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5화 〉가을의 잔향. (125/220)



〈 125화 〉가을의 잔향.

"후와아. 오랜만에 밖에 나오네요."


메디아가 상쾌하다는 듯 숨을 들이쉬자 류드밀라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밖에 나온  좋은데. 우리 어제까지만 해도 외출금지 아니었어?"

그래, 최근 계속 벌어지는 실종 사건 탓에 그녀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답답하다는 푸념까지 했던 게 바로 어제였는데.

"후후, 아버님께 답답해서 나가고 싶다며 허락받을 때까지 조르느라 고생했죠."
"그, 그래."

류드밀라는 입가가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수긍했다.

"그래서 벨카, 부탁은 들어드린 거예요?"
"고마워."
"뭐야, 네가 아니라 벨카가 나오고 싶었던 거야?"

그녀는 의외의 사실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벨카를 보았다. 평소 워낙 조용한 성격에 무언가 요구하는 일도 없다시피한 소녀였기에 더욱 놀라웠다.


"그게, 어셔의 옷을 사주고 싶어서."
"...그럼 그렇지."


그 감상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도 요즘 보면 어셔의 옷이 낡아 보이긴 했잖아요?"

정작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녀들은 그의 옷이 눈에 띄게 낡아가고 있는 게 보였다.

"하긴  녀석 새 옷을 사준다고 해도 거절하는 것 같으니까."

류드밀라는 하루하루 갈아입는 옷만 바뀌고 새로운 옷을 입는 일이 드문 어셔에게 그에 대해 물어보았던 적이 있었다.


"시프 누나도 그런 말을 하던데 입을 수만 있으면 별로 상관없지 않아?"

아무래도 연무장을 구르는 일이 많은 것도 있겠지만 본인이 그런 쪽에는 영 관심이 없다는  문제인  같았다. 아버지의  때문에 억지로나마 유행에 민감한 그녀가 보기엔 옷을 정말 몸을 가리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로도 취급하지 않는 그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저도 나오고 싶었으니까. 잘 된 거죠. 어셔의 옷을 사는 김에 겸사겸사 벨카에게 제가 골라준 옷을 입힐  있었으니까요!"


류드밀라가 메디아의 말을 듣고 벨카를 보면 그녀는 평소 하녀복이나 수수한 원피스를 고집하는 것과는 다르게 프릴이 잔뜩 달려 풍성한 느낌을 주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건 메디아가 선물이랍시고 그녀에게 입힌 것이었다. 머리 모양까지는 메디아가 건드리지 않아서 평소 그녀가 고집하는 그대로였지만 지금 입고 있는 옷에는 정말 잘 어울렸다. 덕분에 안 그래도 아름다운 소녀는 더욱 인형처럼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근위대 분들과 같이 다녀야 한다는 조건이 있으니까요."


평소 시찰을 나온다 하면 근위대가 몰래 호위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현재 그들은 무거운 갑옷이나 후줄근한 복장 대신 제복과 경장을 입고 그들의 바로 곁에서 호위 중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지만 뒤숭숭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쩔  없는 처사이기도 했다.

"응, 그건 상관없으니까."


소녀가 희미하게 미소 짓자 이곳저곳에서 헉 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류드밀라는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 기사들이 포진해 있으면 시선이 끌리더라도 알아서 피하거나 몰래 보는 정도로 그치기 마련인데 오히려 더욱 시선이 몰리는  기분 탓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유의 대부분은 벨카가 차지하고 있으리라. 메디아나 류드밀라도 예쁘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녀들 사이에서도 소녀의 아름다움은 독보적이다.

메디아가  벨카에게 옷을 갈아입히지 못해 안달인지 간단하게 이해할  있을 정도로.

"어셔가 초조해할만하지."

류드밀라는 성내에서만 해도 소녀에게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얼마였는지 떠올렸다. 지금 벨카가 길을 걸어가기만 해도 그녀를 노리는 이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 사람은 내면이 중요하다고 번번이 강조하곤 하지만 결국 아름다운 것에 시선이 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저 예쁘기만 하고 그다지 쓸모도 없는 장신구나 보석이 거금에 거래되는 것처럼 말이다.


벨카에겐 그것 말고도 묘하게 시선을 끄는 무언가 있었지만 류드밀라는 그런 것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단지 소녀의 다정함에 무심코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것이 그녀의 사소한 불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그녀들의 쇼핑은 시작되었다.


"이런 건 어떤가요?"

메디아가 고른 것은 단정함을 강조하다 못해 다소 딱딱해 보이기까지 한 정장이었다. 류드밀라가 보기에도 나쁘지는 않아 보였지만 벨카는 잠깐 그녀에게 다가가 정장을 살짝 만져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셔는 좀  편한 옷을 좋아할 거야."

벨카의 말대로  녀석은 이런 딱딱한 옷보다는 격한 움직임에도 방해받지 않을 편한 옷을 좋아할 것 같긴 했다. 허구한 날 연무장을 구르는 것이 일이니까.

"하지만 이런 옷은 한 벌쯤 갖추는  좋아요? 필요할 때 없으면 곤란하니까요."
"그건 그래."


메디아가 아쉬운 듯 더 권해보고 류드밀라도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저런 옷이 필요할 것 같지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꼭 필요할 때가 한 번쯤은 오기 마련이니까. 그녀들의 설득에 벨카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듯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어셔는 아직 성장기니까. 미리 사두었다가 작아지면 곤란한걸. 비싼데  입으면 아까우니까."

류드밀라가  정장의 가격은 금화 6전 하고도 은화 2전이었다. 그녀들은 몰라도 소녀에겐 부담이 될만한 가격이긴 했다. 메디아는 결국 정장을 원래 자리에 돌려두었다.


"그럼 이건 어때?"

류드밀라가 내민 건 활동하기 편하게 품이 널찍한 옷이었다. 훈련복 안쪽에 내복으로 입기에도 적당하리라 생각했는데. 옷을 꼼꼼히 살피던 벨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크기가 너무 작아. 좀 더 큰 건 없을까?"
"그런가?"

난쟁이인 류드밀라에게 인간들이 입는 의복의 크기는 눈에 확  정도로 차이가 없으면 직접 대보지 않는 한 알아채기 힘들었다. 그녀들은 이것저것 고려하며 옷들을 고르느라 한동안 여러 가게를 전전해야 했다.

"으웩, 너무 비리고 딱딱한데요."


어셔는 입안에 퍼지는 생선의 비린내와 딱딱한 식감에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다. 설마설마했지만 그들은 정말 점심으로 말린 뜨레스카를 하나씩 쥐고 뜯어먹는 중이었다. 내장은 제거한 것 같았지만 아무런 제조 방법 없이 건조한 뜨레스카는 비리고 질기고 단단했다.

"아무런 요령 없이 그냥 먹으니 그렇지. 그건 직접 뜯어먹기 전에 이렇게 쳐서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고."


도나르는 손에 쥔 뜨레스카를 패대기쳤다. 어셔는 그를 따라 해보고 겨우 씹어먹을 만해졌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래도 비리잖아요."
"생선이 원래 비린 건 어쩔 수 없다."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익숙하다는 듯 생선들을 패대기치며 뜯어먹는 기사들을 보고 있으니 할 말이 사라진 어셔였다.


"다른 건 없어요?"
"다른 거라."

그러자 도나르는 이제는 가을이 찾아와 란투아의 황금빛 들판에 넘쳐나는 풀 하나를 꺾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다른 게 없냐고 했잖냐?"
"이걸 먹으라고요?"
"호밀도 엄연히 먹을  아니냐. 생으로 먹으면 떫은맛이 강해도 꼭꼭 씹으면 먹을만해."
"농담하는 거죠?"

도나르는 말없이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쩝쩝, 그래도 여기서 굶어죽을 일은 없겠다."
"그러게 낙원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어."

그곳에는  여럿을 뜯어 입에 털어 넣는 이들과 뜨레스카와 함께 호밀알을 질겅질겅 씹는 이들이 있었다. 어셔는 혹시나 해서 그가 내민 것을 먹어보았지만 생으로 먹는 호밀의 맛은 쓰고 시큼하고 무척이나 떫었다. 그가 이상한 눈으로 보건 말건 그들은 대충이나마 점심을 해결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생존자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번식장은 해결했는데 다른 마을을 살피는 이유는  수 없었지만 기사의 일에 포함된다고 하니 군말 없이 따랐다.


"단순한 기우였나."


다음으로 들린 마을은 그들이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멀쩡했다. 그들 나름대로 쌓아둔 벽은 튼튼해 보였고 어디 하나 망가지거나 습격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찾아온 그들이 당황스러운 듯 벽 위에는 어설프게나마 무장한 이들이 그들을 경계 어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당신들은 어디의 기사 님입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기사라는 것을 알아보고 최대한 정중하게 묻는 대장으로 보이는 이의 모습에 도나르는  하나를 꺼내 들어 보였다.

"그건, 영지의?!"

단순히 신분의 증명으로 사용되는 패지만  종류에 따라 대우는 달라진다. 원래 그들이 입국하면서 받았던 패는 단순히 네모난 철 조각 같은 패였지만 아이올로스의 가신이 되면서 둥근 모양의 패를 받았다. 음각된 그림이 더  보이게 더 큰 크기이기도 했다. 한 면에 음각 된 건 간단한 인적 사항이지만 다른  면에 음각  그림은 네 개의 깃털이 겹쳐져 있는 모습이다.  깃털의 숫자에 따라 기사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하나의 깃털은 백부장처럼 일반 병사의 몸으로  기사 취급을 받는 이들. 두 개의 깃털은 일반적인 기사가. 세 개의 깃털은 기사단장을 보좌하는 부관이. 네 개의 깃털은 기사단장이. 다섯 개의 깃털은 영지를 하사받은 기사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느 영지의 기사 님인지 확인해   있겠습니까?"

도나르는 거리낄 것 없이 그에게 자신의 패를 받기 쉽게 던져주었다. 허튼짓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영지로부터 받는 비호를 포기하는 걸 떠나서 멍청한 짓이니 그럴 리는 없었다. 겨우 그들이 아이올로스의 기사라는  확인했는지 경계를 풀고 문을 열고 나와 그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패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처음 보는 갑옷이라 다른 영지의 기사들이 약탈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외부 마을의 관리와 정찰은 기사단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당번을 교대하는데 아직 그들의 차례가 온 적은 없었으니까. 그는 단체로 허리를 숙이는 그들을 세우며 고민했다. 슬슬 잊을만하면 원래는 타국의 기사였다는 걸 이런 식으로 자각하게 되니 조금 거슬리긴 했다. 갑옷을 란투아 식으로 바꿀까 생각했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오랫동안 입어온 갑옷을  몸처럼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갑옷을 바꿔버리면 불편해지고 익숙했던 움직임도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만의 특색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들이 아까 처리한 실크 모스의 번식장은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비허가 마을이었다. 영지의 비호를 제대로 받고 있었다면 그렇게  때까지 늦는 일은 없었을 테고 지급받은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았으니 확실했다. 현재 그들이 찾아온 마을은 허가가 되어 지도에도 표시된 마을이었고.

"근처의 비허가 마을이 실크 모스의 소굴이 된  알고 있었나?"
"예? 처음 듣는 소식입니다만 사실이라면 이곳을 다니는 상단이 말해주었을 텐데..."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며 도나르는 급하게 물었다.


"혹시  근처에 비허가 마을이  개 있는지 알고 있나?"

그리고 그의 대답은.


"아마 두 개일 겁니다."

그들이 급하게 움직일 이유가 되었다. 방향을 묻자 자주 옮겨 다니며 생활하는 이들이라 자세한 방향까지는 가르쳐주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에게 감사하며 가보지 않았던 방향을 향해 가다 보면 역시나 실크 모스의 소굴이 되어있었는지 멀리서도 흰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곳에라도 생존자가 남아있기를 바라며 달리던 중이었다.

"저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도나르와 함께 힐디스비니를 타고 있었던 어셔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드러나는 마을의 모습에 결국 의문을 품었다. 그야 그 마을의 모습은 이번에 첫 실전을 겪은 그라 해도 이상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단순히 실크 모스의 번식장이라고 부르기엔 위화감이 있었으니까. 분명 마을을 감싼 하얀 실들이 실크 모스의 번식장이 된 증거라면 아무도 없어야 정상일 텐데.  마을의 주변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낸 도나르가 힐디스비니를 멈춰세우자 차례대로 멈춰 서는 기사들. 어셔는 이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이번에 외부 마을 관리를 나간 기사단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힐디스비니의 숫자가 너무 적어 뭔가 물건을 나르는 것도 보이고."

마을의 주변에 진을 친  같은 모습에 도나르가 추측해보았지만 오두르가 곧바로 부정했다. 그는 이 먼 곳에서도 마을을  수 있는  같았다.


"어쩔 수 없지. 견습들을 마차 안에 들여보내. 혹시 모르니 우리는 마을 주변을 포위하고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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