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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9화 〉가을의 잔향. (129/220)



〈 129화 〉가을의 잔향.

류드밀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필립을 불렀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아이올로스에게 무릎을 꿇은 그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모습과 분위기로 자신의 아버지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직감했다. 류드밀라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아버지를 붙잡고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캐묻고 싶었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이올로스 님, 아버지가. 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한 건가요?"

애써 참아보려 한 것 같았지만 앳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물기와 떨림은 쉽게 감출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었다.

"직접 확인해 보거라."

아이올로스는 그의 죄를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그것을 하나하나 기록한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가끔 아버지의 일을 따라 배웠다면 그 목록을 읽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 그로부터 서류를 받아든 류드밀라의 하나밖에 없는 손은 힘겨운 듯 조금씩 떨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서류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그저 글자 하나하나를 자신에게 새길 듯이 바라보았다. 이윽고 마지막 서류를 넘겼을 때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이게 뭐야. 뭐냐고! 뭐라고 말 좀 해보란 말이야!"


류드밀라는 이를  물고 소리쳤다. 이내 씩씩거리며 거칠어진 숨을 삼키며.

"돈이 그렇게 중요했어?"
"그래."
"멀쩡한 사람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도 알고 있었으면서?"

사실 그가 직접 저지른 것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죄가 아니게 되는  아니었다. 아이올로스를 도운 공으로 꽤 높은 입지를 잡을 수 있었던 그는 이 지역의 상권을 꽉 잡고 있다시피 했으니까. 그런 그가 저런 일들에 관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더욱 믿기지 않았다. 막으려 했다면 진작에 막을  있었을 일이다. 조금만 강경하게 행동했다면 이 근방에서나마 저런 일을 근절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조금만 눈을 감으면 더 많은 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상인들이 불법적으로 물건을 들여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들이고 묵인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이들이 너 나   없이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불법적인 일을 벌이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출처를  수 없는 물건들이 영지를 떠돌고 몬스터들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 모든 게 그저 눈을 감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류드밀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단다."
"그렇게 만든 건 아빠잖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글썽이는 눈으로 노려보면서도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던 그녀는 이내 들고 있던 서류를 아이올로스에게 돌려주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우윽, 그만 돌아가 봐도 될까요?"
"그러거라."

그는 어떻게든 눈물을 삼키려 애쓰는 류드밀라의 말을 들어주었다.


"나는 절대, 절대로 아빠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그녀가 밖으로 나가며 다짐하듯 중얼거리는 말에.


"다행이구나."

그렇게 답하는 필립의 말은 끝내 닿지 못했다. 류드밀라가 밖으로 나간 뒤 아이올로스가 입을 열었다.

"딸이 무사하다는 건 확인했겠지? 이제 약속을 지켜라. 왜 그랬나? 필립."
"그렇군요. 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필립은 우는  비웃는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제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아이올로스 님?"
"자네의 아내라. 불치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었나."

마땅한 치료제를 찾을 수도 없어서 그저 시름시름 앓던 그녀는 온갖 약재로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다 어린 딸을 두고 죽은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불치병이 아니었습니다."
"뭐?"
"치료제가 있었습니다. 듣기로는 먼 나라의 풍토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치료제가 란투아에 있다는 소식에 그는 희망을 가졌었다.

"하필이면  치료제를 다른 상단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말이지요."

그것까지는 상관이 없었다. 얼마를 요구하던 어떤 불공정한 계약을 요구하던 그는 자신의 아내를 살릴 수 있다면 상관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치료제를 가지고 있었던 상단  자체였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고 있었는지. 그때만 해도 그는 이 지역을 상권을 틀어쥐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올로스에게 도움을 주었다 해도 상단으로서 성장하는 것은 별개였으니.


 상단은 당시 그가 상권을 틀어쥐기 전까지 가장 큰 규모의 상단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서 치료제를 받기 위해 많은 것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 자잘한 계약부터 큰 거래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치료제를 주는 시기를 뒤로 미루었다. 아내의 병세는 점점 악화 되어가고 있었고 그가 점점 더 초조해질 무렵. 그들이 자신에게 원한 아닌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의 상단이 점점  몸집을 부풀리자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드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찮게 그의 아내가 다른 나라의 풍토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누구보다 빠르게 그 치료제를 입수했다. 그리고는 아내의 병세가 악화될 때까지 일부러 치료제를 주는 때를 미루었던 것이다. 그들은 애초에 그에게 치료제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대로 그의 아내가 죽으면 그의 상단도 기세가 줄다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사실을 알게  그는 암살자들을 고용했다. 그들이 치료제를 줄 생각이 없다면 빼앗아와야 마땅했다. 그렇게 많은 대가를 치르고 간신히 얻은 치료제였다. 아내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아내를 살리지 못했다. 치료제를 주사하기도 전에 그의 아내는 병을 이기지 못했으니까. 그에게 남은 건 싸늘하게 식은 아내의 곁에서 울다 지쳐버린 제 딸과 이제는 어떤 가치도 없는 치료제, 그리고 진탕에 빠져버린 자신뿐이었다.


치료제는 그의 손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히스, 자네는 알고 있었나?"


이야기가 끝나고 아이올로스는 집무실로 들어오는 히스에게 물었다. 필립은 이미 그의 명령에 따라 감옥에 끌려간 상태였다. 딱한 사정이 있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저지른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니요. 형님은 항상 혼자서 해결하려 했지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지는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피는 속일 수가 없는 것 같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류를 보았다. 필립이 불법적인 물품들이 유통되는 것을 묵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직접 일을 벌이지 않은 건 남아있는 양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아이의 후견인은 자네가 맡는 건가?"
"예,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지. 그렇게 하게나."

법을 어긴 대가로 재산의 절반 정도는 회수해갈 테지만 남은 절반의 관리는 그 아이가 자라기 전까지 히스가  할 것이다.


"류다. 조금이라도 쉬어요. 이러다간 쓰러지겠어요."
"괜찮다니까."

그로부터 벌써 사흘이 지났다. 류드밀라는 처음엔 우울함을 감추지 못하다 펜을 붙잡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집이 아니라면 하고 싶지도 않다더니. 어셔는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어려운 말이 가득한 서류였다.


"괜찮은  같지가 않아서 그렇지."


그는 펜과 종이를 놓지 못하는 류드밀라를 보고 벅벅 머리를 긁었다. 어셔도 메디아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지금껏 해왔던 일들이 드러나서 난리도 아니었다던가. 그나마 직접적으로 관여한 일이 적어서 선처가 될 수도 있지만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장  문제는 바로 류드밀라 본인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쭉 저 상태였다.

식사도 챙겨주지 않으면 거르고 화장실을 갈 때가 아니면 일어나지도 않고 책상 앞에만 앉아있었으니까. 눈 밑이 거뭇거뭇  모습을 보면 잠을 제대로 자는지도 의문이었다. 때문에 안 그래도 왜소한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렇게 저마다 걱정을 키워가고 있을 때였다. 지금까지 류드밀라를 지켜보고 있던 소녀가 몸을 일으켜 다가간 것은 그리고는 여전히 펜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읏! 잠깐! 이게  하는!"
"이제는 쉬어야 해."
"그래도 나는...!"

류드밀라가 자신을 붙잡은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보다 벨카가 그녀를 끌어안는 것이 먼저였다.

"네 탓이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강한척하지 않아도 돼. 억지로 괜찮다고 무리하지 않아도 돼. 울고 싶으면 울어도 좋아. 우는 건 부끄러운 일도 무서운 일도 아니니까."

여기서 운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걸. 그녀는 멍하니 소녀에게 안겨있다 벨카의 뒤에 서있던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어셔와 메디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디어 류드밀라가 눈물을 흘렸다. 문득 바라본 창밖에는 투둑투둑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밖으로 새어나가는 일 없이 조용히 방 안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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