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3화 〉비를 맞으며. (133/220)



〈 133화 〉비를 맞으며.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는구만."


도나르는 투구를 탕탕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게 벌써 며칠째더라. 작년에도 이렇게 쏟아졌긴 했지만 이렇게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시프와 아이들이 나오길 기다리며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정말 괜찮은 거냐?"
"갑자기 영지를 하사받다니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출세하는 건데. 마침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원하던 곳이고."


도나르는 자신에게 다가온 친구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는 좋게 생각하자며 웃어 보였다.

"그렇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래, 알고 있었다. 수십 년은 일해야 은퇴 같은 느낌으로 하사받는 것이 영지일 텐데 다른 나라의 기사인 그가 고작 1년 정도 그의 아래에서 일하고 휘하의 영지를 가지게 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정도는. 그렇다고 해서 아이올로스의 휘하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지만 그가 아직 현역이고 일한 시간을 생각해 봐도 지나치게 빠른 출세였다.

"...야, 나는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기트와 오두르의 옆에서 도나르를 지켜보다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는지 샬비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몰아붙이듯 섰다.


"네가 좋은 녀석이라는 건 알아. 알겠는데.  이렇게 할 필요까지 있냐?"
"야, 샬비! 너 말을 좀!"

오두르가 그를 말리려 했지만 그런 그를 도나르가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샬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고향에서부터 갖은 슬픔과 아픔을 나누고 희망을 찾아 여정을 떠나온 전우였다. 그런데 그만이 갑작스레 영지를 발령받아 떠나게 되는 이유를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유가 자신의 혈육도 아닌 그저 이곳으로 오는 길에 만나 잠시나마 길을 같이하게 된 아이들 때문이었으니까.

"내가 틀린 말 했냐?!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냐고? 그냥 여행길에 만난 애들이었잖냐!"

도나르는 그렇게 말하는 샬비를 보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지켜보는 동료들을 보았다. 말은  하지만 다른 녀석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아마 샬비도 그들과 같기에 대표로 말하는 것일 터였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그라 해도  정도로 말해주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그들이 납득할만한 대답을 들려주어야 했다.


"그래, 아이들을 내치면 계속 이 성에서 일할 수도 있겠지. 귀찮게 영지를  일도 없고 녹봉을 받으면서 일하는  편하기도 하고. 가족도 안전하게 지킬 수도 있으니까."

윗사람은 책임져야 할 것이 많다. 대신 떠안아야 했던 그 책임이 너무나 무거워 짓눌려 죽어가던 그들이니까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 성에 남으면 누가 나를 좋게   있겠냐?"
"그건..."


샬비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도나르가 주체하지 못할 때면 말려주고 조언해 주던 똑똑한 친구니까. 기사에게는 중요한 것이 세 가지 있다. 적을 죽이는 것, 승리를 쟁취하는 것, 사람을 지키는 것. 몇몇은 보기에만 좋은 허울이니 뭐니 하지만 이건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덕목이다. 그런데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해서 내쳐버리면 스스로 기사의 덕목을 저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는 기사다.


"손가락질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우리는 기사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 가야 하는 거다."

샬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지켜보던 기사들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더 이상 불만을 품은 녀석들은 보이지 않으니 이것으로  거겠지. 그는 마침 들것에 실린 어셔가 마차에 태워진 것을 확인하고 마차에 매어둔 자신의 힐디스비니에 올라탔다. 마차는 그들이 여행을 할 때  전차가 아니라 힐디스비니  마리만으로도 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마구간에 있던 말도 기트가 짐 마차에 싣고 데려다주기로 했고 잊은 물건도 딱히 없었다.

"기트."
"잠깐만 오두르, 나 대신 마차  끌어줄  있냐?"
"상관은 없는데. 왜?"
"볼 일이 좀 생겨서."

기트가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 이상했지만 도나르와 오두르는 꼬투리 잡지 않았다.

"그럼 영지까지만 부탁한다. 오두르."
"그래."


짐마차에 매어두었던 힐디스비니를 교체하고 오두르가 올라탔다. 이제 가야  시간이었다.

"우르한테 안부나 전해달라고."
"오냐."

도나르는 동료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다 마주친 게라르두스와 요시프는 간단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와 이별을 고했다. 이곳에 와서 친해진 이들이었는데. 그들과도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섭섭하면서도 도나르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랴!"


그들은 그렇게 떠나가는 도나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굳이 오두르와 바꾼 이유가 뭐냐?"
"답지 않게 점잔 떠는  녀석 대신 말해주고 싶어서."

날이 선 샬비의 말에 기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너도 알  아니냐. 도나르가 저렇게 말한 이유를."
"...."

샬비가 입을 다무는 모습을 지켜보며 기트는 말을 이었다.

"그럴 거면 도나르한테 눈치 없다고 하지나마. 도나르가 다혈질인 게 문제라면 너는 너무 고지식하다고."

샬비가 이러는 이유를 기트도 알고 있었다. 도나르와 아이들이 만난 게 그렇게까지 오래된 일이 아닌데도 끝까지 책임지고자 하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는 거겠지.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동료들도 내버려 두고. 사람의 관계라는 건  번을 경험해도 참 신기했다. 오랫동안 지내야 친해질 수 있을  같은데 마주치자마자 거짓말처럼 친해지기도 하고 철천지원수가 되기도 하니까.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버리라는  너무 괴로운 일 아니냐."


그건 그냥 풀 수 없는 숙제 같은 것이었다.

"흑, 메아, 어셔가 죽으면 어떡해?"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헬레나란 분은 좋은 약을 만드는 유명한 연금술사라니까요."

메디아는 어셔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로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류드밀라를 달래었다. 평범한 감기인 줄 알았다. 병에 대해 예민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감기겠거니 넘길 수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단순한 감기가 아니라고 밝혀진 순간부터 일은 그녀들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먼저 어셔와 접촉이 있었던 류드밀라나 시프 같은 이들은 헬레나에 의해 격리되었다가 검사를 받고 안전하다고 판단된 후에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도나르가 갑자기 자신의 가족과 함께 휘하의 영지로 발령 났다는 것이 발표된 것이다. 기사가 영지를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면 너무나 빠른 승진이었다. 다른 이들이 질투할 만큼. 하지만 쉬쉬하고는 있어도 성내에서 그가 영지를 하사받게 된 이유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그가 거둔 아이, 어셔가 이름도 모르는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걸. 그렇기에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오늘 그들이 떠나는 날까지 변변찮은 배웅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제 떠나려는 것 같아요."
"훌쩍, 응."


그녀들은 방에서 나와 정문이 보이는 창문을 통해 어셔와 벨카를 태우고 있을 마차를 보았다. 이마저도 간신히 그녀들의 아버지들에게 허락받아 멀리서나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조금이라도 그들의 모습을 보고자 창문에 붙어 있었지만 그녀들은 서로를 볼 수 없었다.


"...."


헬레나는 어셔의 곁에 앉아 점점 더 멀어지는  쪽을 바라보는 벨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추억 속의 그녀를 닮은 얼굴에 가득한 슬픔이 금빛을 타고 흘러내릴 것 같아서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저 붉은 머리카락을 손에 쥐면 연약한 꽃처럼 스러질 것 같았다. 그저 닮았을 뿐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도 헬레나는 가슴이 아파서 보는 것조차 힘겨워 애써 앓고 있는 어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앓고 있는 병을 헬레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만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병은 지금까지 란투아에서 단  번밖에 보고되지 않았으니까. 온몸을 뒤덮는 검은 점은  병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었다.  병에 걸린 환자를 본 적이 있었던 그녀는 놀라고 말았다. 분명 치사율은 높지만 전염성은 거의 없어서 란투아에서 사라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상관없는 인물에게 발병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류드밀라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헬레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헬레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는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류드밀라의 피를 뽑아 검사해봤지만 그녀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아니라면 다음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옛날에  병에 걸린 환자가 하는 말을 그녀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의사 님은 캐트시를 본 적이 있나요? 저는 본 적이 있는 거 같아요. 잠깐 봤던 거라 확실치는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  같았는데..."

환자의 말을 허투루 들어선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말도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헬레나는 그녀의 말을 믿지 못했다. 캐트시는 파르즈의 수인, 동족에 대한 애착심이 강한 그들의 눈을 피해 노예로 팔리는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것을 환각이나 착각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녀는 마차의 구석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경계하는 캐트시를 보았다. 헬레나는 이전 환자의 말을 떠올리고 캐트시가 어셔의 곁에 있다는 것에 의심이 생겼다.

만약 그 환자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곳에서 우연히 감염된 것이라면?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캐트시의 피를 뽑았고 곧 캐트시가 같은 병을 가지고 있다는  확인할  있었다. 환자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이 병은 캐트시에게서 옮겨진 것이었다.  소식을 그녀는 아이올로스에게 보고했고 그리하여 도나르를 비롯한 이들이 단체로 영지에 발령받는다는 명목으로 반쯤 쫓겨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그들과 함께 가고 있는지 묻는다면 병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다. 캐트시를 보기 전부터 처음 보는 종류의 병이라 외부에서 온 병이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캐트시의 존재로 인해 출처가 파르즈라는 것까지   있었다.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의사가 아닌 연금술사인 그녀에게 그 의문을 해결할 의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알비스! 알비스 있느냐?!"


창고로 보이는 곳에서 이것저것 복잡하게 쌓여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던 금발의 청년은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리하건 물건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갈색 수염이 덥수룩한 난쟁이가 있었다.


"아저씨? 또 허리를 삐끗하신 거예요?"
"끙, 사람 놀리는 게냐? 이전에 허리를 삐끗한 뒤로 비가 올 때마다 허리가 아프다고 했잖냐."
"그, 그랬었죠."

그는 난쟁이의 꾸중에 무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늘 쓰시던 약초로 드리면 되죠?"
"그래! 저번처럼 실수하지 말고! 뭣하면 전에  의사 양반한테 좀 배우는 게 어떻겠냐?"
"아하하, 생각해 볼게요."


그의 꾸중 섞인 타박을 들으면서도 청년은 헤실헤실 웃으며 종류별로 모아둔 약재 중에서 골라 그에게 한 움큼 내밀었다.

"음, 확실하구나."

그러면서 그는 동화 5전을 내밀었다.


"그런데 요즘 마을 분위기가 좀 어수선한데 무슨 일 있어요?"

그에게서 동화를 받은 청년은 다시 창고로 들어가려다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에잉, 뭐냐. 아직도 제대로 소식을 못 들은 거냐? 그런  지나가던 들쥐도 알아서 주워듣겠다."


난쟁이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를 보면서도 말해줄 생각은 있는지 근처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하느냐!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술을 가져와야지!"
"아, 네, 네!"


그가 황급히 진열장의 유리병 중에서 작은 것을 하나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난쟁이는 그 병안에 가득한 술에 담긴 약초의 모습을 흡족하게 보다가도 인상을 썼다.

"술잔은 없느냐?"
"맞다! 들고 올게요!"
"쯧쯔, 기본이 안 되어 있어 기본이."


난쟁이는 어리바리한 청년을 못마땅하게 보면서도 유리병의 뚜껑에 술을 따라 홀짝였다.

"가져왔어요!"
"이제야 이야기할 맛이  나겠군."

그러면서 그는 술을 유리병의 반은 마신 뒤에야 취한  붉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수선할 만도 하지. 이 영지에 새로 영주가 오시기로 하셨으니 말이야."
"여, 영주가요?"

그는 당황스러운  되물었지만 난쟁이는 인상을 팍 쓰며.

"영주라니! 영주 님이라고 불러야지!"
"하, 하지만."

청년은 기가 찬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쟁이는 술을 마시느라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이고 뭐고 간에 입조심해라. 모가지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그러면서 술을 마시기 바쁜 난쟁이를 보던 그는 문쪽으로 걸어갔다. 빗길을 타고 마차 두 대가 오르는 모습을 발견한 그는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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