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가을의 잔향.
도나르는 동료들이 마을 주변을 포위한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포위망을 좁혔다. 규모가 크지 않은 마을이라 포위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지만 저쪽에 들키더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때까지는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 좋았다. 점점 마을의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순간.
-푸우웅!
마을 쪽의 힐디스비니가 비상사태임을 알렸다. 그러자 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익숙하다는 듯 철수를 준비하는 모습에 그들이 마을의 관리를 위해 파견된 기사단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이미 상대의 힐디스비니에게 들켰으니 천천히 다가가던 것을 멈추고 힐디스비니들을 빠르게 몰았다. 그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포위된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멈춰 서는 모습을 보고 도나르들은 포위 상태를 유지하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점점 가까워지니 형체만 보이던 그들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를 모르는 놈이 꽤나 섞여있었는지 물건을 매단 힐디스비니들이 느닷없이 땅을 박차고 이쪽을 향해 돌격해왔다. 저곳에 있는 이들에 비해 몇 안 되는 숫자였지만 그들은 한데 뭉쳐 돌격해 포위망을 뚫어보려는 것 같았다. 그 뒤로는 물건을 든 이들이 스바딜페리를 타고 뒤따랐다.
"스바딜페리라. 역시 기사단은 아니야."
스바딜페리는 힐디스비니처럼 탈것으로 이용되는 생물이었다. 힐디스비니는 덩치가 크고 강인해 군마로 이용되지만 사납고 고고한 성질 탓에 길들이기 쉽지가 않아 기사나 일부 용병들이나 군마로 사용하는데. 스바딜페리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덩치는 기껏해야 사람과 비슷하거나 좀 크고 사납기보단 온순하다. 덕분에 길들이기 쉬워 상인이나 많은 용병들이 힐디스비니 대신 타고 다니는 녀석들이었다.
"힐디스비니를 타고 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꽤 잘나가는 용병 같지?"
"그런 것 같네. 비싼 돈 주고 고용한 거겠지."
하지만 스바딜페리는 군마로 적합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동 수단으로만 사용되었다. 그 이유가 있다면.
"앞에 하나만 보내주고 힐디스비니는 다 떨어트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료들이 창이나 활로 힐디스비니를 탄 이들을 선두의 하나만 빼고 다 노리고 찔렀다. 그들은 나름대로 들고 있는 무기로 쳐내보려 하지만 숫자의 힘과 장비의 차이는 어쩔 수가 없어 그대로 낙마당하는 이들.
-뀌이이익!
"으악!"
그러자 힐디스비니의 뒤를 따르던 스바딜페리들이 혼비백산하며 대열을 이탈한다. 그러면서 등 뒤에 탄 사람을 덩달아 떨어트리고 옮겨 나르던 물건도 내팽개치는 건 덤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탈것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이게 바로 스바딜페리가 군마로 이용되지 않는 이유였다. 겁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사실 훈련을 좀 많이 하면 해결되기도 하지만 그럴 시간에 힐디스비니를 길들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주인과 물건도 내팽개치고 도망치기 바쁜 스바딜페리들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정신 사납게 날뛰었다.
-쿠르륵!
-뀌에엑!!
그런 스바딜페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도나르가 타고 있던 힐디스비니가 놈들 중 하나를 발로 차버렸다. 그것만으로 땅을 나뒹굴다 움직임이 멈추는 스바딜페리의 모습에 다른 녀석들도 겁을 먹고 날뛰는 것을 멈춘다.
"...니가 깡패냐?"
-쿠륵!
그가 황당하게 보든 말든 녀석은 콧김을 내뿜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라 생각하며 그는 오두르를 불렀다.
'뭐냐?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냐?'
한편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난 남자는 자신의 부하들과 의뢰를 부탁한 이들도 내버려 두고 혼자서나마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 사실에도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다. 이래 봬도 그는 용병으로 오랫동안 굴러먹었던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저들이 자신을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사실을. 처음 보는 양식의 갑옷이었지만 이미 그는 저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으니까.
그가 옆을 지나가는 데도 그가 도망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신경을 쓰지 않고 다른 녀석들을 저지하는 기사들의 모습이란. 마치 그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개미로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들이 내버려 둔 것이라면 얼마든지 도망치고자 했다. 갑작스럽게 그의 목뒤에 충격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마치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이 그대로 깨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비싼 값에 장만하고 아껴온 갑옷이라는 사실도 지금의 그에겐 신경 쓰이지 않았다.
화살은 아니었다. 화살은 갑옷에 이런 충격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갑옷마저 막지 못하는 이 충격은 대체. 그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의문을 해결할 겨를도 없이 고꾸라지며 점점 가까워오는 바닥을 바라보다 어둠에 눈이 멀었다.
"휘유, 역시 오두르야. 깔끔하다니까."
오두르가 슬링으로 날린 탄환에 맞아 그대로 쓰러지는 용병의 모습에 도나르는 언제 봐도 대단한 솜씨라며 감탄했다. 하지만 그 장면이 익숙한 그들과는 다르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입을 다물고 부들부들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이건 일종의 경고였다. 상대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데 본보기만큼 효율적인 것은 드무니까. 이제 그들은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리라.
그는 저 용병도 끌어오라고 동료에게 부탁하며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을 하나씩 모아 무릎 꿇렸다. 행동이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으니까.
"그래서 너희는 뭐지? 기사도 아닌데 실크 모스의 번식장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냐?"
"그, 그것이."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벌벌 떨리는 목소리를 내며 답했다. 스바딜페리를 타고 있었던 것으로 보나 차림새로 보나 용병은 아니었지만 꽤 값이 나가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무리에서 용병을 고용한 인물 같았다.
"실크 모스의 실을 채취하고 있었다?"
"예, 예! 실크 모스의 실은 비싼 옷감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되는지라. 위험을 무릅쓰고."
확실히 실크 모스의 실을 재료로 쓴 옷은 비싸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한 번 만들면 상당히 튼튼하고 무엇보다 아름답다고 하니.
"영주께 허가는 받고 하는 일인가?"
"암요! 물론이지요! 어차피 전부 그분들께 들어갈 옷감인데 불법으로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보고 왜 도망친 거지?"
"그, 그게 원래 보던 것과는 다른 갑옷인지라 다른 곳에서 온 기사분들이라 생각하고..."
여기까지만 보면 꽤 타당한 말이었다. 살짝 미심쩍은 부분이 있더라도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작년 이맘때쯤 그들이 기사라는 사실에 안심하던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트."
"왜?"
"애들 골라서 샅샅이 뒤져봐."
"아이고! 기사님! 이게 무슨 행패... 히익!"
그는 자신들이 나름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했는지 그를 붙잡고 말리려 했지만 그가 검을 빼들어 그의 목에 가져다 댄 것이 먼저였다.
"어이, 우리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생각해서 만만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는데. 우리도 알만큼은 알고 있단 말이지."
그래, 그들은 원래 타국의 기사. 그러니 란투아의 문화나 방식에 대해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란투아의 상식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며 같은 기사들이나 아이올로스가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특히 불법적인 일이라면 더욱 자세하게 가장 먼저 가르쳐주었던 사실이었다. 그들은 영지의 치안 또한 책임져야 했으니까.
"그리고 어디서 시치미냐? 상단쯤 되면 우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조금 고립된 외부의 마을이면 몰라도 이 근처에서 활동하는 상단이 영지의 소식에 느리다는 게 오히려 더욱 수상하게 만들었다. 그 무엇보다.
"제대로 된 상단은 실크 모스의 실이 필요할 때 영지에 요청을 하여 정식으로 외부로 파견된 기사들과 협동해서 채취한다."
"아이고, 정 없이 왜 그러십니까? 기사님이 모르는 예외라는 게!"
정은 개뿔 도나르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예외란 없다. 기사가 동행하지 않는 몬스터의 부산물 채취나 번식지의 출입은 무조건적으로 불법이다."
그건 아이올로스가 도나르에게 직접 들려주었던 말이었다. 아무리 실력 좋은 용병을 고용한다 해도 기사도 없이 번식지에 들어가 죽으면 몬스터의 먹이만 늘려주는 꼴이 될 뿐이며 운 좋게 아무 일 없이 채취한다고 해도 그곳에서 합법적이지도 않은 상단의 손으로 넘어간 여인들의 경우 어떻게 되겠는가?
"어이, 도나르 찾았다."
마침 그에게 다가온 기트가 마차 하나를 가리키고 그것을 본 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대충 예상이 가면서도 도나르는 마차를 향해 다가갔다. 그 안쪽에는 아니나 다를까 살색의 바다였다. 수많은 여인들이 나신으로 마차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마차를 몰던 이들이 어찌나 급했는지 여인들은 손과 발이 밧줄에 묶인 채로 서로에게 뒤엉켜 있었고 몇몇은 다리 사이에서 명백히 몬스터의 것이 아닌 같은 사람의 정액을 바닥에 흘리고 있었다. 예상보다도 더 불쾌한 광경에 혀를 찼다.
"흐으으."
"가, 감사합니다."
먼저 와있던 동료들이 그녀들을 풀어주는 것을 지켜보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남자가 보였다.
"기사에게 범죄자에 대한 즉결 처형권이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
도나르가 싸늘하게 내려다보자 그가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는지 벌벌 떨며 말을 토해냈다.
"사, 살려주십시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안에 있는 물건을 전부 가지셔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아직 죽일 마음은 없었다. 이런 현장에 나오는 녀석들은 실질적인 주축이 아니라 꼬리에 불과하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도나르가 상관없다는 듯이 검을 치켜들자 생각났다는 듯이 말하는 그.
"이번에 정말 귀한 녀석이 들어왔습니다! 무려 캐트시가 들어왔단 말입니다! 그 녀석을 드릴 테니 목숨만은!"
"캐트시라고?"
캐트시라면 분명 파르즈에서 살아가는 수인이었다. 심지어 파르즈는 그들이 구름 지대를 넘어오기 전에 잠깐 들렸던 곳. 결코 가깝다고 할 수 없는 곳이 파르즈였기 때문에 도나르는 의문이 들었다. 캐트시가 대체 왜 란투아에 있단 말인가? 그는 관심이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화색이 도는 표정으로 말을 계속했다.
"저희도 우연히 손에 넣었습니다만 분명 가치 있는 녀석입니다! 그러니 그 녀석으로..."
"잔말 말고 안내해라."
그는 녀석으로 거래를 하려는 것 같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도착한 마차에서 한 소년이 철창에 갇혀 그들을 경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셔나 로기 또래의 소년이었지만 보통 사람에겐 없는 신체 부위들이 그 소년이 캐트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어, 어떠십니까? 상품은 만족스러우신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상품이라 취급하는 말에 혀를 찼다.
"역시 너는 여기서 죽기에는 아까워."
"그, 그렇다는 말씀은."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이자에게 뭔가 더 큰 뒷배가 있는 것을 확신하고 도나르는 그를 포박해 영지로 데려가기로 했다.
"얘들아! 나와라!"
어셔는 마차 안에서 말없이 앉아 있다 드디어 밖에서 들려오는 도나르의 목소리에 너 나 할 것 없이 뛰어나갔다. 로기와 파벨과 있으면서 어찌나 불편했는지 상쾌한 바깥공기에 해방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뭔가 너무 많이 늘어난 거 아니에요?"
그들이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볼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원래 사람을 구하면 그렇잖냐. 그래서 마차도 들고 온 거고."
지금까지 몬스터들에게서 살아남은 이들 중에 남자는 없지 않았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사람들을 마차에 태운다는 말에 비켜서야 했다. 그러다 어셔는 그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고양이?"
처음에는 그저 사람 사이에 고양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통 고양이의 것이라기엔 너무 큰 꼬리를 무의식적으로 쫓다가 그 끝에 고양이가 아닌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그 또래의 소년이었는데 머리 위에 고양이 귀가 쫑긋거리고 있었고 허리 부근에는 고양이의 꼬리가 뻣뻣하게 털을 세우고 있었다.
"아저씨, 저 애는..."
"너도 봤냐? 어쩌다가 란투아까지 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캐트시라더라."
어셔는 난생처음으로 보는 수인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지금은 영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와 대화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