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0화 〉비를 맞으며. (130/220)



〈 130화 〉비를 맞으며.


시프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을 떴다.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힘겹게 일으키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옆자리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나르?"

그가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기 때문일까?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으니 맑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셔를 훈련시키러 갔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붉은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벨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릿한 날씨에 어둑한 방안에서도 소녀의 금빛은 흐려지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면 나를 깨웠어도..."
"오늘은 쉬는 날이니까 푹 자는 편이 좋다고 했는걸."


벨카의 말에 시프는 그제야 그들이 휴가를 받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 도나르와 함께 새벽에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어셔를 훈련을 시켜줄 필요가 있어서 일찍 일어났겠지만 그녀가 피곤할까 봐 깨우지 않은 것이리라.

"도나르도 참."


일어날 때 함께 눈을 뜨고 마주치는 그 느낌이 좋은 것인데 그녀의 남편은 여전히 이런 면에서 눈치라는 게 느렸다. 그러다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이는 소녀의 금빛과 마주쳤다. 워낙 표현이 적은 아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들었지만 오래 지내다 보니 그녀의 의문을 눈치챌 수 있었다.


"뭔가 궁금한 거라도 있니?"
"도나르는 시프를 배려했는데 기분 나빠?"

그러기가 무섭게 벨카의 질문이 돌아왔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쉽긴 하네. 자고 일어나면 그 사람이 항상 내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어서 그럴까?"
"욕심?"
"벨카는 어떠니? 자고 일어나면 항상 어셔가 옆에 있는 게."


벨카는 살짝 생각하는 듯하다 희미하게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좋아."
"그런 거야."
"그런 거구나."

시프는 그녀의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 침대에서 내려왔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그녀의 담당이 담당이니만큼 진작에 일어나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빴을 텐데. 갑자기 찾아온 여유가 생소했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외출 신청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여전히 실종 사건의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말이 있기에 포기했다. 그러다 다시 마주친 소녀의 금빛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간단하게 차라도 마시지 않겠니?"


남자들은 아직 할 일이 있고 그녀들끼리만 남았으니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도나르가 데려온 캐트시 소년도 잠을 자고 있는 듯하니까. 벨카는 그녀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주방으로 향하면 만찬장에 쓰일 음식들을 만드느라 바쁜 주방 사람들의 모습이 얼핏 엿보였다. 평소였다면 그녀도 저 사이에 끼여 있었겠지.

"이렇게 보니 정말 바빠 보이네. 조금 미안한걸."


그래도 정당하게 받은 휴가니 그녀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소녀와  일이 먼저이기도 하고.

"자, 준비는 됐니?"
"응,  씻었어."


원래는 시프 혼자 차와 함께 마실 간단한 다과를 만들었겠지만 벨카와 함께 살게 된 뒤로 그녀는 이렇게 여유로울 때면 간단한 요리를 그녀에게 가르쳐주게 되었다. 시프도 원래는 요리를 책으로만 읽어서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상단에서 요리를 돕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진 일이었다. 지금 만들 음식은 간단한 쿠키였다. 원래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간식이지만 그들이 버는 돈이 많다 보니 쌓이는 생활비에서 약간 떼면 이런 사치 정도는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설마 설탕을 이렇게 쉽게 사용할  있게  줄이야."

그가 하는 일을 생각하면 정당한 값이라고 보지만 시프는 휴가를 쓴 상태에서도 여차하면 동원될 수도 있는 도나르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의 의무라는 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것이었구나.


"이렇게?"
"그럼, 하지만 좀 더 힘을 줘서."


그녀는 자신이 가르쳐준 대로 잘 따르는 소녀를 보면서 처음 요리를 가르칠 때를 떠올렸다. 뭐랄까 그리운 감각이었다. 벨카는 그녀가 시범을 보이면 하는 대로 잘 따라와 주었지만 여러모로 어색한 점이 엿보였다. 마치 처음 요리를 할 때 책만 보고 따라 하던 자신이 저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잘못해서 자신의 손을 베려 하던 소녀의 모습에 그녀가 같이 손을 잡아 쥐는 법과 힘을 주는 방법까지 가르쳐야 했었다.


"읏!"
"힘을 너무 줘도 좋지 않아. 적당하게."


너무 힘을 주어 반죽을 절단 내버리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같이 만들기 시작했다. 시프는 종종 너무 어른스러운 모습에 벨카의 나이를 헷갈리곤 하지만 결국 아직 어리다는 걸 이런 식으로 상기했다. 그래도 방법 자체에서 엇나가는 일은 없어서 쿠키는 제대로 완성되었다. 그렇게 완성된 다과와 끓인 물을 들고 그들은 방으로 돌아갔다. 소년이 깨어났나 살피면 고로롱 작게 코를 고는 소리를 보니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벨카는 따로 취미 생활 같은 건 없니?"
"취미 생활?"

그녀들끼리 마주 앉아 작은 티파티를 시작하며 시프가 물어보았다. 설마 취미가 없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예를 들었다.

"책을 읽는다거나?"
"메아와 류다가 자주 읽어서. 같이 읽었어."


그렇지는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책이라 주로 무슨 책을 읽니?"
"...? 책은 책인걸."
"책에도 종류가 있잖니? 소설이라던가 마법책처럼."


벨카는 그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한 듯 어디선가 주섬주섬 책을 들고  그녀에게 보였다. 상당히 두껍고 무거운 책이었는데.

"겨, 경제에 대한 고찰?"
"응, 류다가 자주 읽는 게 보여서. 빌렸어."
"이런  말고는?"

다음으로 소녀가 들고  건 몬스터들에 대하여라는 책이었다. 뭐랄까. 시프가 기대한 것과는 달랐다.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지 삭막하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는 건 아닌데 요즘 여자애들은 이런 걸 좋아하는 걸까? 아니, 이곳에서 일하면서 친해진 하녀들에게 들은 바로는 로맨스 소설 같은 게 인기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

그녀는 문득 이곳에서 친해진 사람 중 샬럿에게 받았던 책을 떠올리고 찾아서 벨카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한 번 읽어 보겠니?"

자기는  보고 내용을 외웠다며 주었던 책인데 딱히 볼 시간이 없어서 읽지 않고 내버려 두었었다. 책을 주었던 샬럿이 간단하게 알려준 바로는 하층민의 여인과 기사 님의 로맨스를 다룬 소설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따지면 자신은 따로 읽을 필요가 없는  아닌가 싶었지만 혹시나 싶어 소녀에게 권유해 보았다.


"지금?"
"읽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가르쳐주렴."

벨카는 시프가 왜 그러는지 궁금한 것 같았지만 이내 그녀가 건네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고 침묵이 방안을 채웠다. 시프는 차의 향기를 맡으며 턱을 괴고 책을 읽는 소녀를 지켜보았다. 며칠 전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리는 가운데 벨카가 가만히 책을 읽고 있는 방은 어디와도 격리된 다른 세상 같았다. 소녀 하나의 존재만으로 이렇게 방안의 분위기가 바뀌어도 되는 걸까.


책 속에 빠져든 것처럼 약간은 침체되어 깊어진 금빛은 조용히 움직이며 책을 읽어나갔다. 때때로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일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 눈동자가 어느 곳을 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것만으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탁 하고 소녀가 책을 덮은 뒤에야 시프는 정신을 차렸다.


"다 읽었니?"


그녀가 묻자 고개를 끄덕이는 벨카.

"미안해. 나는 이런 건  모르겠어."
"그래도 뭔가 느낀 점은 없니?"

그녀의 말에 소녀는 말없이 책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사랑은 상대가 아닌 자신만을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거구나."
"으응...?"


시프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소설이라는  나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어째서니?"
"감정이라는  너무 강렬해. 나의 것조차 이해하기 힘든데 누군가의 감정을 담은 책은 버거운걸."

그러면서 벨카는 그녀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시프는 어쩐지 소녀가 슬퍼하는 것 같아서 더 이상 소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책을 내려놓고 다과에 집중했다.

"정말 비가 오는 날에도 훈련을 해야 하는 거예요?"
"몬스터가 비가 오는 날에 안 쳐들어 오는 건 아니니 익숙해져야지."

그녀들이 작은 다과회를 열고 있을 무렵. 어셔는 비를 맞아가면서도 훈련을 강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전에는 그나마 비가 오는 날에는 쉬었던 것 같은데 어째 실전을 치른 뒤로는 비가 오는 날에도 훈련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  훈련복이라도 벗고 훈련하면 안 돼요? 엄청나게 무거운데요."


때문에 지금 그가 입고 있는 훈련복은 빗물을 잔뜩 머금어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면 비가 오는 날에 훈련을 하는 의미가 없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나처럼 플레이트 아머를 입게  텐데."
"끄으응. 그럼  냄새라도 해결해 봐요."

그게 하루 이틀이면 몰라도 며칠간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하루라도 마를 일이 없는 훈련복을 입고 있으니 무게는 둘째치고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찝찝했다.


"고작  정도 냄새로 그러냐. 몇 주 동안 갑옷을 못 벗는 상황이 오면 죽겠다 아주."

그는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에게  훈련복을 벗게 할 생각이 없다는 거 말이다.

"오늘따라 몸이 너무 무거운데."

도나르의 지시에 따라 비가 오는 연무장을 달렸다. 오랫동안 연무장으로 사용하면서 잔디가 자라지 않아 생겨난 길을 따라 달리면서도 어셔는 자신의 몸이 갈수록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최근에 비가 계속 내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무력해질 수는 없었다. 어셔는 자신을 앞서 달려가는 로기의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는 벨카를 위해서 더욱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이를 악물고 달려도 거리는 점점  벌어져만 가고 어셔는 로기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어셔의 모습에 먼저 이상을 느낀 건 도나르였다.

"저 녀석 오늘 너무 힘을 못 쓰는데. 몸이 안 좋은 건가?"


비가 오는 환경에 익숙하지 않다고 해도 너무 느린 속도였다. 본인은 티를 내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셔가 지금 훈련을 버거워하고 있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이보다 많은 훈련을 하는데도 말이다. 도나르는 그를 멈춰세웠다.

"으윽,  그래요?"
"몸이  좋으면 진작에 말하지 그랬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자."
"하지만."


어셔는 그의 말에도 마음 놓고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강해져야 했으니까. 고작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훈련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이고 뭐고 넌 지금 훈련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야."
"...한 바퀴만 더 돌게 해주세요."
"이거 참."


도나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급한 건 알겠지만 아플 땐 쉬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럴  옳다꾸나 하고 쉬어야 하는데 죽어도 훈련을 할 기세니. 아무래도 로기와 함께 훈련을 시켜서 경각심과 경쟁심을 부추긴다는 게 효과가 지나쳤던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로기는 어셔와 같은 환경에서도 잘만 뛰어다니고 있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너무 자극하지 말고 좀  천천히 가르쳐 줄 것을 그랬다며 후회했다.

"고집부리지 말고 쉬어라. 병은 근성 같은 걸로 이기는 게 아니야. 그랬다간 오히려 몸만 상한다. 그렇게 상한 몸은 되돌리기도 힘들어."
"...."
"몸이 상하면 후유증도 심각해. 지금까지 노력해온 게 완전히 의미가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냥 쉬러 가자."
"알았어요."


설득에 겨우 납득하는 어셔를 보고 도나르는 로기를 봐주기 위해 나온 샬비에게 말했다.

"애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난  데리고 먼저 들어가 봐야겠다."
"딱 봐도 이상하긴 했지.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봐."

찰박찰박. 철펑철펑. 비를 맞아 흘러내린 물과 물에 젖은 신발이 빗물이 스며든 발자국을 축축한 복도에 남기며 방으로 돌아가는 길. 어셔는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약한 걸까? 이게 비 때문에 걸린 감기라면 더욱 억울했다. 그와 로기는 분명 같은 환경과 조건에서 훈련을 했는데도 같이 비를 맞은 로기는 멀쩡한데 그만 이렇게 아파하며 골골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열받아서 열심히 뛰었던 것인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그를 놀리는 것만 같다. 이게 미칠 것 같다는 느낌일까? 비틀비틀 흔들린 끝에 점점 더 다가오는 바닥을 보고 어셔는 자신이 뒤늦게 쓰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움직이지가 않았다. 온몸이 뜨겁고 아픈데도 느껴지는 건 스스로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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