그녀의 손에는 꼬깃꼬깃한 종이가 있었다.


"이게 뭔지 알고 있어?"

소녀가 내미는 종이에는 식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 약초는, 왜 찾으시는 겁니까?"


그의 말에 소녀가 눈을 크게 뜨며 헛숨을 들이켰다.

"알고... 있어? 지금 있는 거야?"
"아니요. 적어도 란투아에 살고 있는 식물은 아니라서."
"아..., 그렇구나."

소녀가 실망한  돌아서는 모습에 그는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자, 잠시만 정말로 잠시만 저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소녀는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헬레나를 보았다.

"...정말 잠시만입니다."


헬레나는 그를 잠깐 노려보는 듯했지만 의외로 순순히 가게 밖으로 나갔다. 아마 이전의 일로 조금이나마 신뢰를 얻은 모양이다.

"무슨 일로?"
"혹시 이름을,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지금까지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나는 벨카야."
"벨카..."

정말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녀의 이름을 되새기며 애끓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동안 그 밤의 일을 떠올리며 얼마나 후회 아닌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가녀린 소녀를 홀랑 벗겨 먹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그보다는 그녀에게서 더 큰 것을 가지고 싶었기에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벨카 씨. 저와 사귀어주시겠습니까?"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심장이 기대로 두근거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나에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걸."


하지만 이 정도로 단호하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당할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대체 누가? 누구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상대를 떠올린 듯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자그맣지만 선명한, 몹시도 사랑스러운 미소에 그의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이내 소녀가 헬레나를 부르려는 듯 뒤돌아서는 모습에 그는 이를 갈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깨닫고 말았으니까.

그가 순수하게 소녀의 마음을 얻는 건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그려내는 것은 반대.


"'라이도우'"


강제로 손에 넣을 수밖에.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으읏!"
"아가씨!?"


경악 어린 금빛이 그를 돌아보고 비명과 함께 소녀의 신형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에 헬레나가 놀라서 벨카를 붙잡는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가 한 일이 없기에 헬레나는 소녀가 지병 같은 게 도진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녀를 끌어안고 그가 준비해둔 약초만 챙겨들고 급하게 돌아갔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소녀가 쓰러진 건 지병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는걸.

"...큭, 하하하하하하하!"

벨카는 마녀였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특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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