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비를 맞으며.
벨카는 작은 손으로 침대의 위에서 버겁게 숨을 내쉬는 어셔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서늘함 때문일까? 그는 정신이 없는 도중에도 절박하게 그녀의 손에 매달렸다. 손을 붙잡히게 된 소녀는 뜨겁고 불편할 텐데도 손을 어셔에게 쥐여주며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조금이나마 그의 열을 식혀주려는 것처럼.
"도나르가 의사를 불러오겠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응."
시프는 그런 벨카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소녀에게선 좀처럼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시질 않았다. 여유 시간 동안 쿠키와 함께 차를 마시던 그녀들이었지만 도나르가 쓰러진 어셔를 업고 들어오면서 다과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벨카가 화들짝 놀라 곧바로 도나르가 업고 있는 어셔를 살피기 바빴으니까. 그들은 급한 대로 어셔를 침대에 눕혀 놓고 도나르와 의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서 시프도 불안해질 무렵.
"데려왔어!"
다행히 도나르가 돌아왔다. 그가 데리고 온 것은 시프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보랏빛 혹은 분홍빛에 가까운 머리카락과 새하얀 옷, 날카로운 눈매까지. 무심코 뜨루스를 떠올렸던 시프는 멋쩍게 시선을 피했다. 가끔 꾸는 악몽에서 그녀를 괴롭히는 그였고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였지만 같은 의사라는 말에 비교해버렸다는 사실이 미안했다. 그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욱.
"환자는..."
그 여인은 말을 하다 그녀를 쳐다보는 소녀와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마치 예상치 못한 것을 본 것처럼 경악에 가까운 표정에 그들이 의아해하는 찰나. 여인은 다급하게나마 스스로의 표정을 수습했다.
"...환자는 침대에 누워계시는 분이신가요?"
"네, 네!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시프가 긍정하자 그녀는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코와 입을 가리도록 천을 둘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천, 세 개를 주머니 속에서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저처럼 써주시길 바랍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평소에도 이걸 쓰고 다니시길."
그녀가 건네는 천을 받은 시프는 얼떨떨해하면서도 그녀를 따라 천을 썼다. 그리고 도나르에게도 내밀었지만.
"나는 방독면이 있으니까. 시프가 예비용으로 써."
도나르의 말을 들은 그녀는 나머지를 벨카와 캐트시 소년에게 천을 나누어 주려고 하다 이러면 원래 숫자가 모자라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자를 돌보는 것은 좋으나 여기 이것을 써주시길 부탁합니다."
그녀가 벨카에게 정중하게 천을 내미는 모습을 보니 이 세 개의 천에 소녀의 것은 따로 주려던 모양이었다. 벨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금빛으로 그녀가 내미는 천을 바라보다 손을 뻗어 잡고 그녀와 같이 둘렀다. 시프는 남은 천을 아직 잠들어 있는 캐트시 소년에게 둘러주려다. 어느새 깨어난 그 소년이 그녀들이 먹고 있었던 쿠키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저게 먹고 싶은 것이리라.
그녀가 다가가자 고양이의 눈처럼 세로로 쭉 찢어진 소년의 주홍빛 눈동자가 쳐다본다. 그리고 경계하는 듯 살짝 곤두서는 털의 모습에 시프는 쓰게 웃었다.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야.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먹어도 좋아. 하지만 다 먹고 나면 이걸 써주겠니?"
그녀가 더는 가까이 가지 않고 묻자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쿠키를 먹는 소리가 부스럭거리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그보다는 여인에게 시선을 보냈다.
"실례지만 자리를."
"아니야. 어셔를 치료하려는 거잖아."
그녀의 말에 벨카는 그녀에게 앉아있던 의자를 내주었다. 그러면서도 침대의 아래쪽으로 가 어셔를 지켜보는 소녀를 잠깐 쳐다보던 그녀는 들고 온 가방 속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꺼내어 어셔를 살피기 시작했다. 소년이 쿠키를 씹어 먹는 소리가 방안을 채우는 가운데 그들은 어셔와 여인의 모습에 집중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청진기로 어셔를 살피는 듯하다 손으로 그의 이마를 만지며 열을 재었다.
"증상만 보면 단순히 열감기... 같습니다만 석연치 않군요."
"무언가 문제라도."
도나르가 긴장한 기색으로 묻자 그녀는 고민하는 듯 어셔를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환자분의 피를 조금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정밀한 검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물음에 도나르와 시프가 벨카를 보자 그녀의 시선도 소녀를 향했다. 벨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철로 된 원통에 뾰족한 바늘이 달린 철제 도구였다. 그 모습에 도나르가 감탄했다.
"주사기라니. 아이올로스 님이 괜히 소개해 주신 게 아니었나."
"주사기라면 그거죠? 피를 뽑거나 약을 주사할 때 쓰는."
"그렇지."
주사기는 의사라고 해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단 하나의 주사기라 해도 저 끝에 달린 바늘을 만들기 위해선 숙련된 대장장이가 보통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철공 기술이 발달한 곳에서도 보기 드문 물건이었는데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잠시 촛불에 바늘을 달구고 식히더니 알싸한 냄새가 나는 액체에 솜을 적셔 분리한 주사기의 안과 밖을 닦아내고 다시 조립했다. 그리고 어셔의 팔을 줄로 묶더니 그들을 보았다.
"이분의 몸을 붙잡아주시겠습니까?"
"아, 네!"
그녀의 부탁대로 도나르가 어셔의 몸을 붙잡자 줄을 묶은 팔 아래로 주사기의 바늘을 찔러 넣는 그녀. 어셔가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구기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이미 도나르가 붙잡아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내 필요한 만큼 피를 채취한 그녀는 적신 솜으로 주사기를 찔렀던 자리를 막으며.
"이곳을 이렇게 눌러 몇 분 정도 막고 계시면 피를 흘리진 않을 겁니다. 쓰고 난 솜은 태워버리시길."
그리고 그녀는 어셔의 피를 뽑은 주사기를 챙기며 일어섰다.
"자세한 병이 무엇인지는 병이 경과하거나 검사 후에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까?"
"예. 어찌 되든 높은 열은 환자의 몸에 좋지 않으니 환자의 곁을 지키며 젖은 수건으로 닦아 열을 낮추는 데만 집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그러면서 그녀는 종이에 무언가 적고 도나르에게 내밀었다.
"이건?"
"열을 내리는 효과가 있는 약초들입니다. 함께 먹어도 상관없고 부작용이 적은 것들이니 종이에 적혀 있는 대로 끓여서 먹여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주사기가 든 가방과 물건들을 챙겨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개가 늦어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헬레나. 며칠 내로 검사 결과가 나올 테니 그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예, 예."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방을 나섰다. 결국 지금 당장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도나르는 헬레나가 준 종이를 들고 일어섰다.
"다녀오세요."
시프는 그를 배웅하고 난 뒤에야 침대에 앉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어셔의 곁을 지키는 벨카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큰 병이 아니어야 할 텐데."
한편 방에서 나온 헬레나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저분은..."
"헬레나 님? 돌아오신 건가?"
가끔 스쳐 지나가던 하녀들 중에서 몇몇이 그녀를 알아보고 수군거렸지만 그녀의 시선이 향하자마자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어느 한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들려오는 허락의 소리에 그녀는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헬레나."
그곳에서 그녀를 반긴 것은 이곳의 영주인 아이올로스였다. 그의 인사를 받은 헬레나는 오히려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였다.
"저희가 반갑게 인사를 나눌만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녀의 차가운 말에도 그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는 듯 눈을 감으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땠나?"
"환자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혹은."
"그 전부다. 네가 알아보지 못할 건 없지 않나?"
"...."
헬레나는 입을 다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손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예, 정말 그분과 쏙 빼닮으셨더군요.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저를 의사 대신 부르신 것이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 헬레나는 단지 급한 일이라기에 이곳으로 불려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그분과 닮은 소녀 때문에 그녀를 부른 것이었다면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부정하듯 아이올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닮은 것뿐이라고 생각하나?"
"무언가 더 있다는 겁니까?"
"세상에 틀에 찍어낸 것처럼 닮은 사람이 정말 우연찮게 나타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그래서 확인해 본 거다."
"그건!"
그가 꺼내든 물건의 모습에 그녀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소녀가 마녀인지 아닌지 확인했을 때 그가 사용했던 펜던트였다. 지금은 아무 색도 없이 투명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적합자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마법사와는 달리 마녀의 마법은 피에서 피로 이어진다. 그 말은 즉."
"...그분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거군요."
"그래."
오히려 관계가 깊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아이는 그분이 아닙니다."
"그렇지."
그의 순순한 긍정에 그녀의 표정에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워낙 찰나였기에 아무도 그 변화를 눈치챌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환자의 상태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습니다. 증세만 보면 단순한 열감기에 가까워 보이지만 조금 더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감염의 위험이 있다면 나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길 부탁하지."
"착각하시는 것 같아 다시금 말하지만 저는 의사가 아닙니다."
그녀는 볼일이 끝났다고 여긴듯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고 있나?"
"...새삼스러운 말입니다."
그녀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나섰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그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문을 연 곳에.
"아으! 아파라."
"메, 메아, 나 밑에."
"앗, 류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엿듣다 문이 열리면서 부딪힌 듯 넘어져 있었으니까. 그녀들은 오늘 어셔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병문안을 가고 싶었지만 병이 옮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병문안을 가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어셔, 그 녀석 괜찮을까?"
"괜찮을 거예요. 그래 봬도 견습 기사잖아요?"
"그랬었지."
그녀들은 애써 안심하려는 듯 어셔가 견습 기사라는 걸 떠올렸지만 그와 함께 떠오르는 장면들이 문제였다. 로기에게 맞고 또 맞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리며 지쳐 땅을 구르던 모습이.
"...괜찮은 거 맞지?"
"아, 아마도요."
그녀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게다가 벨카도 문제였다. 안 그래도 허약해 보이는데 어셔가 병에 걸린 이상 죽어도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을 텐데 옮으면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렇게 그들이 걱정되어 안절부절하던 그녀들은 어셔를 진찰하러 온 의사가 아이올로스의 집무실에 들린다는 소식에 혹시라도 그들의 상태를 알 수 있을까 싶어 엿들으려 했던 것이었다. 벽과 문이 워낙 두꺼워서 제대로 들을 수도 없었지만.
"제 손을 잡으시죠."
그녀들을 지켜보던 헬레나는 망설이면서도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고, 고맙습니다."
그러다 문득 마주친 자수정과도 같은 빛에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다가도 이어서 비치는 은빛에 입술을 깨물었다.
"저기 혹시."
"죄송합니다. 저는 급한 용무가 있기에."
메디아는 그녀에게 어셔의 상태가 어떤지 묻고자 했지만 헬레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려 하지 않고 돌아섰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게 단순한 화풀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헬레나는 이를 꽉 깨물며 오늘 두 눈에 담은 그리움들을 겨우 눌러 삼켰다. 그렇게 도망치듯 빠르게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아이들은 차마 붙잡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저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메디아가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이자 류드밀라 또한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우로보로스?"
"우로보로스라구요?"
류드밀라의 말에 메디아가 놀라서 그녀를 보았다.
"잠깐 봤지만 확실해. 책에서 봤는걸. 우로보로스의 문양이야."
우로보로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와 지금도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런 문양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 문양의 의미는.
"연금술사라는 거잖아요?"
연금술, 언제부터 시작된 학문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오래전에 소실된 것을 어느 마법사가 되살려 지금도 이어져 내려오는 그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이 연금술사들이었다. 마법사처럼 눈에 띄게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이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을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 중 하나가 왜 의사 행세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녀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