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비를 맞으며.
그녀를 눈에 담은 순간부터 그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그 혼자만이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그를 눈치챈 듯 고개를 돌린 소녀의 금빛과 마주친 순간.
"누구?"
그는 그만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비가 얼굴을 때리고 때때로 넘어져 엉망진창이 되면서도 신경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달리고 달려서 가게로 돌아왔다. 가게의 안에 잠들어 있었던 꼬장꼬장한 난쟁이는 술에서 깨고 가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바보! 머저리! 병신 같은 새끼! 바보 소리만 듣다가 진짜 바보가 됐나!"
그는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고 멍청한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무리 떳떳하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하다못해 그럴듯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았다면 그만인 것을. 머저리처럼 도망쳐버리다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스스로의 머리를 테이블에 퍽퍽 부딪히다가 겨우 제정신을 찾았다. 이제 보니 그 꼬장꼬장한 난쟁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 양반, 가게 좀 봐달랬더니 신경 쓰지도 않고 가버렸네."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느라 뒤로 넘어간 모자를 벗었다. 딱딱한 모자는 챙이 상하는 일도 없이 멀쩡했다. 다만 등 뒤에 매었던 바구니에는 그가 채집했던 약초들이 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 정신없이 달리면서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멍청하긴."
다시 한번 스스로를 질책하며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전부 다 떨어트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입었던 코트와 장갑, 장화를 벗고 나니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꼴이다. 단단히 준비해도 결국 이 꼴이 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괜히 또 헛수고를 한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데리고 있던 밭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약초들도 떨어트렸는데 그 조그만 게 떨어지지 않았으면 이상했다.
"알아서 살겠지."
그저 사소한 변덕이었으니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자신이 채집한 약초들을 종류별로 나누었다. 평소였다면 더 늦게 끝났겠지만 역시 많이도 떨어트려서 일찍 끝나버렸다. 분류를 끝내고 나면 바닥에 천을 깔고 그 위에 분류를 끝낸 약초들을 늘어놓았다. 빗물을 너무 많이 머금기도 했고 약초는 이런 식으로 말려 놓아야 오랫동안 보관해서 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밀린 일을 해결하다 보니 밤이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딴 생각이 들지 않게 일부러 한 일이었는데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떠오르려 하는 붉은 소녀의 모습에 그는 계속 일에 매달려 있었다. 덕분에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전부 정리할 수 있었지만 때문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식으로 일을 다 처리하고 나니 더 이상 떠오르는 소녀의 모습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잠들 시간이 되어 잠자리에 누웠지만 그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하, 미치겠네."
한순간이었다. 고작 한순간이었는데 그 한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흘러내리는 모습도. 프릴이 풍성한 검은 원피스로 자그마한 몸을 애써 가리려 한 것 같았지만 비에 젖어 비치던 소녀의 가녀린 윤곽도. 코 끝에 닿았던 달큼한 향기와 그를 바라보는 순간 보이던 작은 입술과 전혀 위협적이지 못한 경계심을 담던 금빛까지도.
"...슬퍼 보였지."
비 때문에 울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녀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불편한 마음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는 오늘도 약초를 캐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하루를 캐고 나면 이틀 정도는 쉬어도 문제가 없었지만 어제 대부분의 약초를 떨어트린 탓에 하루 분량으로 치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게 앞에 서서 내리막길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는데 저 아래까지 내려가려니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그래서 한 번 캐러 가면 최대한 많은 약초들을 캐서 들고 왔었는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역시 스파이크 없이는 걷기도 힘든 길이다. 차라리 곡괭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힐긋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창문 사이로 아닌 척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시선들이 가득했다. 분명 그가 넘어져서 언덕을 구르길 바라고 있는 거겠지.
"그럼 바라는 대로 해줘야지."
그는 일부러 근처의 이끼가 있는 곳을 밟아 과장스럽게 미끄러져 언덕을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곳저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평소만큼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앞을 확인하며 무언가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집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보았던 곳에서 똑같은 방지턱을 보았을 때 그는 구태여 그 방지턱을 밟거나 붙잡는 일 없이 뛰어넘었다.
때문인지 어제와 같은 자리에 서있었던 꼬마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그는 피식 웃었다. 더러운 흙탕물에 몸이 젖는 게 싫어 그토록 짜증 나고 골치 아팠는데 이제 보니 이렇게 미끄러지면 누구보다 빠르게 아래로 내려갈 수 있지 않은가? 그는 기세를 타고 어느 때보다 빠르게 언덕을 내려왔다. 그러자 벽을 지키던 발데르가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응? 알비스. 약초는 어제도 캐지 않았냐?"
"그게 어제는 약초를 많이 캐지 못해서요. 좀 더 캐야겠더라고요."
"그, 그러냐?"
발데르는 오늘따라 활기찬 그의 모습이 어색한 듯했지만 그가 약초를 캐러 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문을 넘어 벽이 멀어질 때까지 천천히 들판을 걷다 약초를 찾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들판을 뒤졌다. 약초를 찾아야 하는데 좀처럼 약초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씩 눈에 띄는 것을 찾아 등 뒤의 바구니에 넣고 있지만 이런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예정보다 일찍 마찻길로 가서 길을 따라 약초를 찾았다.
눈에 보이는 대로 약초를 캐어 바구니에 넣으며 마찻길을 따라오르다 보니 어느새 성으로 가는 길이다. 분명 어제와 같은 길인데도 골목마다 있는 크고 작은 계단을 따라 흐르는 물도 걸을 때 방해된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작은 폭포와 강으로도 보이고 부슬부슬 부서지는 비의 조각이 시야를 흐려 하얗게 물든 세상도 방에 곰팡이를 쓸게 만드는 귀찮은 습기가 아닌 땅으로 내려온 구름 같았다.
그는 곧 어제와 같은 성벽의 앞에 섰다. 등 뒤의 바구니에는 약초가 평소의 절반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약초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떨어트린 것 같으니 이곳에서 찾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성벽의 아래로 들어와 약초를 찾았다. 비록 떨어트리긴 했지만 비가 이렇게 오고 있으니 벌레들이 달려들거나 시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여기서 대부분 다 떨어트렸었나."
그는 괜히 혼잣말을 하며 힐긋힐긋 주변을 살폈다. 아직 정원의 안쪽과는 멀어서 그런지 소녀의 붉은색 한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곳저곳에 그가 떨어트린 약초들이 보였다. 다른 풀들과 달리 뽑힌 상태로 땅 위에 널브러져 있어서 찾기도 쉽고 힘을 들여 뽑지 않아도 되지 주워가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정원의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었을 때였다.
"뭐야? 이쯤에 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떨어트렸던 약초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주변을 더 살폈지만 그곳에서부터는 그가 떨어트린 약초들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다른 곳에 떨어트린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떨어진 것들이 사라진 것은 이상했다. 어제 잃어버린 약초들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고 있었을 때였다.
"어제 그 사람이구나."
그의 귀를 자극하는 나긋나긋한 미성이 들려온 것은. 정말 잠깐 들었던 목소리였지만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어제 이 정원에서 보았던 바로 그 소녀의 것이 분명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바로 고개만 돌리면 그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을 텐데 목이 굳어버린 것처럼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쿵쿵 귀를 울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방해된다고 생각했다. 소녀의 목소리를 좀 더 크게 듣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뭐, 뭐야?!"
약초를 찾느라 숙이고 있던 그의 몸을 타고 조그만 것이 올라오는 감각에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찍찍!
그의 몸을 타고 올라온 것은 어제 그가 도망치면서 약초들과 함께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한 밭쥐였다.
"그 아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어. 당신이 구해준 거지?"
"그걸 어떻게..."
덕분에 긴장이 풀린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볼 수 있었지만 그는 기대했던 소녀의 모습을 온전하게 눈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첫날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비에 젖지 않게 우산까지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사실에 그는 안타까움을 삼켜야만 했다. 어제 도망치지 않았다면 소녀의 얼굴을 계속 눈에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그보다 두고 갔어."
소녀는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하얗고 수수한 손수건으로 만든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건."
그 보따리 안에는 그가 떨어트렸던 나머지 약초들이 고이 들어있었다. 약초에 대한 지식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종류대로 나누어두었을 뿐일까? 보따리 안의 약초들은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보따리에도 달큼한 향기가 배어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거슬리던 약초의 냄새도 이런 손수건에 묶여있다는 이유만으로 향긋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에 그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진심으로 미친 게 아닐까 생각했을 무렵.
"어제 말씀하신 자가 이 자입니까?"
소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는 다른 차가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바로 뒤에 처음 보는 여인이 우산을 들고 서있었다. 분홍색과 보라색의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단발의 여인이었다. 하얀색과 검은색을 기조로 한 하녀복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지만 여인의 차가운 분위기와 날카로운 기품 탓인지 고아하게 보일 정도였다.
"응, 어제 정원에 있다가 마주쳐서."
"이곳은 엄연히 영주의 성. 그런데 한낱 약초꾼이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는 겁니까?"
그녀가 쏘아보듯 그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매섭다.
"당신은 영주 님을 뵈어야겠습니다."
"아니, 그건."
"싫다면 감옥도 좋겠지요."
그는 군말 없이 그녀를 따라야 했다. 새로 온 영주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마음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는 곤란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소녀가 동행한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어셔는?"
"유감스럽지만 여전히 차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셔를 보러 갈게."
"지금은 시프 님이 돌보고 계시니 조금만 더 쉬셔도..."
"보러 가고 싶어."
"...예."
여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락하자 소녀는 기다렸다는 듯 어디론가 급하게 달려가 버렸다.
"당신은 이쪽입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여인이 재촉했다. 그리고 도착한 영주의 집무실 앞에서 그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영주가 내리는 판결에 따라 그의 목숨이 오르내릴 것이고 최악의 경우.
"영주 님. 헬레나입니다."
"어, 들어와."
그가 생각할 틈도 없이 여인은 문을 열었다.
"끄응, 영주가 오랫동안 없었던 곳이라고는 들었지만 일이 너무 많이 밀렸잖아."
그곳에는 산처럼 쌓여있는 서류를 보며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한 기사가 있었다. 그것도 그가 아는 발데르와 같은 양식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그가 상상했던 영주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당황하고 있으니.
"영주 님. 무단 침입자를 잡아왔습니다."
"무단 침입자라고?"
서류를 보며 쩔쩔매던 영주가 헬레나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무단 침입이라니. 이곳에?"
"예, 보아하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듯합니다."
"흠, 왜 그랬는지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다행히 이번에 발령 온 영주는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오만하다거나 필요 이상으로 엄격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덕분에 그는 이곳에서 여러 약초가 잘 자라고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곳이라 약초를 캐기 위해 찾아오다 보니 버릇처럼 와버렸다고 변명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약초꾼이라. 좋은 의견이 있냐?"
그는 영주가 여인에게 의견을 묻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심한 벌만 아니면 좋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