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비를 맞으며.
시간은 분명 흘러갔을 텐데. 오늘도 변함없이 내리는 비가 하루가 지나가지 않았노라고 하는 것 같았다. 정작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는데.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시프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는 어셔의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것이 불치병이라는 것은 헬레나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무슨 약초를 써본들 시간 끌기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 또한.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약초를 달여 먹이며 애쓰고 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어셔의 상태는 악화되어만 가고 있었다.
"시프 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 네, 준비할게요."
방문을 두드리는 헬레나의 목소리에 그녀는 갈 시간이 되었다는 걸 깨닫고 어셔의 곁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도나르의 일로 퍄랴르 씨의 댁에 초대되어 가는 날이었다. 어셔가 이런 상태인데 파티라니 내키지 않았지만.
"헬레나에게 들었잖아. 간호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요즘 쉬지도 못했잖아. 오늘만 쉰다고 생각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도나르가 퍄랴르에게서 온 초대장을 그녀에게 건네며 하던 담담한 말에 시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영주가 되었는데도 버릇처럼 갑옷을 벗지 않는 당신은 그 속에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녀가 외출 준비를 마치고 보니 평소와 그리 다를 것 없는 복장이다. 그리고 시프가 향한 곳은 마차가 준비된 곳이었다.
"준비는 끝났니?"
"...응."
그곳에는 헬레나의 도움을 받았는지 깔끔하게 옷을 입은 소녀가 우산을 쓰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것 같지만 벨카는 어셔가 있을 방 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실 어셔를 돌보고자 남으려는 소녀를 이번 파티에 데려가는 건 도나르와 시프의 생각이었다. 계속 남으려는 그녀를 성에 남은 헬레나가 잘 돌볼 것이라고 안심시키면서. 헬레나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 것이 다행이었다.
"준비 끝났어? 얼른 타. 빨리 가야지."
곧 도나르가 다가와 그녀들을 재촉했다. 정작 그녀들을 마차에 태운 그는 마차에 타지 않고 마부석에 올랐다. 오늘은 그냥 비를 맞고 싶다며. 마차에 탄 소녀는 여전히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서로 무언가 얘기라도 했을 텐데. 시프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도나르들이 자리를 비운 성. 어셔의 방에선 책을 넘기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헬레나가 란투아에서 사는 식물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옆에는 벨카가 그렸던 아마라트라는 약초의 그림이 있는 종이가 있었다. 헬레나는 약초에 대한 책은 다 읽어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서 혹시 알려지지 않은 약초일까 하는 마음에 식물 전체에 대해 기록한 도감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수확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 약초에 대한 내용을 놓치지는 않았을까? 책을 꼼꼼히 살펴보면서도 그녀는 어셔를 돌보는 것을 잊지 않고 그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나마 선례가 있기에 시간을 더 연장할 수는 있다는 게 다행이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이 한계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이 낫길 바라는 사람이 많습니다. 방법을 찾을 때까지만 버텨주시길."
그녀를 간절하게 쳐다보던 소녀의 금빛을 되새기며 헬레나는 그렇게 속삭였다. 어셔에게 그 말이 닿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기회라니 대체 무슨 기회를 말하는 거지?"
오늘도 지긋지긋한 비를 맞으며 약초를 캐던 그는 이틀 전 퍄랴르의 말을 되뇌었다. 자신을 아들처럼 생각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는 둘째치더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 묻고자 했었지만.
"어허이. 성질도 급하긴 느긋~하게 기다려 보거라."
퍄랴르는 그렇게 말하며 이틀 후, 그러니까 오늘을 기약했다. 그러고는 운이 좋으면 그에게도 기회가 있을 것이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하니 그는 괜히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게다가.
"지독한 영감탱이 같으니. 내가 왜 이 고생을."
그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약초를 캐기 위해 늪지대를 방불케하는 들판을 들쑤시고 산지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 이유는 바로 퍄라르가 그에게 귀한 약초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오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본인이 즐겨마시는 약주도 가져오라는 은근한 눈치가 있었기에 그는 약초를 캐러 가면서도 무거운 술병을 하나 지고 가니 더 힘들었다. 그나마 오늘이 헬레나가 약초를 받으러 오는 날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약초를 캐고 보니 평소보다 수북하게 쌓인 약초들이 바구니에서 튀어나와 그의 목에 닿았다. 어쨌든 땅에서 나는 것들이라 더욱 기분이 나쁘다. 어차피 빗물에 씻겨나갈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흙이 몸에 닿는다는 건 여전히 짜증 나는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되도록 약초를 적게 캤던 것인데. 퍄랴르 하나만으로 인내심이 한계치를 달리고 있었다. 그가 약초를 요구받은 양만큼 캐냈을 때는 벌써 저녁때가 가까웠다.
겨우 마을로 돌아왔지만 평소와는 다른 길로 향했다. 그 이유는 오늘 퍄랴르가 웬일인지 자신의 집에 초대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이 퍄랴르가 말했던 기회와 관련된 것임을 직감하고 그의 집으로 갔는데. 그 집의 모습에 그는 어처구니가 없어 중얼거렸다.
"하, 누가 보면 여기가 영주성인 줄 알겠네."
그의 저택은 참으로 거대했다. 성처럼 튼튼하고 견고한 벽은 없었지만 그 화려함은 마치 귀족의 집을 연상케 했다. 정작 이곳에 사는 이는 그저 잘 사는 마을의 촌장에 불과한데. 문지기들까지 고용했는지 지금 사람이 없는 영주성보다 영주의 집처럼 보인다. 그가 문지기 중 하나에게 초대장을 내밀자 문지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알비스, 어디서 훔쳐 온 건 아니겠지?"
그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막았다. 이 마을은 사람을 대체 어디까지 바보로 만들 생각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초대된 게 믿기지 않는다 쳐도 이런 마을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간 하루 만에 들통나 소문이 날 텐데 말이다.
"퍄랴르 씨한테 받은 거 맞아요. 그리고 훔쳤으면 바로 쫓겨날걸요."
"그, 그렇겠지."
문지기는 얼떨떨하게 대문을 열어주었다. 그 사이로 그가 들어가니 뒤에서 그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온다.
"쟤가 원래 저렇게 말을 잘했냐?"
"나름 약초도 잘 구별하는 애잖아."
정말이지 신물이 나는 마을이다. 그리고 들어간 저택에서도.
"어서 오세... 뭐야? 알비스? 네가 왜?"
그는 말없이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곳에 고용되어 허드렛일을 하는 여인도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보다 신경질적으로 그가 떨어트리는 물기를 닦았다.
"얼른 손님방으로 꺼져! 다시 청소해야 하잖아!"
분명 그는 정식으로 초대받아 온 것인데.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는 이 상황이 참 우스웠다. 이 정도로 사람을 비참하고 화가 나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손님방은 어디에 있길래."
"멍청하기는! 저쪽 복도잖아!"
그가 이곳에 처음 온 것이라고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멍청하다 말하는 이를 그는 어떻게 여겨야 할지. 그는 비웃음을 삼키며 그녀가 가리키는 복도로 걸어갔다. 퍄랴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 기회라는 것이 영 거슬렸다. 어쨌든 그 소녀와 관련된 일이라는 건 확실했으니까. 그렇게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을 때였다. 복도의 끝에서부터 이쪽으로 걸어오는 퍄랴르를 발견한 것은.
"음? 오,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초대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게 티가 나는데 뻔한 거짓말을 하는 그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크흠, 그래서 약속한 건 가져왔느냐?"
그러면서 잘도 자신이 가져온 약초와 술을 탐냈다. 그에게 자신이 바구니에 수북이 쌓이도록 캐온 약초들과 따로 보자기에 싸두었던 약주를 보이자 그는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흐흐흐, 확실하구나. 그럼 나를 따라오거라."
그리고 그가 안내한 곳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한 방이었다. 오히려 멀쩡한 방이라는 것에 그가 놀랄 지경이었다. 분명 창고만도 못한 방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곧 저녁때가 되면 부를 테니 그때 내려오거라. 젖은 옷은 갈아입고."
퍄랴르는 그런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심지어 그가 입을 마른 옷까지 주는 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옷에 무언가 수작질이라도 했나 싶어 살펴보아도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아서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러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면 아까 그 여인이 인상을 팍 찌푸리고 그를 쏘아보더니.
"너 촌장 님께 무슨 짓을 했어?"
"무슨 짓이라니."
그는 정말 아무런 일도 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를 노려보는 듯하다 고개를 홱 돌리며.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따라와."
그리고 그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저택에 있는 만찬장이었는데. 그는 그곳에 있는 이들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집주인인 퍄랴르가 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곳에는 성에서 보았던 영주와 눈이 돌아갈 법한 미인이 기다란 식탁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옆에 그날 보았던 붉은 소녀가 있었기에.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으니 영주가 그를 알아차렸다.
"음? 너는."
"아! 소개가 늦었군요. 영주님, 이쪽은 알비스라고 합니다. 가끔씩 약초를 시키면 이렇게 저녁에 초대하곤 합니다."
물론 그는 오늘 이전에 이렇게 퍄랴르의 집에 온 적이 없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가 어색하게 인사하니 영주는 구태여 그를 아는 척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 참 다행이었다. 퍄랴르는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대면시켰던 것 같지만 그들에게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지 흥미를 잃은 듯 영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 식사는 밖에서 쏟아지는 빗소리와 어울려 정말 파티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차라리 늙은이들끼리 하는 조촐한 잔치가 더 활기차지 않을까.
퍄랴르가 애써 활기차게 이야기를 이어가려 노력해보지만 영주는 사무적인 일에 대해서만 근근이 대답하는 것이 느껴져 그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그의 신경은 그들보다는 소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소녀는 음식 때문인지 가면을 벗고 식탁 위에 두어서 그녀의 얼굴을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시간을 멈추어서라도 저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소녀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금빛으로 멍하니 있는 모습에 그는 무어라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풀에 붙어버린 것처럼 떨어지지 않아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 보아하니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하더구나!"
그리고 저녁 식사가 끝이 났을 때. 자신의 방으로 불러온 퍄랴르의 타박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분명 누가 봐도 바보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의심했다. 이 자가 그에게 순수하게 호의를 보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뭐, 좋다. 네가 그렇게 용기가 없으니 어쩔 수 없구나. 오늘 밤을 기대하거라."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창가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멍하니 그 모습에 빠져들었다. 창문은 액자요 먹구름 아래 세피아 톤으로 물든 세상은 오래 묵은 그림이었다. 그 묵은 그림 속에 가면을 쓴 소녀가 몸을 걸치고 있었다. 세상과 같은 톤의 정적을 두르고 그림과 함께 멈춰 서서 우수에 찬 금빛으로 아득한 곳을 바라보는 소녀가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다가서자. 소녀가 흠칫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분명 저녁 식사 때 그를 보았을 텐데 이제야 그를 인식한 것 같았다. 그에 서운하던 찰나.
"그 아이는 잘 지내?"
"네? 아, 네."
"그렇구나."
소녀가 말하는 아이란 그때 그가 데리고 갔었던 밭쥐가 분명했다. 생각보다 여자의 관심을 끄는데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조금 아쉬워했을 때였다. 소녀는 이내 관심을 잃은 듯 창문의 뒤에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을 좀 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지금은 소녀가 이 창문을 통해 어디를 보고 있었는지 궁금한 마음에 그녀가 서있던 곳에 섰지만 특별히 보이는 건 없었다. 굳이 꼽자면 저 위에 보이는 영주의 성인데 그마저도 잘 보이진 않았다.
그 외에는 딱히 볼 것도 없는 저택의 정원뿐인데. 그녀는 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곧 흥미를 잃고 창가에서 벗어나 자신의 방을 찾았을 때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소녀의 바로 옆방이 그의 방이었던 것이다. 그것만이라면 정말 만에 하나라도 퍄랴르가 순수하게 호의로 행동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퍄랴르가 그를 불렀던 곳 또한 그의 방의 반대편, 소녀의 방과 맞닿아 있는 곳만 아니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