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비를 맞으며.
"끄으."
시프는 어셔의 이마에 올려진 수건이 미지근해질 즘 물에 적시고 쥐어짜 다시 이마 위에 올렸다. 그나마 비가 쏟아지는 때라 물이 바닥날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빗물을 모아두는 통들도 아직까지 멀쩡하다 못해 넘쳐흐를 지경이었으니까. 시프는 이제 허브의 향에 코가 아프다 못해 둔감해질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헬레나의 말에 따르면 감염성이 약한 건 사실이지만 아예 감염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
안 그래도 어셔가 이런 상태인데 갑작스럽게 도나르가 이곳의 영주가 되면서 시프는 난감했다. 당장 어셔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갑자기 성으로 와 생필품들을 정리하고 도나르는 영지의 밀린 업무를 인계받고 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성은 크기가 크기인지라 어느 정도 관리할 인원까지 필요한데 그런 일까지 처리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헬레나 씨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해야 했을지."
다행스러운 건 단순한 의사라고 생각했던 헬레나가 이미 성에서 일을 해본 적이 있다 못해 익숙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하녀를 자처한 덕분에 도나르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시프도 어셔를 돌볼 시간이 생겼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성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빨리 끝났다는 모양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헬레나가 유능하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에 그녀는 그것이 어렵지 않게 헬레나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벨카니?"
"응."
그렇다면 벨카 밖에 없었다. 시프에게도 할 일이 있는데도 헬레나와 일을 분담하는 것은 그녀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벨카는 하루 종일이라도 어셔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 시프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어셔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를 보았다. 소녀의 얼굴엔 그녀와 같은 마스크가 있었다. 시프도 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운데 그녀에겐 불편한 기색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더 쉬지 그랬니?"
"하지만 어셔가 아픈걸."
시프가 타일러 보았지만 역시 벨카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모습에 시프는 한숨을 내쉬며 어떻게 하면 소녀가 휴식을 취하게 할 수 있을지 벌써 며칠째인지 모를 고민을 생각했다. 감염성이 약하다곤 해도 몸이 약해지면 안 걸릴 병도 걸릴 텐데 말리지 않으면 쉴 기색도 보이지 않으니.
"그러다 나중에 어셔가 화내면 어쩌려고 그래."
"읏, 어셔가...?"
아니나 다를까. 무슨 말로 설득하려 해도 어셔의 옆을 꿋꿋이 지키려 했던 소녀가 동요했다.
"어째서?"
벨카가 불안한 듯 우물쭈물거리며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모습에 시프는 쓰게 웃고 말았다. 진작에 생각해둔 방법이었지만 소녀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웬만하면 하고 싶지 않았는데. 시프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상대를 위하는 건 좋지만 상대에게 그런 행동이 꼭 필요한가도 생각해야 해."
그녀는 이 서투른 소녀를 위해서라도 말해 주어야 했다. 벨카는 너무 자신을 몰랐으니까.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이런 관계는 자칫하면 서로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었다.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라도 때로는 그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될 때가 있어."
"어떻게?"
벨카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며 시프는 말을 이었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만약 벨카가 아픈데 어셔가 벨카를 간호하다가 아파서 쓰러지면 어떨 것 같니?"
"그건 싫어."
"어셔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렇구나."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쉬렴."
"...응."
벨카는 겨우 납득했는지 어셔의 얼굴을 몇 번은 더 어루만지고 조금씩 조금씩 발소리가 떨어지다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한참을 늘어지다 결국에 끊어졌다. 그때쯤 시프가 뒤돌아 보았을 때 소녀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방문 너머로 사라진 벨카를 걱정하다 어셔를 보았다. 사실 이렇게라도 소녀를 이곳에 오래 두지 않으려는 건 건강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 방에 어셔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프는 힐긋 방의 구석을 보았다. 그곳에는 어셔와 비슷한 또래의 캐트시 소년이 있었다. 헬레나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어셔의 병은 저 소년으로부터 온 것이었으니까. 때문에 저 소년 또한 이 방에 가둬두다시피하고 있었다. 혹시 또 누군가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는데. 그와는 별개로 시프는 걱정이었다. 어셔가 멀쩡하면 몰라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하고 묽은 죽만 간신히 삼키는 상태니까.
시프는 어셔의 이마에 수건을 뒤집어 얹어주며 방구석에서 잠들어 있는 캐트시 소년을 힐긋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이 가둬두다시피 하고 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얌전해서 존재감이 지나치게 희미했다. 병에 걸린 것이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겠지만 헬레나가 했던 말도 있었으니까.
"이 병은 캐트시보다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대체."
헬레나는 저 아이에 대한 목격담을 몇 년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고 했었다. 란투아에 온 캐트시가 여럿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낮다며. 그런데도 원래 숙주인 저 아이는 별다른 증세 없이 멀쩡하다고 한다. 다만 완전한 면역이라고 볼 수는 없고 증상이 없는 보균자에 가깝다고 말이다. 파르즈의 병은 란투아에서 살아온 그녀가 보기엔 너무 이질적이라 저 병이 캐트시에게나 인간에게나 어떻게 감염되고 작용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는데. 시프는 소년이 아픈 척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노파심이면 좋을 텐데.'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갔다.
"알비스! 요즘 따라 왜 이렇게 자주 싸돌아다니는 게냐?"
그가 오늘도 약초를 캐고 돌아왔을 때 자신의 가게라도 되는 것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덥수룩한 수염의 난쟁이를 보고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겉으론 어리숙한 웃음을 흘렸다.
"아하하, 주문이 들어온 약초가 많아서요."
그렇게 얼버무리니 난쟁이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다가.
"혹시 영주의 요구냐?"
"네, 네? 그걸 어떻게?"
그는 난쟁이가 대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아낸 건지 놀라서 물었지만 그는 헹하고 잘난 듯 웃었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어르신의 지혜라고 생각하거라."
난쟁이가 그 방법은 절대로 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르신의 지혜는 개뿔.'
그는 이전에 성 안에 몰래 드나든 것이 들켜 영주와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이 자는 약초꾼이니 필요한 약초를 조건 없이 구해준다면 충분한 벌이 될 듯합니다."
어떤 벌이 좋겠냐는 영주의 말에 헬레나라는 여인이 한 말이었다. 그는 그녀가 요구하는 약초를 되는대로 구해서 지급해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매일 같이 약초를 캐러 나가야 했다. 헬레나가 직접 약초를 받으러 오기 때문에 소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알 수 있는 사실도 있었다. 영주에게 있어서 중요한 누군가가 병으로 심하게 앓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많은 약초를 요구하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로 열을 내리는 것과 관련된 것이니 더욱. 혹시 소녀가 아픈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안 그래도 가녀린 소녀가 아팠다면 그렇게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열을 동반하는 병은 쉽게 티가 나는 편이기에 더욱. 그렇게 오늘도 꼬장을 부리는 난쟁이에게 대충 맞춰주며 그가 오늘 캐온 약초들을 정리하고 있었을 때였다.
"약초를 받으러 왔습니다."
"아, 네! 헬레나... 씨?"
그날 이후 계속 찾아오는 그녀를 익숙하게 반기려다 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헬레나의 옆에 붉은 소녀가 서 있었으니까. 여전히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소녀의 아름다움은 감출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라 시선이 갔다. 그들의 모습을 본 난쟁이는 언제 그에게 성가시게 굴었냐는 듯 심술이 가득했던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의 평소 모습을 아는 그도 원래부터 선량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오? 오랜만이로구나."
그러면서 난쟁이가 그녀들에게 다가가선 소녀에게 말을 거는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그가 무슨 자격으로 영주의 딸 같은 소녀에게 저렇게 대범하게 군단 말인가? 아무리 옛날부터 영주가 없는 광산 마을에서 촌장으로 영주의 일을 일부 대신하고 있었다지만 그가 지금도 제가 영주처럼 구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당신은... 그때의?"
"기억하는구나!"
"응, 퍄랴르라고 했었는걸."
소녀가 난쟁이를 아는 것 같은 기색에 그는 놀라고 말았다. 대체 언제 그녀를 만났단 말인가? 적어도 이 마을에선 그가 제일 먼저 만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기분이 점점 더 떨어지려 했을 때였다.
"허억?!"
헬레나가 소매 속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내어 자신들에게 더욱 가까이 오던 그의 턱 아래에 들이민 것은. 숙련된 암살자라는 생각이 들 만큼 깔끔한 솜씨였다.
"함부로 다가오지 마시길. 저는 아가씨의 호위 또한 수행하고 있습니다."
"미, 미안하구먼."
그러자 난쟁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나니 헬레나는 단검을 다시 숨겨버렸다. 처음에는 소녀와 자신을 떨어트리려던 모습에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마음에 들었다. 퍄랴르를 가볍게 물린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가 있는 카운터까지 다가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소녀를 데리고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환영하는 바였다.
"혹시 아가씨는 어쩐 일로..."
"당신이 알 필요가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요."
그는 오늘따라 더욱 날카로운 헬레나의 말에 꼬리를 말았다.
"약초를 종류별로 가져오시겠습니까?"
평소와는 다른 헬레나의 주문에 그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소녀와 관련된 일이겠거니 하며 그가 지금까지 캐왔던 모든 약초들을 종류별로 하나씩 가져와 내밀었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헬레나의 서늘한 눈초리가 그를 찔렀다.
"당신 정말 약초꾼이 맞긴 한 겁니까?"
"어, 어째서 그런."
"여기 이 약초는 이렇게 말리면 안 됩니다. 물에 적신 수건에 감싸 보관하던가 주변의 흙과 함께 뽑아 화분에 옮겨 심고 필요할 때 뽑아 써야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창고에 여러 장의 수건이 겹쳐져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지금 사용할 약초가 아니니 상관은 없습니다만 약초꾼이라면 이 정도는 아셔야 하지 않습니까?"
헬레나의 잔소리가 계속 이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의 안색이 질릴 뻔했지만 옆에 있던 소녀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헬레나의 잔소리는 끊어졌다.
"아, 죄송합니다. 혹시 원하는 약초를 찾으셨습니까?"
소녀는 그녀의 말에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그녀들은 결국 평소에 그에게서 가져가던 약초들만을 가져가기로 했다.
"당신, 약초꾼이라면 약초의 보관법 정도는 제대로 알아주시길."
헬레나는 끝까지 경고에 가까운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들이 우산을 들고 가게 밖으로 나가고 침묵이 찾아왔다. 다시 소녀와 만난 그 순간을 만끽할 틈도 없었다. 그녀들이 가게에서 멀어졌을 즘.
"킁, 남의 수발 밖에 들 줄 모르는 년이 기세만 살아서는!"
퍄랴르가 기다렸다는 듯 신경질을 부리며 평소대로 돌아왔다.
"자고로 저런 년들은 남자의 아래에 강제로 깔려 봐야 주제를 안단 말이지."
그 천박한 말에 그의 인상이 구겨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퍄랴르는 계속 말했다.
"쯧쯧, 그러니까 너도 저런 년한테 트집 잡히지 않으려면 약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냐?"
그가 기분이 상한 티를 내는 이유를 헬레나 때문인 것이라 착각한 모양이지만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여태까지 참아온 불쾌감을 대놓고 마음껏 표출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퍄랴르의 말에는 놀라고 말았다.
"그나저나 알비스. 그 아가씨한테 반한 게냐?"
"그, 그건."
퍄랴르는 그의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웃으며.
"큭큭, 척하면 척이지. 모를 거라 생각한 게냐? 하여간에 너도 참 주제를 모르는 녀석이야. 어울리는 상대를 노려야지."
그러면서 파랴르는 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밀었다. 그의 행동에 갈수록 참는 것이 한계에 가까워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정말 더 참을지 말지 고민했을 때 들려온 말이 그의 생각을 멈추었다.
"그래도 너는 내 아들처럼 생각해온 녀석이니 특별히 기회를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