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2화 〉가을의 잔향. (122/220)



〈 122화 〉가을의 잔향.

"기상! 어셔, 준비해라!"

어셔는 이른 아침부터 도나르의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강제로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실전을 치르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은 도나르가 가르쳐주고 챙겨주었지만 실전을 치른다는 말을 들은  고작 하루 만에 쳐들어온 몬스터들 탓에 조금 헤매고 있으니 그와 함께 깨어난 벨카가 그에게 다가와 그를 도와주었다.


"정말  챙긴 거지?"
"잊은 거 없다니까."

소녀의 도움으로 훈련복과 가죽 보호구까지 입은 어셔는 여전히 그녀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도나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정말 괜찮겠냐?"
"실전을 하자고 한 건 아저씨잖아요?"
"그렇긴 한데. 견습 기사가  실전에서 죽는 일은 상당히 자주 있는 일이라서."
"아저씨들이 최대한 지켜준다면서요?"
"그거야 그렇다만."


어셔는 염려하는 그의 말에도 입을  다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오니 저마다 힐디스비니를 데리고 온 기사들이 그들을 반겼다.


"오늘은 챙겨야 할 녀석들도 있으니까. 각자 데리고 가야 하는 건 알지?"
"견습이라. 맡아보는 건 정말 오랜만인데."
"우리가 그럴 시간이나 있었냐? 그동안 상단 호위하기도 바빴는데."
"견습들한테 할 이야기도 많긴 한데 일단 급하니까 나중에 하자고."

그렇게 저마다 한마디 하며 기사들이 힐디스비니에 올라타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셔."
"벨카? 여기까진 왜..."


의문을 가지는 것도 잠시. 어셔는 자신의 볼에 닿은 작은 감촉에 할 말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다치지 말고 조심해야 해."

이내 소녀는 잰걸음으로 돌아가버렸다. 그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멍하니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던 볼에 손으로 대고 있으면 기사들이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부럽구만."
"우리는 저 나이 때 여자친구 사귄 녀석 있었냐?"
"없지는 않았지."
"단물만 쪽쪽 빨리긴 했지만."
"비교할  비교해라 미안하지도 않냐?"

모두가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아 어셔의 얼굴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졌을 때 도나르가 고개를 젓다 말했다.

"애 그만 놀리고 성문에 신호나 보내."

어셔는 힐디스비니를 길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보호자인 도나르와 같이 타고 가야 했다.


-쿠르륵


이렇게 가까이서 힐디스비니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본적으로 피부는 갑옷 같은 비늘이 대신하고 있었는데 관절이나 피부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비늘보다는 새와 같은 깃털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작년엔 이것보다 깃털이  적지 않았어요?"
"이제 란투아의 환경에 적응했다는 소리겠지."


놀랍게도 힐디스비니는 주위의 환경에 따라 모습이 바뀌었다. 작년 겨울만 하더라도 힐디스비니가 하얀 깃털을 빈틈없이 두르고 있어서 다른 생물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그 적응력과 강인함 덕분에 어디에서나 탈것으로 길들여진다는데. 전혀 다른 생물임에도 그 형태만큼은 말과 비슷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사람들이 이보다 작고 적응력도 약한 말을 더 귀하게 쳐주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어셔는 이곳에  뒤로 내키는 대로 풀을 뜯어 먹고 잠을 자며 겨울에는 사람들이 푹신푹신하게 깔아주는 짚더미에 파묻혀 빈둥대기 바쁜 겉모습만 멋진 말을 떠올리니 인상만 구겨졌다. 그 잘난 모습도 겨울의 힐디스비니와 비교하면 떨어지면서 사람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으니까. 때때로 거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보면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를 불만 없이 태워주는 걸 보면 나름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때 도나르의 목소리가 생각에 빠진 그를 깨웠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당분간은 내가 태워주겠지만 언젠가는 네가 직접 길들여야 하는 녀석이다."


어셔는 그의 말에 다시 힐디스비니를 보았다. 말을 탔을 때도 느끼지 못한 땅과의 까마득한 거리감과 견고한 비늘의 매끄러운 감촉. 직접 닿으니 느껴지는 생명의 고동은 너무나 커서 이질적일 정도였다. 그는  감각을 기억했다. 그래, 고작 말을 타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말은 더위에 약했고 힐디스비니처럼 강인하지도 않았다. 그는 더 멀리까지 나아갈 강한 파트너가 필요했다. 증명해야만 했다.

어셔는 그렇게 각오하는 그를 씁쓸하게 쳐다보는 도나르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내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출정식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것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성문을 열고 출발하는 것이다.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 중에는 소녀는 물론 메디아와 류드밀라도 있었다. 어셔가 마지막으로 벨카를 확인하듯 바라보고 있으니 곧 귀를 멀게 만들어버릴 듯한 호루라기 소리가 그를 강타했다.

-삐이이이익!


먼 거리라면 모를까 바로 뒤에서 도나르가 불었던 탓에 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귀가 잠깐 먹통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땅이 진동했다. 힐디스비니가 그 거체로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바람이 어셔를 향해 덮쳐오기 시작했다. 숲에서 만났던 거대한 늑대들에게 태워졌을 때와 같았다. 때문에 어셔는 골목으로 숨어드는 그림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도착한 성벽 위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사 님들 오셨습니까?"

그 와중에 한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능숙하게 피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입고 있는 갑옷은 기사들의 것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세심하게 무장한 것 같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얼굴 하나 피부 한 점 드러나지 않는 차림새였다.

"백부장, 오늘은 견습이  있으니 특히 신경 써 주기를 부탁하지."


도나르의 말투가 딱딱하게 바뀌었다.

"견습입니까?"

이내 힐디스비니에서 내려온 도나르와 기사들이 어셔를 비롯한 견습 기사들을 앞에 내세웠지만.

"...저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만."

그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기류를 알아챘는지 그의 표정은 벌써부터 곤란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셔는 옆의 녀석들을 흘깃 흘겨보았다. 이번에 실전을 나온 견습 기사는 그를 포함해 로기와 파벨, 딱 세 명이었으니까. 도나르와 다른 기사들도 하필이면 이 셋이 동시에 첫 실전을 치른다는 소식에 우려했을 정도였다. 자세한 전말을 아는 이는 몇 없지만  셋의 사이가 최악이라는 건 척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어차피 구경 정도만 해도 경험이 될 테니 진영을 이탈하거나 사고 치지 않도록 중재만 해준다면 상관없네."


기사들과 도나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대체적인 관리는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전투에 들어가면 그들은 최대한 지휘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견습들에게 몬스터들이 가지 않게 막느라 눈코  새도 없을 테니. 그나마 성벽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전투 중인 상황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끙, 어쩔 수 없군요."
"그보다 몬스터는 역시 실크 모스인가?"

도나르가 하늘을 보면 역시 커다란 날개를 펼친 거대한 나방의 무리가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예, 여름부터 가을까지 질리지도 않고 찾아오는 놈들 아닙니까?"
"이곳에 온  오래된 건 아니라서."
"그러고 보니 기사 님은 다른 나라 출신이라고 하셨지요?"


잡담을 나누는 것도 잠시 어셔들에게 마스크들이 나누어 주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답답해도 벗을 생각은 하지 마라."


실크 모스의 특징에 대해선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군말 없이 마스크를 코까지 올려 썼다. 그래도 여전히 걱정되는 건.


"정말 훈련 때 쓰던 보호구로 괜찮은 거예요?"

견습인 어셔와 그들이 입고 있는 게 훈련 때 사용하는 가죽 보호구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투구는커녕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막을 때 썼던 것과 같은 천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병사들마저 철제 갑옷을 입고 있는데 그들만 이런 걸 쓰고 있으니 불안했다. 다른 녀석들도 그와 다른 생각은 아닌지 도나르를 쳐다보았다.


"너네 생각보다 튼튼하니까 걱정 마라. 그리고 괜히 무거운 갑옷을 입고 느려지는 것보단 빠르게 달릴 수 있는 편이 좋아. 우리만 해도 완전히 판금은 아니잖냐."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무거운 갑옷보다 경갑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기사들의 갑옷도 언뜻 보면 전부 판금으로 보였지만 이곳저곳에 여유 공간이 있었고 그곳에는 작은 사슬이나 철판 따위를 엮어둔 것이 보였다.


"아무리 튼튼하게 만든 갑옷이라도 안까지 전해지는 충격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 중에 튼튼한 갑옷을 쉽게 우그러트릴 수 있는 녀석들은 넘쳐나."


그래도 아예 안 통하는 것은 아니라 튼튼한 부분은 남기되 되도록 가볍게 설계된 갑옷을 고르는 것이 기본이라며 도나르는 충고했다. 쓸데없이 튼튼하기만 하거나 너무 가볍기만 한 갑옷은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도나르, 슬슬 사정거리 안이다."
"들어와도 화살 사정거리까지는 기다리자고 괜히 따로 떨어트렸다가 막기 더 힘들어. 모두 사격 준비!"

그의 곁에 있던 오두르가 입을 열자 도나르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날고 있는 실크 모스들을 보고 신호를 주었다. 활을 든 병사들이 시위를 당기는 모습과 함께 어셔도 하늘을 보면 저 멀리 있음에도 대략적인 생김새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놈들이 하늘에서 거대한 눈처럼 보이는 무늬를 가진 하얀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이렇게 또 바글바글하게 몰려들고 어디서  번식지를 차린 것 같은데."
"예, 아무래도 건너 마을에 번식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요."

그러다 파벨이 입을 열었다.

"저건 뭐 하는 무기입니까?"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화살을 당기는 병사들 가운데 오두르를 포함한 몇몇 기사들이 슬링을 휙휙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던 슬링은 이제 완전한 원처럼 보였다.


"너는 처음 보나? 슬링이라고 줄로 간단하게 만들  있기는 한데. 꽤 유용한 무기지."


잘 사용하면 화살보다도 더 유용하고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도 편리하다며 도나르가 어셔에게 가르쳐 주었던 무기이기도 했지만.

"...너는 차라리 다른 무기를 써라."

슬링에서 이리저리 튀는 돌멩이에 여러 번 얻어맞은 도나르에게 저런 말을 듣게 된 무기였다. 그가 갑옷을 입고 다녀서 다행이었을 정도라 어셔는 아무 말도 할  없었다. 사정거리도 멀고 위력도 가장 강한 무기 중에 하나라 정말 마음에 들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어느덧 가까워진 실크 모스들의 모습이 보였다.


"더 궁금한  있다면 백부장한테 물어보고 적당히 살아남아라. 발사!"

그가 급하게 말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일제히 쏘아진 화살과 슬링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빽빽하게 늘어선 검은 비에 놈들의 날개가 부서지며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간단하게 격추되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놈들이 그 무거운 몸을 그대로 그들을 향해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더 빠르게 다가오는 놈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물을 친듯한 여러 개의 눈, 복슬복슬해 보이는 놈들의 몸에는 독 가루가 가득하다.

더욱 기괴한 것은 살아남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제 몸을 던져 그들에게 들이받는 놈들의 행태다. 놈들의 거체와 그 망설임 없는 행동에 압도된 찰나.

"뭐 합니까!? 방패 뒤에 숨으십시오!"

그들을 맡았던 백부장이란 남자가 그들을 반쯤 강제로 이끌고 사람들이 몰려든 방패 뒤로 숨었다. 그와 동시에 방패가 부서질 듯 커다란 소리가 울리고 방패를 든 이들의 앓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갑자기 머리 위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에 머리를 숙이면 쐐액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실크 모스의 거체가 스쳐 지나가고 성벽의 바닥에 부딪혀 형편 없이 으스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조금만 늦게 숙였어도 저것에 부딪힐 뻔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사방에서 놈들이 몸을 부딪히는 듯 작게나마 성벽을 울리는 충격들과 소리가 쿵쿵 울렸다. 그보다 기분이 나쁜  시야를 가리는 새하얀 안개다. 실크 모스의 인분이 성벽과 부딪히며 충격으로 퍼진 것이다. 눈에 들어가서 좋을 게 없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온몸을 가린 상태인 그들에게 영향은 없었다. 이내 놈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줄어들었을 무렵. 안개 너머에서 도나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패 교체하고 서둘러! 아직 반쯤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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