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비를 맞으며.
"진짜 이 비는 언제쯤 그치려는 건지."
그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 비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비스는 이 마을에서 근근이 약초를 캐며 살아가는 약초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비는 그렇게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나 이 시기에 비가 내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가 좋아질 수는 없었다. 약초를 캐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우산을 쓰면 되지 않느냐 해도 약초를 캐면서 우산까지 똑바로 쓸 수만 있다면 그가 비를 신경 쓰는 일도 없었으리라.
"아저씨! 전 약초 캐러 가니까. 가게 좀 부탁해요!"
"...어엉. 쿨."
어제 그의 가게가 술집이라도 되는 듯 약주를 실컷 퍼마시고 의자에 앉아 곯아떨어진 난쟁이에게 소리치자 제대로 알아듣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휴. 저 술주정뱅이."
마음 같아선 가게 문을 닫는다며 그를 끌어내어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저 난쟁이는 저래 봬도 이 마을의 촌장으로 광산 마을에서 권력과 퍽 대단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어렵게 담근 약주도 그가 원하면 헌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나름 양심은 있다며 세금 대신 걷어가는 약초의 양을 줄여주긴 하지만 잘 담근 약주의 가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손해였다.
그래놓고 인심 썼다는 듯 생색이란 생색은 전부 내는 것을 보면 저 꼬장꼬장한 난쟁이가 알비스를 바보 취급 하는 게 분명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눈치니까. 하지만 이걸 알고 그에게 항의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었다.
"저 늙은이 누가 안 잡아가나."
이번에 발령 온다는 영주가 저 난쟁이보다는 제대로 된 인물이기를 빌며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비에 쉽게 젖지 않는 두껍고 무거운 코트로 전신을 가리고 약초를 담을 바구니를 맨 뒤 챙이 넓고 딱딱한 모자를 썼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부츠와 장갑도 필수였다. 약초를 캐는 그가 비를 맞지 않으려면 이런 방법뿐이었다. 그리고 문을 나서니 벌써부터 거센 비가 날아들었다. 이 정도면 우산은 무용지물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지금 집 밖에 나와있는 사람은 그 혼자 밖에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 시간이라면 광부들은 전부 광산을 캐러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나마 나와서 햇볕을 쐬거나 돌아다닐 이들도 쏟아지는 비에 밖으로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 그처럼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나온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가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걸어내려가고 있으니 이곳저곳에서 시선이 날아드는 느낌에 남몰래 혀를 찼다.
이 마을의 사람들이 비가 오는 날이면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꿋꿋이 걸음을 옮기던 찰나. 그는 두터운 부츠 너머로도 느껴지는 듯한 미끄러운 감촉에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날 것을 직감했다. 눈앞에 하늘이 잠깐 보인다 싶더니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충격과 함께 언덕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파하하하! 이번 내기는 내 승리로구만!"
"크으, 알비스! 좀 더 조심해서 걸었어야지!"
그가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가는 모습을 보았는지 주변에서 저런 식으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들려왔다.
'좀 도와주기라도 할 것이지.'
이게 이 마을의 전통 아닌 전통이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산에 지어진 광산마을의 특성상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이런 언덕에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었다. 단체로 광산에 가는 광부들도 서로 미끄러질지 안 미끄러질지 내기하는 것도 일상이니. 하지만 그에겐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적어도 올라가야 하는 광부들과 다르게 알비스는 혼자서 아래로 내려가야 하니 미끄러지는 일이 더욱 많았으니까.
마차가 다니는 길을 통한다면 미끄러지는 일은 없겠지만 그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조금 창피하더라도 이렇게 가는 편이 덜 힘들고 편했다. 무엇보다 이건 그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분명 이끼가 없던 곳을 밟았는데.'
이 광산마을의 길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비가 내리다 보면 조금씩 이끼가 끼는데 이게 또 골치가 아팠다. 미끄러지고 싶지 않아도 미끄러지게 만들어버리니까. 광부들은 이런 날이면 신발에 스파이크를 달아 미끄러지는 걸 방지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대장간에서는 그에게 스파이크를 팔지 않았으니까.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마을에서 알비스는 이런 역할이니까.
다행스럽게도 그는 곧 내리막길 가운데 툭 튀어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건 방지턱으로 이렇게 사람이 미끄러지면 붙잡아서 멈추라는 이유로 놓아둔 것이었다. 원래는 이전에도 몇 번 정도 봤어야 하는데 이제야 본 것을 보면 이미 이 시간에 그가 나올 것을 알고 치워둔 것이다. 이 방지턱들은 언덕길을 사이에 둔 집들이 관리하는 것이니까. 그는 어떻게든 그 방지턱을 붙잡아서 일어설 수 있었다.
"하, 또 다 젖었네."
두꺼운 코트와 챙이 넓은 모자를 쓴 보람도 없이 넘어지면서 아래로 들이친 비 때문에 그는 다 젖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아주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두꺼운 코트는 비를 막는 것 외에도 거친 언덕길을 미끄러질 때 그의 몸을 보호해 주니까. 덕분에 코트의 등 쪽은 빛이 바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다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리고 다시 조심스럽게 남은 길을 내려가려 했을 때.
-퍽!
"어?"
그는 자신의 머리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옆으로 떨어지는 돌까지. 딱딱한 모자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겨우 중심을 잡았던 그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한 충격이었다. 돌이 날아든 곳을 보자 볼 수 있었던 건. 이쪽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이였다.
"이런 빌어먹...!"
그는 그대로 다시 언덕의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내려갔다.
"...개 같네."
그는 결국 언덕을 전부 내려온 뒤에야 멈출 수 있었다. 언덕의 아래에는 벽돌로 이루어진 벽이 있었다. 본영지나 예카테리나 대 장벽에 비하면 정말 초라하지만 영주가 없던 마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견고한 벽이었다. 가끔씩 본영지에서 기사들이 파견되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가 싶기도 하다. 산지에 지어진 광산마을에 이 벽이 효용이 있는지는 둘째치더라도. 허탈한 마음에 언덕을 다 내려왔음에도 주저앉아 있었다.
이제 벽 밖으로 나가 약초를 캐러 가야 하지만 움직이기가 싫었다. 도착한 곳이 산 위에서 그와 함께 언덕을 타고 흘러내린 흙탕물 속이라 해도. 그 벽 밑에는 물이 빠져나갈 구멍도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비의 양이 워낙 많아 잠시 고이는 흙탕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알비스, 또 미끄러진 거냐?"
"발데르 씨."
그런 그에게 말을 걸어온 건 한 기사다. 발데르는 예전에 타국에서 와 이 마을에 머무르게 된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에겐 오른손부터 팔꿈치까지 팔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곳에 들어온 타국의 기사들 전부가 그랬다. 그래서 그들이 처음 이곳에 정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괜히 짐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몸이 한 군데씩 불편하다는 것이 우습다는 듯 건장한 마을 청년들로 이루어진 경비대를 애 다루듯이 상대해 이기면서 우려는 사라졌다.
"아하하, 중간에 멈추긴 했는데. 동네 꼬마가 돌을 던져서."
"아이고. 참."
그래도 이 마을에서 알비스에게 친절한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라 다행이었다.
"오늘도 수고해라."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도 아니니 그로선 고까울 다름이지만 그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보이는 건 칙칙한 갈색 들판이었다. 가을이 되어 익은 호밀들이 비에 젖어 보기 싫은 모습이다. 그 아래로는 흙탕물이 고여있으니 그는 자꾸만 그를 붙잡는 들판을 걸어 약초를 찾아 나섰다. 허리를 숙여 풀 줄기 아래를 살피다 보면 쓸만한 약초가 한둘은 나오는데 오늘은 운이 없었던 모양이다.
-찌직!
"쯧, 밭쥐잖아."
기껏 찾은 약초는 갉아먹은 흔적이 가득했고 그 옆의 호밀의 줄기를 손발과 꼬리로 감아 잡고 있는 밭쥐가 비에 젖은 몸으로 찍찍 거리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썩 기분 나쁘지만 그가 손으로 쥐를 잡아 올리자 살짝 발버둥 친다. 하지만 이 빗속에서 체력이 많이 빠졌는지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그런 밭쥐를 자신의 어깨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가만히 있는 녀석을 보면 그가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아챈 것 같았다.
그저 그처럼 흙탕물에 빠지려는 것 같은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뿐이다. 이후로 계속 약초를 찾아보았지만 그는 더 이상 약초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는 곳은 내려올 때 사용한 길이 아닌 마찻길이었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약초를 캐기도 하고 미끄러질 염려가 적으니까. 하지만 겨우 발견한 약초들도 쉽게 캘 수는 없었다.
"이 빌어먹을 비 좀 그만 내렸으면."
비가 내리면 평소에 쉽게 뽑히는 약초들도 단단해진 땅 때문에 뽑히지 않는 일이 많아서 또 고생이었다. 약초꾼에게 비란 친해지고 싶어도 친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언덕을 오르며 정상 언저리에 도착했을 때는 등 뒤의 바구니는 약초로 가득했다. 그렇게 버릇처럼 마지막으로 약초가 잘 자라는 포인트로 가는 길이었다.
"알비스 씨! 오늘도 약초 캐러 다녀오셨나 봐요?"
"로, 로스크바 씨?"
한 난쟁이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다행히 그녀도 알비스에게 친절한 이들 중 하나였다. 적어도 그녀는 제값을 주고 약초를 사 가니까. 그래서 내심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저기 이거랑, 이거랑, 저 약초로 주실래요?"
"예, 예. 철전 4전입니다."
"여기요."
왜 그녀가 그가 캐낸 약초들을 필요 이상으로 사 가느냐 하면 그녀가 타국에서 온 의사와 사귀는 사이라는 걸 알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광산에서 철광을 캐는 광부들이 대부분인 마을에서 혼자서 약초를 캐며 살아가는 알비스는 약골이라던가 마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많았는데 의사라는 남자는 더 덜떨어져 보이는 데도 알비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이 여인에게서 호의를 받았다. 그로선 대체 약초꾼과 의사의 차이가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런데 어깨 위의 그건 뭔가요?"
"예?"
그녀의 물음에 그는 아까 자신의 어깨에 올려두었던 밭쥐가 아직도 어깨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작에 도망쳤을 거라 생각했는데.
"귀여워라."
그는 어쩌면 이 녀석을 이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로스크바! 야, 약초는 언제 와?"
"앗, 전 볼 일이 있어서!"
곧 의사의 부름에 급하게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하긴 너무 얄팍한 생각이라고 스스로도 느꼈다. 그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이 마을의 중심에 있는 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주가 왔다고 했었는데."
그는 혹시 안에서 새로 온 영주와 마주치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 포인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오래된 성의 정원에는 오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아 여러 약초가 자라고 있었으니까. 그는 성벽의 아래쪽에 있는 개구멍을 보았다. 아무리 견고한 성벽이라도 오래 방치가 되면 어쩔 수가 없어서 알비스가 성을 드나들 때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다. 다만 그곳도 빗물이 고여 흙탕물로 가득했다.
"진짜 더럽게 싫다."
그래도 그는 흙탕물로 가득한 개구멍을 통해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둘러본 주변은 그에게도 익숙한 광경이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아름답게 정비되어 있어야 할 정원은 개발되지 않은 산지처럼 온갖 식물들이 뒤엉킨 밀림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선 그 보기 힘들다는 나무도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이곳이 산지이다 보니 나무도 특산품 중에 하나였으니까.
그는 조금이라도 기세가 줄어든 비를 느끼며 약초가 있는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곳에선 질 좋은 약초가 많이 나니까. 몇 개만이라도 건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정원을 헤치고 다니며 약초들을 찾아내는 대로 뜯어 바구니를 채우다 보니 그는 자신이 성이 보일 정도로 정원 안쪽에 깊이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건 그의 시야에 잠깐이지만 선명하게 남은 붉은색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꽃이라도 핀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 정원에서 붉은 꽃처럼 눈에 띄는 꽃이 피어난 적은 없었다. 아니, 혹시 피어난 적이 있어도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왜냐하면 낡은 정원의 중심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절세의 소녀가 피어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