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가을의 잔향.
그들은 실크 모스의 번식장을 처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저들은 말씀하신 대로 감옥에 가두고 생존자들은 규칙대로 확인 후 영지민으로 받아들여질 겁니다."
감옥은 성벽에 붙어있는 입구의 건물을 활용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성벽의 입구에서 범죄자들과 생존자들을 나누어 인계하는 중이었다. 일단 구하기는 했지만 몬스터의 숙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리라. 뱃속에 아직 몬스터의 알이 남아있지 않은 지 꽤 오랫동안 확인받아야 할 테고. 그들이 영지 안에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나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 한계였다.
1년 전 초록 난쟁이 때에는 동료들에게 그 일을 떠맡기게 된 셈이었다. 그들이 흔쾌히 받아주었기에 망정이지. 지금도 가끔 확인해보러 가면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그보다 저자와 캐트시는 데려가시는 겁니까?"
"그래, 영주 님께서 직접 확인하셔야 할 일이다."
그렇게 그들은 인계를 마치고 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피곤하네요."
"한 일이 없는 건 아니지. 몬스터를 죽여봤잖냐?"
그리고 도착한 성에서 어셔와 도나르는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오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작 한 마리잖아요."
도나르는 불만 가득한 어셔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한 마리가 아니야. 그 한 마리 때문에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실전을 치르자고 한 게 역으로 부추기는 꼴이 된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으니. 어셔의 시선이 자신들의 뒤로 향했다.
"그래서 얘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어셔가 말하는 건 그들의 뒤를 얌전히 따라오고 있는 캐트시 소년에 대한 것이었다. 도나르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처음에 그렇게 날뛰던 녀석이 맞나 싶었지만. 녀석을 이번에 붙잡은 의심스러운 자와 함께 마차에서 꺼내려 했을 때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들어갈 때는 아무런 저항이 없더니 나오라고 하자 마차 안을 이리저리 날뛰며 거부한 것이다. 결국 제압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발버둥 치기 바쁜 녀석을 어떻게 아이올로스에게 데려가야 할지 막막했는데.
"아저씨, 아직 멀었어요?"
어셔가 캐트시를 보고 싶은 마음에 마차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주친 것이다. 그러자 캐트시 소년이 얌전해져서 그를 빤히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닌가? 동물처럼 코를 씰룩거리면서. 왜인지는 몰라도 어셔와 같이 있으면 진정하는 것 같아. 그들은 함께 아이올로스를 보러 다녀오는 길이었다. 캐트시와 함께 데려왔던 자는 직접 심문하겠다는 아이올로스에게 넘겨준 후였다.
"아이올로스 님께서 말씀하셨잖냐. 당분간 우리가 돌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켁, 진짜로 우리랑 살아야 하는 거예요?"
어셔는 캐트시라는 처음 보는 수인이 신기하고 친해지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같이 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녀석 얌전하기만 할 뿐이지 말을 걸어봐도 이렇다 할 말이나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라곤 전혀 하려고 하지 않으니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어쩔 수 없지 캐트시가 이곳에 있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니까."
도나르가 잠시나마 기억하는 캐트시는 파르즈에서만 살아가는 종족이었다. 파르즈에 캐트시 말고도 다양한 수인족들과 인간이 살아가고 있음에도 파르즈하면 캐트시가 떠오르는 이유도 파르즈를 지배하는 것이 캐트시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캐트시들은 그곳을 빠져나오는 일이 없을 텐데. 왜 이곳에 있는지 알아봐야 하기도 하고 내버려 두기에도 찝찝하니 그나마 같이 있으면 얌전한 이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아이올로스는 판단한 것이다.
"아마 내버려 두면 또 어디로 팔려갈지 모르고."
"그건 좀."
안타깝지만 사실이었다. 수인이란 안 그래도 희귀한 종족인데 그들의 영역과 영향권에서 한참은 떨어져 있는 란투아다. 수인들이 단신의 힘만으로는 더 뛰어날지 몰라도 이곳은 난쟁이들과 인간이 다수를 차지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겨우 성년으로 보이는 캐트시가 혼자서 살만한 방법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어셔는 어쩔 수 없이 불만을 삼켰다. 자신도 신세를 지는 신세인데 입을 더 늘리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방으로 들어섰을 때.
"어서 와."
언제나처럼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왔어."
이제는 익숙해진 소녀의 기다림을 어셔가 반기자 도나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거참 너희는 사람 옆구리 시리게 하는데 재주가 있다니까."
그에게도 사랑스러운 님이 있건만 현재 그의 님은 현재 일을 하느라 바쁠 시간이기 때문에 도나르는 아쉬움만 삼킬 뿐이었다. 시프가 하는 일의 특성상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벨카처럼 반겨줄 수가 없으니까.
"그나저나 이대로 둘 수는 없고. 어셔 혹시 남는 옷 있냐?"
현재 소년은 붙잡혀 있었을 때 그대로 넝마나 다름없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덩치가 비슷한 어셔의 옷을 입혀야 할 것 같았지만.
"저 옷 얼마 없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게 시프가 사준다고 할 때 좀 사지 그랬냐?"
결국 도나르가 다른 가신 중에서 또래의 소년을 키우는 이들 중에서 옷을 빌려오려고 했을 때였다.
"응? 왜 그러냐?"
벨카가 그를 붙잡은 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면서 그녀가 꺼내온 건 새로 산 티가 나는 여러 가지 옷이다. 공통점이라면 전부 크기가 비슷비슷한 것이 누구를 위해 사 왔는지 알 만했다. 이 정도면 예전에 입던 옷쯤이야 소년에게 다 주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였다.
"설마 직접 사온 거냐?"
벨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누가 데려갈지 몰라도 좋은 신붓감 아니냐?"
도나르가 어셔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지만 그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밤이 찾아왔다.
"실전은 어땠어?"
"별다른 건 없었어."
도나르 아저씨나 시프 누나는 동료들과 술 약속이 있어 늦는다는 말이 있었다. 평소라면 이 틈에 벨카와 마음껏 야한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불청객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일찍 잠들 준비를 해야 했다. 역시 방에 자신 외에 다른 낯선 이가 있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그를 달래듯 소녀는 그의 이마를 손으로 쓸어주었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줘."
"알았어. 지금은 힘드니까. 다음에 하자."
"읏, 그런 이야기가 아닌걸."
어셔는 눈을 감고 부스스 웃으면서도 찾아오는 기분 좋은 잠기운을 느꼈다. 이윽고 피곤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드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곧 그의 곁에 함께 몸을 뉘었다.
"잘 자."
소녀의 작은 한 마디가 이미 잠든 그에게 닿았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소녀마저 색색 숨소리를 내쉬며 잠들었을 무렵이었다. 어둠 속에서 밝은 주황색 눈동자가 번뜩 드러났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것은 귀를 쫑긋거리며 소리를 확인하는듯하더니 스르르 몸을 일으켜 그들의 곁에 서서 잠들어버린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
터덜터덜 흔들리는 마차의 안에서 고양이는 생각했다. 자신은 또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하고. 기억하는 것조차 두려운 것에게 붙잡혀 낯설고 먼 곳까지 끌려온 이후 고양이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새도 없이 끌려오고 끌려가기만을 반복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도 물건처럼 인간들에게 끌려다녔다.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인간은 호기심 많은 고양이에게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낯설고 두려운 것이 되었다.
그래서 고양이는 다른 인간이 자신을 철창에서 풀어주었음에도 그리 달갑지 않았다. 비좁고 불편해도 차라리 철창 안이 편했다. 낯선 곳으로 가면 낯선 인간이 멋대로 애완동물 취급하고 내키는 대로 분풀이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젠 그런 반복되는 시간이 지루하고 짜증 날 정도였다. 이번 인간은 그를 철창에서 풀어주었지만 고양이는 방심한다거나 기회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틈을 기회라 착각하고 도망쳤다가는 그들에게 다시 붙잡혀 두들겨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기에 고양이는 주변에 인간이 가득한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꾹 참고 마차가 흔들리는 느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멈춰 서는 마차와 열리는 문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 나가고 싶지 않았다. 또 어떤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밖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그가 나오길 기다리지는 않았다. 다시 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면 역시나 저들과는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도착한 또 다른 곳에서 그들은 그를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고양이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나가면 무슨 고통이 기다릴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처음 맡아보는 향기가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분명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는데 그립고 싱그러운 이상한 향기. 그 냄새는 마차 안으로 고개를 내민 작은 인간에게서 풍겨오고 있었다. 고양이는 그 향기에 오랜만에 두려움보다 호기심을 느꼈다. 인간들끼리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고양이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 인간을 얌전히 따라간 건 어쩌면 그 향기의 원인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건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어서 와."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고양이는 그 말을 대신 받고 싶었다. 그가 좋아하는 과실을 닮은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 꿀처럼 반짝이며 애정을 담뿍 담은 금빛의 눈동자가 그를 비추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눈동자가 담고 있는 건 고양이가 아닌 그가 따라온 작은 인간이었다. 그나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작은 인간이 순식간에 거슬리는 것으로 격하되었다. 향기는 좋았지만 그 향이 소녀와 저렇게 딱 붙어있으면서 벤 것이라면 그건 단지 짜증 나는 것이었다.
고양이는 지금까지 그들이 잠에 들기를 기다렸다. 인간들은 알지 못하겠지만 밤은 그의 시간이었으니까. 몸을 웅크려 얌전한 척을 하면서도 귀는 계속 그들의 소리를 엿듣고 있었다. 자신과 달리 인간들은 자는 척을 정말 못하니까. 그들의 숨소리만 잘 들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드디어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가갔다. 작은 인간은 어미의 품에 파고든 새끼처럼 소녀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 모습이 참 꼴 보기 싫었다.
고양이는 그들의 숨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둘을 조심스레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둘이 떨어졌을 때 고양이는 또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건 소녀의 치마 아래로 뻗어 나온 새하얀 다리였다. 소녀의 옷은 구조가 어떤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했다. 아마 이 거슬리는 천을 위로 올리기만 해도 소녀의 맨살이 드러나리라. 고양이는 입맛을 다시며 망설임 없이 그 일을 행했다.
그리고 드러나는 소녀의 맨살을 고양이는 남김없이 훑어보았다. 아쉬운 점은 여전히 거슬리는 천 조각들이 남아있었다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뽀얀 맨살은 혀를 대고 핥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 싱그러운 향부터 그 모습 하나하나가 고양이의 코와 눈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르릉."
고양이는 저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소리를 내고 흠칫 떨며 소리에 집중했다. 그들이 자신 때문에 깨어나지는 않았는지 누군가 오고 있지는 않은지 집중했다. 다행히 숨소리는 그대로였고 누군가 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으로 시선이 향한 곳은 가슴과 은밀한 곳을 가린 천 조각들이었다. 그는 손톱을 세워 조심스레 그것들을 벗겨냈다. 그러자 드러나는 건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꿀단지였다.
고양이의 눈에 소녀는 마치 탐스럽게 농익은 과실처럼 보였다. 그건 지금 당장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달콤한 먹잇감이었다. 이곳에 끌려오기 전에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있었다. 아마 배우지 않았어도 이곳저곳에 끌려다니며 인간들이 교미하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었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지금 그의 앞에 암컷이 무방비하게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암컷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이 아둔해도 그런 짓을 했다간 곧바로 깨어날 테니까. 고양이는 불만스럽지만 지금은 간단한 영역 표시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