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3화 〉가을의 잔향. (123/220)



〈 123화 〉가을의 잔향.

방패 뒤에 숨어 숨을 죽였던 이들이 재빨리 움직여 성벽에 온몸을 부딪히고도 아직 살아남은 놈들을 처리하거나 화살이나 슬링을 쏠 준비를 했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견습으로 따라나온 어셔와 다른 녀석들은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처음으로 겪는 몬스터와의 실전은 생각보다 더 신속하고 급하게 이루어져서 뭔가 해볼 만한 것을 찾기도 힘들었다. 애초에 끼어들만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배웠던  주로 검술을 위주로  격투술이었지 궁술이나 슬링의 탄환을 날리는 방법이 아니었으니까. 할 줄 안다고 해도 어른들이 하는 만큼 화살이나 탄환을 멀리 날릴 자신이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실크 모스의 인분이 퍼져 피어오른 새하얀 안갯속에서 어른들이 또 다른 실크 모스들이 날아드는 것을 쏘아 떨어트리고 막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후우,  자식들 물량만 많아가지고."

도나르가 땅에 부딪히고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어 다니는 마지막으로 남은 실크 모스의 목에 검을 꽂아 처치했을 때 어셔는 주변의 분위기를 살피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오, 잘 피해있었냐?"
"실전이라면서요."

그는 불만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실전이라더니 그들은 결국 몬스터들이 쳐들어 오고 전부 쓰러질 때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도나르는 피식 웃으며.

"보기만 하면 뭐 어떠냐? 안전한 게 최고지."

그는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무것도  수 없다는 무력감은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왔는데 정작 제대로 할  있는 일이 없다는 게 뭐란 말인가? 그건 그와 함께 실전을 나온 녀석들도 마찬가지인지 말은 안 하지만 어셔의 말에 동의하는 기색이자 도나르는 투구를 긁적였다.


"사실 실크 모스가 아니었다면 여기서부터 실전이 되었겠다만 이건 이 녀석들의 습격 방식이 독특한 거라서."


몬스터들이 원래 인간을 적대하며 극단적인 공격성을 보이긴 하지만 실크 모스는 그중에서도 유별난 타입이라 이렇게 속전속결로 끝낼 수밖에 없다는 모양이다. 특히 성벽이 앞부분이 낮고 뒷부분이 높게 설계된 건 실크 모스 때문이라고. 인분이 바람에 날려 영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하하! 덕분에 저는 견습을 덜 맡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만."

원래 그들을 챙기기로 했던 백부장이라는 남자는 살았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아이올로스 님께 보너스 깎아달라고 한다?"
"아이고! 왜  얼마 안 되는 돈줄을 깎으려 하십니까?!"

도나르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곧바로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어쨌든 너무 실망하진 마라 원래 이 녀석들은 번식을 하고 나면 수컷은 필요 없다고 이렇게 버린다고 하니까."
"버린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멀지 않은 곳에 놈들의 번식지가 있을 거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걸 처리하러 가야 하고."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 영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커다란 마차 세 개를 추가로 끌고 가는데 그것이 어셔에겐 낯익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거 저희들이 타고 왔던 마차 아니에요?"
"그렇지."
"고철로 팔았다면서요?"

쓴다고 해도 별로 문제는 없었지만 이곳에 온 뒤로는 딱히  일이 없다는 이유로 마차를 해체해 팔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해체해서 팔았지. 그런데 이게 원래 전차다 보니까 쓸만하다고 생각했는지 몇 개는 이곳에서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 거고."


다른 기사단에서도 사용하고 싶다기에 싸게 싸게 팔아버리고 지금 이렇게 영지 밖으로 나갈 때 피난민들을 수용하거나 짐을 싣는데 사용하는 중이라고.


"참고로 오늘 점심은 좋든 싫든 말린 뜨레스카가 될 거다. 저거 하나에 한가득이지."
"설마 그걸 생으로 먹는다고요?"

말린 뜨레스카는 분명 숙취를 해소할 때 물에 불려 수프로 끓여먹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바짝 말라 딱딱한 그것을 생으로 먹는다니.

"기사라면 익숙해져야 하는 맛이지."


그리하여 어셔는 그들과 함께 정말 오랜만에 영지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 살다 보면 딱히 좁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지만 밖에 나와서 보면 영지가 정말 작게 보였다.

"그런데 여기는 엄청나게 커다란 벽 안에 있는데 어떻게 몬스터들이 습격하는 거예요?"

그러다 떠오른 것은 이곳을 둘러싼 거대한 장벽이었다. 실감이 제대로 나지는 않지만 이곳은 저 성벽과 영지의 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개의 장벽의 안에 있다. 분명 몬스터를 막기 위해 그렇게 커다란 벽들을 세워둔 것일 텐데. 그 두 장벽의 안쪽에 있는 영지에도 몬스터들이 습격하고 다른 마을이 괴멸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정말  장벽들이 효과가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데. 여긴 정말 평화로운 거다."


도나르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나 커다란 장벽을 두 개나 세워놓고도 이 안쪽까지 번번이 습격해오는 몬스터들을 보면 의미가 있나 생각하면서도.

"비행형이나 작게나마 날개 달린 녀석들을 제외하면 쳐들어오는  본 적이 없거든."


시도 때도 없이 드래곤 같은 괴랄한 것들이 쳐들어오는 곳도 문제지만 어떤 곳은 몬스터들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땅과 하늘에서 바글바글하게 몰려든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쳐들어오는 몬스터들을 구분하기 쉬운 이곳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 곳이었다면 실전을 치른다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전에 이미 실전을 치르고 있었을 테니까. 도나르는 굳이 그 말을 하지 않고 삼켰다. 아직 미숙한 녀석에게 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흥미가 갈만한 이야기가 있다면.

"그리고 그 장벽들은 란투아에서 만든 게 아니라더라."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란투아 연맹이 생기기도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벽이라고."

처음엔 도나르도 왜 저렇게 쓸데없이 거대하고 긴 장벽을 쌓았는지 게라르두스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이렇게 습격하는 몬스터들이 몇 없는 것을 보면 효과가 없다고는 볼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장벽을 건설하는 노동력과 시간이 너무 낭비된다고 밖에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을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래서 굳이 저 장벽을 건설한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란투아에서 지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예. 저도 부모님께 전해 들었던 이야기지만 저 벽들은 연맹이 생겨나기도 전부터 존재해왔다고 합니다."

그도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그의 부모 또한 부모로부터  부모에게서 같은 식으로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였다고 한다. 대체 얼마나 오래된 이야기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그저 오래되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


"아주 먼 옛날에는 이 장벽 안으로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장벽에는 사람이 들어갈만한 구멍이나 문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신의 벽이라 부르며 그 근처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도 이곳은 사람이 살기 좋은 비옥한 땅이었으므로 많은 이들이 벽 부근을 터로 삼았다. 하지만 어느 날 점점 더 세를 불리는 나라가 생겼다. 그들은 주변의 모든 마을이나 국가를 복속시켰지만 아직도 벽의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장벽은 그들에게 있어서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안을 넘볼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하지만 벽의 근처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를 정복한 이들에게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매번 그들을 괴롭히는 몬스터가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시간을 들여 벽을 뚫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물론 여전히 벽을 뚫는 것을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들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벽이 뚫렸을 때.

그곳에는 낙원이 있었다. 당연히 먼저 벽을 뚫은 자들이 그곳을 독점하고자 했지만 새어나가는 물을 손을 모아 얼마나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관리하고자 해도 안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넘쳐났고 결국 다른 곳에서도 문이 만들어지며 그들의 관리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장벽 안의 공간은 너무나 드넓고 비옥했으니까. 결국 가장 먼저 장벽의 안을 보았던 이들은 멸망했고 장벽의 안에는 다시 많은 마을과 나라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몬스터들 또한 인간을 쫓아 장벽을 넘어 공격해왔으므로 그들은 더욱 안쪽으로 들어가다 또 하나의 벽을 발견하고  있는 자들이 그곳을 넘어 차지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전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쳐들어 오는 몬스터들을 막아내고 살아남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그것이 지금의 란투아 연맹이다.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 장벽의 외곽을 살펴보면 그들이 섬기던 신에 대한 묘사를 해둔 그림이나 여러 가지 기록들이 빼곡해서  거짓이라 말할 수도 없다는 모양이다. 지금도 란투아의 안팎을 감싼 두 개의 장벽을 그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을 따 예카테리나의 벽이라 부른다고 한다. 들어올 때는 그 압도적인 크기에 신기하게만 보였던 벽인데 그런 이야기가 담겨있었을 줄은 몰랐다.

"이제 옛날이야기는 그만하고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그는 어째서냐 물으려 했지만 곧 눈에 보이는 마을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그곳에는 겨울이 아닌데도 새하얗게 변해버린 마을의 모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놈들의 번식장이다."

어셔는 이내 다시 같이 서게  로기와 파벨에 기분이 저조했다. 로기는 그의 시선을 피했고 파벨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거 참. 이번에 견습이  셋밖에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진짜 미안한데 부탁한다. 샬비, 오두르."
"하아, 어쩔 수 없지. 나중에 한잔 쏴라?"
"얼마든지  게."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니 본래 기사들은 2인 1조로 번식장을 탐색하고 생존자들을 구출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견습으로 끼어든 상태였기 때문에 한 조 정도는 그들을 맡아주어야 하는데 도나르는 지휘를 하는 입장이라 그들을 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오두르와 함께 그들을 맡게 된 샬비가 말했다.

"그래서, 웬만하면 동료와의 호흡을 맞춰라.라고 하고 싶은데... 그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서로 등에 칼이나 꽂지 마라."

그들이 협력하는 것에 대해선 깔끔하게 포기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진검까지 들고 있으니 더욱 불안한  같았다.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허튼 생각은 하지도 말고."

샬비 못지않게 불안한  오두르도 이야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몰상식하지는 않은데 말이다. 그들의 첫 실전은 처음부터 불안 속에서 시작되었다.


"너희는 기사에게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

하얀 실로 뒤덮인 마을을 걸어가며 샬비가 물었다. 그는 그들보다 앞서가며 한 손에 쥔 아밍 소드로 길을 방해하는 실을 끊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닥을 밟을 때마다 신발을 신고 천을 밟는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이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몬스터들과 싸우는 거 아니에요?"
"공훈을 세우는 겁니다."
"사람들을 지키는 거요."


차례대로 로기, 파벨, 어셔였다. 그들의 시선이 잠깐 서로에게 부딪혔다 떨어졌다.

"와우, 이 정도로 다른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오두르의 놀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샬비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보더니.

"너희 짜고 친 거 아니지? 아니, 됐다. 말하지 않아도 돼. 표정만 봐도 알겠다."


그는 잠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결론은 다 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 빼먹을 수는 없어. 그런 면에서는 타협도 안돼."
"하지만 뭔가 더 중요한 게...!"
"그건 사람마다 다른 거지. 어쩔 수 없어. 뭐가  중요한가는 스스로 생각할 일이고 그런 거 간섭할 생각 없다."

파벨이 말했지만 샬비는 단호했다.


"이런 생각 다 제쳐 두더라도 기사가 되고자 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다."

기사는 정예병이다. 그저 때가 되면 징병되어 일정한 기간 동안 훈련이나 전투를 치르고 민간인으로 돌아가는 병사들과는 다른 특출한 실력과 힘으로 그들이 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활약할 수 있어야만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좀 훈련받은 병사들보다 못한 햇병아리들이고."
"""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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