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가을의 잔향.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병사들과 너희의 사정은 다르지."
그가 타박하듯 말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견습 기사가 전문적으로 훈련받기는 하지만 그 훈련 기간 때문에 병사들보다 실전이 늦춰지는 감이 있으니까.
"결정적으로 너희와 일반적인 병사의 차이는 나이다."
"나이요?"
"그래."
보통 병사로 징집되는 이들의 나이는 신체적으로도 완전히 성숙한 때가 기준이다. 하지만 현재 견습으로 나온 그들은 어떠한가?
"그냥 성인이라고 해도 무방하지만 그래도 어리숙해. 신체적으로 완성되지도 않았고."
까놓고 말해서 어셔와 로기, 파벨은 벌써 독립할 나이다. 좀 빠르면 결혼도 했겠지. 지금 당장 보기엔 이들이 더 미숙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병사들은 때가 되어 어쩔 수 없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1~2년 정도 전투 훈련을 받으며 몬스터가 습격하면 실전에 동원된다. 운이 정말 좋지 않으면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로 몬스터와의 실전에 동원되기도 하는 반면 그들은 어떤가?
"너희는 병사들보다 더 많은 준비 기간을 가지고 더 어린 나이에 실전을 겪는 거다."
그러니 훈련을 받으며 전쟁을 직접 몸으로 겪은 병사들에게 밀리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야기는 달라진다. 경험이 곧 힘이 되는 전쟁에서 전투를 생업으로 삼은 기사는 당연히 병사들보다 강하다. 견습 기사가 아무런 문제 없이 실전을 겪고 그대로 성장한다면 개개인으로서는 병사들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그야말로 인간 흉기가 된다. 그간의 훈련과 어린 나이의 실전 투입은 그것을 위한 일이다.
"그래도 너희를 진짜 심각한 상황에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다."
이곳에서는 안전하게 견습을 맡고 설명할 시간이 있다는 것에 샬비는 역시 평화롭기는 하다고 생각하며 실크 모스의 실에 둘둘 말려 놈들의 번식지가 되어있는 곳 하나를 골라 아밍 소드로 실들을 끊어 입구를 만들었다.
"이제 가보자고. 운이 나쁘면 너희가 어떤 걸 상대하게 될지 알 게 될 거다."
커다란 고치의 안에는 기분 나쁜 생물의 둥지만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끊어낸 실들의 안쪽에는 집의 흔적이 남은 천막이 보였다. 집채만 한 벌레의 고치를 연상시키는 집이었던 것의 입구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어셔들과 오두르가 뒤따랐다. 그리고 보이는 건 엉망이 된 집 안의 모습이다.
"이것들은."
"여기도 원래는 사람 살던 곳이었으니까."
집 안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듯 널브러진 옷가지와 식기, 누군가를 그려 놓은 그림 같은 것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밖에서 보았던 고치를 더 작게 줄여놓은 고치가 두 개 있었으니까. 아마도 그 안에 사람이 있을 거리고 생각했지만 그 고치로 다가가려는 그들을 샬비가 아밍 소드로 막아세웠다.
"멈춰라."
"네? 하지만 안에 사람이."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샬비는 그들을 막아 세웠던 검을 들고 고치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였나?"
"고치가 이미 누렇게 변색됐잖아."
오두르의 말에 샬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셔와 로기, 파벨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고치가 갑자기 꾸물거리는 순간 그들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혐오감을 느꼈다. 방금 고치를 크게 움직인 저것이 정말 사람이 발버둥 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침묵이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투둑투둑 고치의 안쪽에서부터 실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하나의 고치에서도 그 소리가 나고 있었다. 점점 갈수록 커지는 소리들에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윽고 그 소리가 겉면에 도달하는 순간.
-끼르르르륵?
고치의 실이 무언가에 녹아내리는 듯 구멍이 나며 놈들의 얼굴이 차례대로 나타났다. 검은 광택으로 번들거리는 수 십 쌍의 눈동자가 그들을 직시한다. 형태는 살짝 다르지만 그것은 이번에 그들을 습격한 실크 모스들의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선명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검은 시선에는 이유 모를 환희와도 같은 기분 나쁜 악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손을 쓰기엔 한참 늦었었나."
-끼리리릭!
샬비의 목소리에 반응한 듯 놈들 중 하나가 무언가를 토해내 자신을 막는 고치를 녹여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달려드는 모습에 어셔는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끼이이이익!
"쯧, 몸도 제대로 안 마른 게."
그는 아밍 소드를 그대로 휘둘러 달려든 놈을 반 토막 내어버렸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기어서 움직이려 하지만 몸이 마르지 않은 놈의 발은 반 토막 난 자신의 몸도 제대로 지탱하지 못했다. 샬비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놈에게 검을 찍어내리자 잠깐 몸을 떨다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다. 탄생과 동시에 죽어버린 모습이 안타까울 만도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놈과 함께 고치에서 쏟아져 나온 검은 것들과 지독한 악취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걸 정말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너희들 검을 들어라."
"가, 갑자기요?"
"갑자기는 무슨. 너희가 바라던 실전이다. 검을 들어. 뭘 해야 할지는 알 거다."
이후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아직 고치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다른 한 마리를 향하고 있었다. 놈은 다른 놈처럼 입에서 무언가를 뱉으며 고치를 녹이고 있었다. 그들은 일단 시키는 대로 검을 들었지만 갈수록 드러나는 놈의 모습에 좀처럼 나서지 못하자 샬비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놈들의 로열 룸이다."
"로열 룸이라면..."
"암컷을 위한 번식장이지."
몬스터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실크 모스 같은 경우 소수의 암컷에게 다른 수컷들이 복종하며 명령을 따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놈들만 없애도 놈들이 움직이는 걸 대충은 막을 수 있다는 거다."
놈이 곧 고치를 완전히 빠져나왔지만 샬비는 팔짱을 끼고 아무 일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건 오두르도 마찬가지였다.
-끼리릭!
놈은 공격하지 않는 이들이 의아한 것 같았지만 곧 그 기분 나쁜 눈동자가 검을 들고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그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어셔는 이를 꽉 물었다. 놈이 조소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명백한 일이었다. 덩치도 크고 노련한 기사들에 비해 그들은 덩치도 작으며 이곳에 있는 것도 어색한 티가 나는 견습 기사. 놈은 그들을 만만하게 보고 사냥감으로 정한 것이다. 어셔는 그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더 이상 무력할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 소녀를 범했던 이들과 같은 시선을 보내는 역겨운 것을 어셔는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는 검을 들고 놈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면서 내려친 그의 검은 그대로 놈의 머리와 몸을 부드럽게 가르는 듯했지만 반쯤 가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아직 갑피가 다 마른 놈이 아닌데도 어셔는 놈의 몸을 벨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배운 건 그런 것만이 아니다. 어셔는 놈의 몸을 반쯤 파고든 검날 위에 발을 올렸다.
-끼르... 끼그그그
그리고 천천히 힘을 주자 아직도 숨이 붙어있던 놈이 괴로워하며 발버둥 쳤지만 그에게 그 소리는 단지 죽음을 부추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그가 신고 있는 건 단단한 군화다. 날카로운 검날을 밟아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놈의 살점보다 훨씬 더 단단할 테니까. 검자루를 통해 생명을 자르는 감촉이 섬뜩하리만치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이윽고 검이 결국 몸을 전부 갈랐을 때 더 이상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쯧, 수컷이 2령까지 성장한 후라. 얼마나 방치되어 있었던 건지."
도나르는 성장이 늦는 개체가 있을까 싶어 동료들과 주의 깊게 살폈지만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말라죽은 여인들의 시체들뿐이었다. 수컷의 크기는 암컷의 크기에 비해 작아서 오랫동안 숙주로 이용되는 데도 죽을 때까지 방치되어 있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지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니.
"로열 룸은 찾았냐?"
"아니, 좀처럼 안 보이는데."
"암컷은?"
"이미 오래전에 자리를 뜬 것 같다."
그런 상황을 들으니 그들은 더욱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상한데."
"이상하지."
암컷이 번식지를 떠났다는 건 이미 새끼들이 충분히 성장해 새로운 무리를 꾸릴 때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건 아무리 위치가 멀고 애매한 곳이라도 언제 어디서 보고가 들어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우연히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매우 희박했다. 더욱이 실크 모스는 번식지를 꾸리는 방식이 눈에 띄기 쉬웠으니까. 하지만 대체 왜 여태까지 발견되지 않았는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어이, 도나르."
샬비와 오두르가 아이들을 데리고 그에게 온 것은.
"애들 실전은 잘 된 거냐?"
실크 모스 수컷이 2령까지 성장했다면 중형종인 데저트 로커스트와 크기가 비슷하다. 그 정도라면 아이들의 실전 대상으로 나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보면 아이들은 어딘가 멍한 기색이다. 그 모습에 도나르는 투구를 긁적였다.
"실패했냐?"
실패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성년이라 해도 아직은 어린 편이고 지금까지 훈련만 해오다 진짜 몬스터를 마주했을 테니 압박감에 몸이 굳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수한 것을 샬비나 오두르가 대신 처리해 주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야,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샬비의 말에 도나르는 잠깐 아이들을 보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 녀석 뭐냐?"
"뭐냐니? 설마 어셔 말하는 거냐?"
도나르는 샬비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의아했다.
"그게 말이다..."
이내 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에 도나르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녀석이 그랬다고?"
"내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냐."
그들이 발견한 곳이 하필 암컷이 태어나는 로열 룸이었다는 건 그렇다 쳐도 이제야 첫 실전인 녀석이 조금 망설였다 해도 몬스터를 직접 죽였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너 대체 뭘 가르친 거냐?"
"내가 가르친 거라고 해봐야 몬스터에 대한 상식이나 실전 기술 위주였는데..."
"실전 기술 위주로 가르쳤다고?"
검술이나 그와 맥락을 같이 하는 무기술들은 분명 전투 기술이었지만 실전 감각도 없이 배운 대로만 사용한다면 그건 알기만 하는 샌님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견습 기사들이 처음에 가장 많이 하는 실수이기도 하다. 상황마다 적용시켜야 할 기술이 다른데 배운 대로만 하려다가 자주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나르는 검술 같은 무기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실전 기술, 그가 직접 전투를 겪으며 쌓아온 노하우를 가르친 것에 가까웠다.
"그래, 검술도 꾸준히 단련하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긴 한데. 당장 도움이 되려면 그런 걸 가르치는 편이 낫겠더라."
그런 걸 견습 기사에게 가르쳐주는 기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그것을 편법이라 느끼고 안 가르치는 풍조를 생각하면 꽤 특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는 힘든데.
"어처구니없는 녀석이야. 기사가 목표도 아닌 녀석이 보편적인 기사의 덕목을 말하지를 않나."
또한 기술을 배웠다고는 해도 그걸 실전에 적용시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아직 미숙한 부분은 보였지만 검에 힘을 싣고 숨통을 끊는 방법까지 나쁘지 않았다.
"일단 보통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
견습 기사를 육성하는 기사라면 기뻐할 만한 일이었지만 도나르는 그 소식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어셔가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한다는 사실은 굳이 눈여겨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눈에 띄었으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일에 집중하자."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셔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해악을 끼치는 몬스터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손으로 직접 생명을 끊어내는 감각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뇌리에 남는 건. 몬스터와 함께 고치의 안에서 쏟아지던 액체와 고체 사이의 검은 것들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있었지만 부정했다. 하지만 그 검은 것들 사이로 먹다 남긴 듯한 손톱을 발견했을 때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그런 것들과도 싸워나가야 했다. 고치에서 쏟아져 나온 그 악취가 아직도 코를 찌르는 것 같았다. 이야기가 끝났는지 도나르와 샬비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 마을에 생존자는 없는 것 같고. 점심부터 해결하고 다른 마을로 이동하자."
"이제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요?"
로기의 의문에 샬비가 답했다.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말이다."
그들이 무엇을 이상하다 말하는지 아직 어셔와 그들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