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7화 〉비를 맞으며. (137/220)



〈 137화 〉비를 맞으며.


헬레나는 빗길을 걸으며 자신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벨카를 보았다. 그녀들은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비의 기세는 매서워 조금씩 비가 들이쳐 소녀의 옷은 조금씩 젖어들고 노을빛의 머리카락에도 미처 막아내지 못한 빗물이 조금씩 타고 흘러내렸다. 원래 헬레나는 그녀를 데리고 약초꾼에게  생각은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허드렛일이었고 정 아니면 약초꾼에게 약초를 가져오라고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저기."

벨카가 일을 하던 헬레나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을 걸어온 것은.


"무슨 일입니까?"

평소 조용한 소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헬레나는 허리를 숙여 벨카와 시선을 맞추었다. 소녀는 흠칫 놀라며 종이 하나를 두 손으로  쥔 채 입을 오물거렸다.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도 하는 것일까? 벨카는 헬레나에게 말을 걸고도 한참을 우물쭈물거렸지만 그녀는 소녀가 입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이걸 봐줘."

드디어 벨카가 입을 열면서 헬레나에게 내민 건 지금까지 계속 손에 꼭 쥐고 있던 종이였다.

"이건?"
"이런 식물...   있어?"

그 종이에는 단언컨대 그녀가 처음 보는 식물이 그려져 있었다. 얇은 줄기에는 뾰족한 가시가 가득했고 덤불처럼 엉킨 길고  줄기와 가시 사이에 가느다란 꽃들이 여럿  이상한 모습이다. 란투아의 식물이란 식물은 전부 떠올려 보았지만 그중에서 어떤 것도 이 그림  식물처럼 이질적인 모습을 하지는 않았으니까. 헬레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소녀에게 되물었다.

"약초입니까?"
"응, 아마라트라고 해."


그 이름조차도 생소한 식물이었다.

"자세한 특징을 알  있겠습니까? 약효부터 서식지까지."
"아마도 어셔가 앓는 병의 치료제, 일 거야."

소녀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저 말이 사실이라면 딱 맞는 약초였다. 하지만 그렇게 편리하게 치료제로 사용할  있는 식물이 있었다면 헬레나도 진작에 사용했을 것이다.

"알고 있어. 무슨 약초인지 알고는 있지만. 어디에서 자라는지 정말 이곳에 있는 식물이 맞는지도 모르겠어."


소녀는 그 그림 속의 약초를 간절하게 찾으면서도 어쩔 줄 몰라 울먹이고 있었다. 헬레나는  간절함이야말로 독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간절해지면 온갖 말도 안 되는 방법이나 효용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일을 행하기도 하니까. 그러니 그녀가 간절한 마음에 상상으로 그린 가상의 약초라고 넘길 수도 있었던 그림이었다.


"...같이 찾아보시겠습니까?"

헬레나의 말에 벨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맺힌 금빛에 놀란 감정이 담긴 것도 잠시.

"응."

미소 짓는 소녀의 모습이 헬레나는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함께 그 약초를 찾아주기로 한 이유는 그렇게 웃어줄 만한 이유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간절한 사람은 무슨 말로 말려도 결국 어떤 일이라도 하려고 하니까. 소녀가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게 그녀가 같이 행동하려던 것뿐이었는데. 헬레나는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함께 약초를 찾기 위해 약초꾼의 가게를 찾았던 것이다.

"아."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길."


헬레나는 빗길에서 넘어질 뻔한 벨카를 손으로 받치며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도왔다. 그러면서 헬레나는 소녀가 넘어지는 중에도 손에  우산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바닥을 흐르는 물 때문에 옷이 젖고 말았지만.


"고마워."
"별일 아닙니다."


벨카의 감사를 그녀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며 다시 길을 걸어가고자 했지만 문득 자신이 받치고 있는 소녀의 다리가 떨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소녀는 숨기려고  것 같았지만 헬레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비탈길의 옆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 걷고 있으므로 비탈길에 비하면 쉽게 넘어지지 않을 테지만 빗물이 모여 만들어낸 작은 폭포와 물살은 작은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거셌다. 그 모습을  헬레나가 벨카를 안아 올리자 그녀의 놀란 금빛이 헬레나를 보았다.

"나 혼자서도."
"다리가 떨리고 있잖습니까?"

소녀는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듯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지만 헬레나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힘들지 않아?"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는 약초만 들고 계시길 바랍니다."

헬레나는 정말로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가 너무 가벼워서 놀랄 지경이었다. 비에 젖어 축축하긴 했지만 그뿐이다. 차라리 그녀가 자주 옮기는 연구용 물품이나 진열장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는 묵묵히 벨카를 품에 안은  성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미안해. 내가 따라온 탓에."

소녀의 풀이 죽은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헬레나는 잠시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집었다. 힘을 강하게 줘버리면 그대로 녹아버릴 것만 같아서 차마 힘을 주진 못하고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우으?"


벨카는 그녀의 행동이 당황스러운  같았지만 저항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미안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아가씨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나에겐 그렇게 불릴만한 자격 같은 건 없는걸."

그러고 보니 벨카와 어셔는 도나르가 거둬들인 아이들이라고 하였던가. 이 영지로 떠나오기 전 샬비라는 기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들은 마차의 안에 있었지만 그가 화가 난 듯이 외쳤던 말은 헬레나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다. 그만큼 큰 목소리였으니까. 그리고 그 자리엔 이 소녀도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그녀가 떠오르게 하는 소녀였다.

"그 자격이란 이미 도나르 님과 시프 님께서 당신들을 거두기로 하신 순간부터 아가씨께 주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고 그들의 결정이었다. 그에 대해 누군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는  더 그 자격을 당당하게 누리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아읏!?"

헬레나는 소녀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때렸다. 그렇게 힘을 주어 때린 것이 아닌데도 빨개진 이마가 눈에 밟혔지만 그녀는 좀  엄해지기로 했다.


"스스로를 좀 더 소중히 여겨주시길. 우산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물건이지만 아가씨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고마워."

그제야 벨카는 훅 불면 날아갈 것처럼 여리디여린 몸을 그녀에게 기대었다. 역시 헬레나는 그녀의 간절함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끄어어. 피곤해 죽겠다."


도나르는 격하게 몸을 움직인 것도 아닌데 뻐근한 어깨와 목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푸하하, 그럴 만도 하지 우린 원래  쓰는 게 전문이잖냐."

그런 그에게 말을 걸어온  우르였다. 같이 란투아에 왔으나 각자의 일과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볼 시간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서로가 더욱 반가웠다.

"영주가 나를 불렀다기에 긴장했더니. 네가 영주라니 상상도 못했다고."
"하기야 나도 늙을 때까진 계속 무기 들고 몬스터랑 부대끼며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도나르는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맞장구쳤다.

"나중에 취임식이라도 거창하게 여는 게 어때? 마을 사람들과 안면 정도는 터야 하지 않나? 우리 친구들도 좀 놀랠 겸."
"그렇기야 한데 날씨가 날씨잖아."

우르의 말대로 영주라면 사람들 앞에 얼굴을 보일  취임식 정도는 하는  맞았지만 우기가 한창인 때에 그런 거창한 행사를 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렇구만. 그런데 단순히 얼굴 보자고 부른 거냐?"
"그것도 있지만 나보다는 네가 이 마을에 오래 있었잖냐."
"오호, 마을의 정보를 좀 얻고 싶다?"
"그렇지."

아무래도 그와 친한 사이다 보니 더 거리낌 없이 부탁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보고서로도 알 수는 있지만 현장의 일은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사람만이 아는 게 있다는 건 도나르의 오랜 경험이었으니까.


"끙, 워낙 평화로운 마을이라 딱히 특이사항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는데 말이지."
"그러면 좋긴 한데."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면 그의 일도 줄어드는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초록 난쟁이들이 있긴 하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냐?"


그는 이전에 구출해서 이곳에 데리고 왔던 초록 난쟁이들을 떠올렸다.


"그럭저럭 성당을 숙소로 삼고 근처 땅을 농지로 만들어서 자급자족도 하고 있긴 한데."
"아직도 자립하지 못한 거냐?"
"그게 어디 쉽게 되겠냐."


도나르는 우르의 말을 이해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을 이곳에 데려다 준지 1년이 되어가는데 여전히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란투아에 초록 난쟁이와 회색 난쟁이의 골이 깊다는 건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씁쓸한 이야기였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구만."

그 문제는 이 땅의 주인이 된 그가 해결하는 수밖에 없으니 벌써부터 막막했다. 그러자 우르는 더 심각한 문제가 남았다는 듯 귓속말을 하는 시늉을 했다.

"무엇보다 골치 아픈 건 말이다."
"또 뭐가 있는 거냐?"


 봐달라는 생각도 잠시였다.

"내가 참기가 힘들어."
"허어?"


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쳐다보자 그는 억울하다는 듯 성치 않은 발로 잘도 땅을 구르며 말했다.


"아니! 생각 좀 해보라고! 난 이래 봬도 한창 팔팔한 때인데 사방이 여자야! 피부색이 좀 그래서 그렇지. 나름 귀엽고 예쁜 애들이 많다고!"

그들이 구했던 초록 난쟁이들이 전부 여자이긴 했다. 그야 몬스터의 생리를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이내 도나르는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까 너 그 성당 혼자 쓰고 있었다고 했었지?"
"말도 마! 나 빼고  여자란 게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알아!?"

우르는 제 가슴을 퍽퍽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지간히 쌓인  많았는지 다닥다닥 말을 쏘는데 그 말은 이랬다. 욕실에서 수건인  알고 쓰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누군가 속옷을 빨고 말려둔 것이었다던가. 일을 하려고 나가 보면 직접 농사를 한다고 일하는 난쟁이들이 있는데 옷이 땀에 젖어서 비친다던가. 성당 내부에서는 헐벗고 다니는 여자들도 많다고.

"그나마 내 방이 따로 있어서 다행이지. 집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있는 건 좋은데 나도 남자란 말이다!"

그야말로 천국 같은 지옥이었다. 기사로서 땀내 나는 사내 사이에서 살아온 우르에겐  그 꼴이었다. 좋긴 좋은데 뭐라 하기 힘든 괴로움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아마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어서 더 괴롭겠지.

"차라리 자위라도 하면 버틸만할 텐데. 밖에 애들 눈치가 보여서 제대로 할 수도 없...!"
"야야야! 그만!"

도나르는 과할 정도로 말을 쏟는 우르의 입을 막아 말렸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서로 그런 것까지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덕분에 업무에 대한 부담감은 줄었으니 고마워해야 할지.


"그거 외엔 특별한 일은 없다는 거지?"
"그렇지 뭐. 광산에 대한 일이라던가 특산품에 대한 건 나보다 촌장인 퍄랴르 씨가  잘 알 테고."
"그렇겠지?"

우르의 말에 도나르는 자신이 영주로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왔던 편지를 떠올렸다. 그건  마을의 촌장인 퍄랴르의 초대장이었다. 우기가 겹쳐 성대한 취임식은 할  없지만 대신 영주로 취임한 것을 기념하여 간단한 파티를 자신의 저택에서 하는  어떻겠냐는 정도의 내용이었다. 겸사겸사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겠다는 내용도 있었으니 반쯤 영주 대신 이 마을을 관리해왔던 퍄랴르가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라 짐작했다.

함께 회포를 풀던 우르를 돌려보내고 그는 퍄랴르의 초대장을 꺼내 보았다. 어셔가 정체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병을 앓고 있었기에 파티 같은 것에 참여할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지만 영주의 일과도 관련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부재중인 영주를 대신해 특산물의 양을 계산해서 본영지에 바칠 공물을 보내던 것이 촌장인 퍄랴르였으니까. 그와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없었다. 파티는 내일 열린다고 하니 그때까지 준비하면 되겠지.

"이제 돌아온 거냐?"

그가 바람을 쐴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다 약초를 가지러 가기 위해 외출을 나갔던 헬레나와 마주쳐 말을 거니 그녀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영주님, 영주님은   위엄 있는 말투를 쓰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영 적응이  된다고."
"적응이 되고 안 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셔야 합니다."
"아, 알아. 안다고. 어쨌든 일이니까. 그보다 벨카는? 같이 나갔었다며?"

헬레나가 잔소리를 시작할 기색을 보이자 도나르는 이크 하며 말을 돌렸다.


"방에 데려다 드리고 왔습니다."
"기분은 좀 어때 보였냐?"
"...여전히 불안해하십니다."
"쩝, 어쩔 수 없나."


그들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여전히 그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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