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비를 맞으며.
"있잖아. 미나는 나중에 어떻게 살고 싶어?"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던 건. 그 말에 자신은 어떻게 말했더라. 그 의문은 오래지 않아 해결되었다.
"굶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도 무미건조하고 딱딱했던 말이었다. 당시에는 하루를 간신히 연명해 나가기 바빠 그런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에이, 그런 거 말고 좀 더 하고 싶은 일이라던가 그런 거 말이야."
"...하고 싶은 일?"
그런 거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일이란 그저 필요에 의해 절박하게 매달리고 쟁취하여 살기 위한 행위였으니까.
"나는 말이야. 연금술사가 되고 싶어."
그때의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가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꿈, 이군요."
연구에 빠져 살다 보니 꿈조차 꾸는 일이 없었는데 그 남자와 만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를 똑 닮은 소녀를 만났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꿈을 꾸었다. 너무나 그립고 또 그리운 꿈이라 꾸는 것이 두려워 언제나 피해왔던 것이었는데. 그녀는 책상에 엎드려 잠든 탓에 뻐근한 허리를 펴며 책상 위를 보았다. 피곤한 도중에도 연구 중이었던 물건들을 치울 정신은 있었는지 대충이나마 정리해 둔 물건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가끔 연금술 혹은 연금술사에 대해서 마법사나 마녀처럼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이들이라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직접 연금술을 이용하는 그녀가 보기엔 실소가 나오는 생각이었다. 연금술사에게 특별한 힘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지식과 필요한 재료들을 그러모아 그것을 가능한 선에서 활용하여 더 편리한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이들이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보기에 마법처럼 보였을 뿐이다.
때때로 그녀처럼 약을 만드는 것을 부업으로 삼는 이들도 있었다. 정작 그녀가 연금술사가 된 이유도 약을 개발하고 연구하게 된 이유도 전부 사라져버리고 말았는데. 그래도 약을 찾는 이들은 많아서 덕분에 생활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부작용이 있다면 연금술사보다는 의사로 통하는 일이 많아서 그렇지.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남자에게 그렇게 여겨지는 것은 불쾌했다. 그러다 다시 그 소녀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애절하게 바라보던 투명하고 말간 금빛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한쪽에서 끓여 증발시킨 액체가 관을 통해 다른 플라스크 안으로 모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란투아에서 자생하는 라티아라는 식물을 이용해 만드는 이 시약은 독특한 성질이 있어서 병을 판별할 때 용이했다. 정제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단점이지만 효과는 확실했으니까. 필요한 시약이 충분할 만큼 모이려면 아직 멀었다.
"그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신경 쓰이다니 한심합니다."
지금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밖에 없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는데. 마음만은 한시라도 빨리 소녀의 얼굴에서 슬픈 표정을 지워주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소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으니까. 방안은 그녀가 만드는 시약의 냄새로 어지러울 정도로 가득했다. 그녀는 결국 초조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바람을 쐬기로 했다.
"의사 양반 아니여?"
우산을 들고 비가 오는 거리를 생각 없이 걷다 보면 그녀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오는 이도 있었다. 주로 빵을 파는 그 사람은 아이가 아플 때 그녀가 치료해 준 적이 있어서 지금도 가끔 그녀가 빵을 사갈 때 덤을 얹어주고는 했다.
"음식이 모자라지는 않어?"
"예, 이미 모아둔 것이 있으니 나중에 필요하면 사러 오겠습니다."
그렇게 대충 답해주고 길을 걸어가니 언뜻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비가 이렇게나 쏟아지는데도 아이들의 활기를 재울 수는 없었다. 무심코 그 모습을 쫓게 되는 건 아직도 이 거리에 가득한 추억 때문이리라. 장점이라고는 낡았을 뿐인 거리지만 그렇기에 더 좋은 곳에서 살 수 있음에도 그녀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아무리 그녀를 슬프게 하는 추억이라 해도 결국 그리운 것이었기에.
그렇게 추억을 되새기며 걷다 보면 도달하는 곳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고리타분할 정도로 낡아가는 거리에서도 특히나 고리타분한 건 어둑한 뒷골목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들어가려 하지도 않는 쓸쓸한 곳이었지만 어린아이들에겐 그곳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 따로 없었다. 좁은 골목만큼이나 하늘도 좁아서 비가 잘 들이치지도 않는 이곳은 어린 시절 그녀의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녀의 추억을 이해해 주는 이가 있었다.
골목의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옆에 작은 문이 나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헬레나."
드발린의 마법서점이라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늙은 초록 난쟁이가 그녀를 반겼다. 찾아오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도 변함없이.
"예, 오랜만입니다."
그것이 서로를 정말로 반기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저 동질감에 반가워하는 것인지 그들은 몰랐다. 단지 서로를 이해하고 있어서 알고 있어서 의무적으로 아는 척하고 있는 것일지도. 어쨌든 그녀에게 있어선 그 또한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녀가 도피처를 찾을 때 이곳이 도피처가 되는 것을 허락해 준 사람이었으니. 그녀는 그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도 익숙하다는 듯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마법책 따위를 읽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마법이란 사용되는 것을 허락받은 선택 받은 이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책을 펼쳤다. 조금이라도 마법을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달달 외워놓고도 늘 새로운 책을 찾아 비교해 보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마법이란 어렸을 때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는 것이 많아진 후에는 도저히 세상에 존재하는 것조차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마법이란 대체 어떻게 실존할 수 있는가? 그것은 모든 연금술사들이 공통적으로 품는 의문이자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연금술사들의 꿈이었다. 연금술은 참 이상한 학문이다. 분명 마법사가 되살린 학문이 연금술인데. 반대로 연금술로는 마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연금술이 철저한 규칙과 과정을 통해 결과를 얻는다면 마법은 그런 것이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면 그 자격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마녀의 마법은 피에서 피로 이어질 수 있는가? 마법이란 대체 어떻게 전혀 상관없는 것을 대가로 행사할 수 있는가? 마법이란 힘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과정을 전부 생략하고 압도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정말 마법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힘이었다. 정말 마법사가 다시 연금술을 되살린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녀 또한 마법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의문을 풀고자 하는 수많은 연금술사 중에 한 명이었다. 조금이라도 마법을 이해하면 추억 속의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러다 그녀는 책장 사이에서 빈자리를 발견했다.
"누군가 이곳에 온 적이 있습니까?"
"그래, 귀여운 꼬마 손님들이었지. 가끔씩 찾아오는데 최근엔 소문이 흉흉해서 그런지 영 찾아오질 않는구나."
"그렇군요."
그녀는 그 흔적들을 바라보다 일어섰다.
"벌써 가는 게냐?"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곧 시약이 완성될 테니 그녀가 기억하는 장소를 조금만 더 살펴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가 그녀를 붙잡는 일은 없었다. 서점에서 나와 골목의 안쪽으로 더 들어가다 보면 어렸을 적 그녀들이 만들어 놓았던 길들이 있었다. 그곳을 따라가다 보면 보이는 작은 공터에는 생기를 잃고 죽어버린 나무, 끊어진 그네가 그 아래에 놓인 분홍색 꽃다발과 함께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를 뒤쫓아온 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무슨 염치로 이곳에 오는 겁니까?
그녀가 뒤돌아본 곳에는 더벅머리의 풍채 좋은 사내가 비에 젖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 꺾어온 듯한 보라색 꽃다발을 들고 서있었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일까? 그토록 찾아오지 말라 경고했음에도 꾸역꾸역 이곳에 찾아오는 그를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 때문에 사샤가 그런 일을 겪었는데. 정말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시는군요."
원래 이 공터는 그녀들만의 비밀 장소였다. 자신의 모든 걸 바쳐도 아깝지 않았던 친구와의 추억이 깃들어있는 소중한 장소였다. 그런 장소에 매번 흙 발로 기어들어와 이렇게 망쳐 놓는 그가 그녀는 불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호기심에 찾아왔겠거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저 남자만큼은 이 장소에 오는 것을 용납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찾아오지 마십시오. 적어도 당신에게 양심이란 게 있다면."
그녀는 그를 지나쳤지만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이런 경고가 소용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금 환멸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돌아갔다. 그녀가 자신의 집에 도착했을 때 시약은 충분한 양이 모인 상태였다. 이내 지체 없이 시약을 혈액에 떨어트려 반응을 확인했을 때. 그녀는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이 정도면 괜찮다니까. 정말."
류드밀라는 툴툴거리면서 입과 코를 막는 가죽 마스크의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코로 지독할 만큼 진한 허브 향이 파고들어왔다. 지금 그녀가 쓰고 있는 마스크는 볼 옆으로 작은 주머니가 달려있었는데 그곳에 솜과 허브가 꽉 들어차 있었다.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사용하는 방독면을 좀 더 경량화시킨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그녀의 숙부가 이러지 않으면 허락할 수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으으, 답답해."
어셔가 앓기 시작한 지 이틀째 그녀는 겨우 어셔의 병문안을 허락받은 상태였다. 메디아는 같은 조건을 붙였음에도 허락받지 못해서 혼자서나마 어셔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녀에게 상태를 전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도착한 방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어셔 외에 병에 걸린 사람은 없다지만 혹시 모른다는 이유였다. 단순한 감기라면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병에 대해선 언제나 신중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녀가 똑똑 문을 두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문틈으로 시프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류드밀라를 보고 잠깐 놀란 기색이었지만 곧 웃으며.
"병문안 왔니?"
"네, 혹시 어셔는 좀 괜찮나요?"
안타깝게도 시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문을 열어준 덕분에 류드밀라가 볼 수 있었던 건. 침대 위에 누워 속옷 한 장만 입고 있는 어셔의 모습이었다. 그것뿐이었다면 그녀는 곧바로 얼굴을 붉히며 방을 나갔겠지만 그의 곁에 있는 소녀의 모습에 그럴 수 없었다. 벨카는 어셔의 곁에서 젖은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열을 내려주고 싶어 간절한 얼굴로.
"벨카가 걱정돼서 온 거지?"
"그, 네. 통 보이질 않아서."
어셔는 아직도 아프다고 하고 벨카는 방 밖으로 코빼기도 보일 생각을 하지 않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녀까지 아픈 건 아닐 텐데도 통 나오질 않았으니까. 하다못해 어셔의 소식이라도 전해주면서 얼굴이라도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야 보는 얼굴도 저러니 편한 마음은 아니었다.
"내가 돌볼 때는 밖에서 좀 쉬어도 된다고 해도 떨어질 생각을 안 하네."
"알만 해요."
평소에도 그렇게 지극한데 아프다고 하니 얼마나 불안해할지 안 봐도 뻔했다. 어셔에게 다가가보면 그는 딱 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추운 듯 몸은 벌벌 떨고 있는데 몸은 푹 익은 것처럼 벌겋다. 벨카는 류드밀라가 바로 옆까지 왔는데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차마 방해할 수가 없어서 지켜보고만 있었을 때였다.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한 건. 그것은 작은 점이었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작고 희미한.
그러나 그것이 여러 개가 되면 어떨까? 굳이 집중해서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울긋불긋한 검은 점들이 어셔의 피부를 뒤덮으려는 것처럼 등 쪽에서부터 앞으로 퍼져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류드밀라는 그와 비슷한 걸 본 기억이 있었다.
"이거... 이거, 감기 같은 게 아니야."
"...류다?"
그제야 벨카는 류드밀라를 발견한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그녀가 벨카를 신경 쓸만한 상태가 되질 못했다. 류드밀라는 이 작은 점들을 본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엄마도 이랬단 말이야."
그녀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멈추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방금 그녀가 들어왔던 문이 쿵 하고 거칠게 열렸다.
"모두 환자에게서 물러나주시길."
그곳에는 류드밀라와 같은 형태의 마스크를 쓴 헬레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