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가을의 잔향.
당시엔 어영부영 넘어가버렸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그날은 참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 메디아의 어머니의 방에서 마법이 걸린 지도를 발견하고 본의 아니게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고 하지만 여전히 어셔는 카발리스트가 정확히 어떤 종류의 마법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책에서도 그에 대한 정보가 정말로 드물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마녀들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자들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그러다 다시 나들이를 갈 기회가 생겨서 그때 보았던 터널을 또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호수까지 갈 수 없었다. 모두가 터널을 통해 그 호수로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터널이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어른들에게 터널을 막아버린 것인지 물어보았었지만.
"원래부터 막혀있었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난리도 아니었잖냐."
그들을 따라갔었던 근위대는 분명 그들이 터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같이 들어갔는데도 막다른 벽만 나오고 메디아와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때문에 근위대는 처벌을 받을 뻔하고 다른 기사단까지 모두 소집되어 영지를 수색했었다고.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난 것이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저희는 분명 그 호수가 있는 곳까지 갔었다고요."
"그래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거지. 근위대가 실수한 것도 아니고 너희들은 그냥 터널을 지나갔다고 하고."
어셔는 문득 터널을 지나간 끝에 잠시나마 마주쳤던 드래곤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들이 그런 일을 겪게 된 건 그 드래곤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걸 어른들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정말 잠깐의 환상처럼 느껴졌던 그 일을 말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희도 기억나지? 그 드래곤 말이야."
"응."
"그거 꿈 아니었어?"
"저만 기억하는 게 아닌 걸 보면 역시 단순한 환상은 아니었나 보네요."
직접 일을 겪었던 그들도 자신들이 드래곤을 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데. 어른들이라고 믿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드래곤이 그곳에 머물렀다는 증거조차 없었으니까.
"그런데 너는 그때 어떻게 드래곤한테 다가가서 머리를 만져볼 생각을 했냐?"
아직도 그날 보았던 것이 진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 해도 드래곤의 코앞까지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던 메디아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네가 그랬으면서 모르면 어떻게."
"하지만 어쩐지 위험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는걸요."
정작 당사자도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 일은 그들만의 비밀이 되었다. 그날로부터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
어셔는 이제는 손에 꼭 맞는 가검을 들고 눈앞의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의 대련 상대는 언제나처럼 로기였다.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지고 알만큼 아는 상대. 하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적의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번에 먼저 검을 휘두른 것은 로기였다. 그의 검이 휘어지듯 번쩍이며 머리를 노리는 순간 어셔는 곧바로 검을 치켜들어 검을 막았다. 하지만 로기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걸 1년간 검을 맞대며 산 어셔는 알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이 막힘과 동시에 공격을 막은 그의 검을 타고 놀듯 로기의 검이 휙 돌며 그의 반대쪽 머리를 노린다. 하지만 이제는 어셔도 그런 수법을 알고 검의 위치를 바꿔 붙이며 가까이 접근해서 녀석이 검을 움직이지 못하게 크로스 가드까지 맞닿도록 검을 맞대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로기의 손이 그의 손을 붙잡으려 든다. 검을 들고 있는 상태로 그를 붙잡아 제압하려는 것이다. 저런 수법에 몇 번이고 당했던 어셔는 손을 피했다.
"제발! 한 대만! 좀! 맞아라!"
그리고 겨우 잡아낸 기회.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기를 쓰고 로기에게 공격을 성공시켜보려 했으나 역시 좀처럼 쉽게 로기의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
"악?!"
오히려 공격을 하던 중 어셔는 발을 걸고넘어지는 무언가에 중심을 잃고 넘어져 연무장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그래도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로기의 가검이 그의 목에 닿아있었다.
"자, 거기까지."
그와 동시에 대련의 끝을 알리는 도나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셔는 제 기분이 어떻던 억지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대련을 마치고 나면 도나르는 항상 그에게 고쳐야 할 점이나 실수를 가르쳐주었으니까.
"일단은 확실히 많이 나아졌다. 그럭저럭 상대의 움직임도 읽을 줄 알고 임기응변도 늘었어."
칭찬은 기분 좋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 집중하면 전체적인 상황을 잘 못 보는 건 여전하잖냐."
이렇게 바로 핀잔을 주니까.
"하다 보면 계속 그렇게 되는 걸 어떡해요."
"어지간하면 고쳐라. 너는 싸워서 이기는 것보단 살아남는 것과 지킨다를 전제로 싸워야 하니까."
어셔는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사실인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로 싸워서 진다면 그 어떤 것도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건 도나르가 항상 되새기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악을 써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괜히 기합 같은 걸로 힘 빼지 말고. 그럴 시간에 더 냉정하게 생각해라."
"윽, 알았어요."
도나르의 설교 끝에 드디어 대련은 마무리되었다. 로기에겐 따로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도나르가 아니라 샬비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셔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샬비에게 이런저런 말을 듣고 있는 로기를 잠깐 흘겨보고 있으니 추위에 으슬으슬 떨려오는 몸을 느꼈다. 훈련을 하는 중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가만히 있으니 잊고 있던 추위가 찾아왔다. 낮에는 아직 더웠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금방 날이 추워졌다.
"그러고 보니 너도 이제 슬슬 실전을 치러야 할 때가 됐나?"
"실전이라고요?"
그러다 들려온 도나르의 말에 어셔는 놀라 되물었다.
"그래, 키는 아직이지만 체력도 되고 나름 센스도 생겼으니까. 몬스터들을 상대해봐야지 않겠냐?"
"키 이야기는 빼요."
어셔는 잠깐 망설였지만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는 소녀를 데리고 돌아다녀야 하는 처지다. 사람을 만날 일도 많겠지만 몬스터를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직접 싸워보는 것도 좋으리라. 마침 로기와 샬비의 이야기도 끝나 샬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도나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너희는 평소처럼 먼저 씻고 올 거냐?"
"네."
그들은 훈련을 봐줄 뿐이라 딱히 땀을 흘리진 않았으니 목욕은 나중에 다른 기사들과 훈련하거나 몬스터들과 싸운 뒤에 해도 늦지 않지만 어셔와 로기는 훈련을 하느라 땀투성이였다. 샬비와 도나르는 먼저 밥을 먹으러 떠나고 어셔는 몸을 씻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면서 힐긋 자신의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로기를 보았다. 저런 녀석과 동행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중간까지는 길이 겹치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로기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결국 도착한 서로의 방이 바로 이웃이라는 게 거슬렸지만 어셔는 방문을 열었다.
"어서 와."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현관 앞에 다리를 껴안고 앉아 있던 붉은 소녀, 벨카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반긴다.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된 로기가 문 손잡이 꾹 쥐고 놓지 못했지만 이미 그는 어셔의 안중 밖이었다. 소녀는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해둔 물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꼼꼼히 닦아주었다. 그냥 욕실에 들어가 세수만 해도 될 일인데 소녀는 그가 훈련을 하고 돌아오면 이렇게 그의 얼굴을 닦아주곤 했다.
"걔네들이랑 먼저 먹지 그랬어."
그러고 있으면 괜히 틱틱거리는 건 어셔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메디아와 류드밀라와 먼저 식사를 하면서 그를 기다려도 문제는 없을 텐데.
"하지만 난 어셔와 더 같이 있고 싶은걸."
"...빨리 씻고 나올게."
그렇게 현관 앞에서 잠깐 대화를 나눈 어셔는 바로 옆의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사실은 좀 더 대화하고 싶었는데. 계속 그러다간 소녀의 상냥함에 그의 목적마저 녹아버릴까 피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자리를 피하곤 했다. 어셔는 땀에 푹 젖은 옷 위에 덧대 입은 가죽 보호구를 벗으며 자신이 원래 숲을 떠나고자 했던 이유를 되새겼다.
"어셔, 그 녀석 아직도 여행을 포기하지 않은 거냐?"
샬비와 함께 먼저 만찬장에 도착한 도나르는 그의 물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같이 지낸지 꽤 됐는데도 그만둘 생각이 안 보이더라."
사실 도나르는 어셔와 함께 지내며 여행을 다니려 하는 그를 몇 번이고 설득하려 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여행 같은 건 정말 허울만 좋은 일이었다. 진짜로 한다면 위험한 몬스터들과 좋지 않은 마음을 먹은 이들의 사냥감이 되기 십상이다. 혼자 여행을 해도 위험한데 어셔에겐 벨카라는 일행이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길지 눈에 선했다.
"여행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열심히 설명해봤는데. 애가 고집이 얼마나 센지."
"그 녀석 여자친구에게도 설득해 달라고 말해봤냐?"
"안 해봤겠냐?"
그도 어셔를 설득하려면 벨카를 먼저 설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기에 시도는 해봤다.
"아무래도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 같더라."
그녀가 어셔를 설득해 주기를 바라며 넌지시 말해보았지만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말해주더라도 결말을 직접 보기 전까지 어셔는 만족할 수 없을 거야."
벨카는 돌려 말했지만 그건 설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봐. 실전을 나간다고 하면 겁이라도 좀 먹을 줄 알았더니. 애가 지킬 생각은 하면서도 여행을 그만둔다는 소리는 기색도 안내."
"아직 실전이 어떤지 몰라서 그렇겠지 이번에 몬스터들이 쳐들어오면 한 번 데려가 보자고 분명 겁먹고 그만둔다고 하겠지."
샬비는 괜찮을 것이라 이야기하며 그를 위로했지만 도나르는 탐탁지 않았다.
"네가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잘 몰라서 그래."
평소에는 무난한 성격이지만 녀석이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1년간 그를 가르치며 도나르가 살펴본 바로는 적어도 검술에 한정해선 당연히 더 오랫동안 배운 로기가 압도적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은 어셔가 훨씬 더 뛰어났다. 실제 적으로 만난다면 오히려 로기 같은 녀석보다 까다로운 타입이 어셔였다. 일부러 힘든 훈련을 강행해도 꾸역꾸역 따라오는 모습을 샬비도 봤어야 했는데.
"그래도 실전은 실전이잖냐. 그런 놈들이 친절하게 한 마리씩 달려드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유망한 녀석들이라도 한 번 경험해보고 그만둔 녀석들이 얼마나 많아?"
샬비의 말이 딱히 틀린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도나르도 알고 있었다. 기사를 따라나온 견습 기사들이 첫 실전에서 죽는 건 이야깃거리도 아니었다. 경험 있는 기사들이 제대로 보호를 해줘도 그 모양이다. 때로는 살아남은 견습 기사라 해도 정신문제에 시달리거나 동기의 죽음을 보고 기사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그런데도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네."
그런 걱정을 하는 게 그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저희와 같이 살아도 좋을 텐데 말이에요."
정식으로 그의 아내가 된 시프 또한 여행을 하고자 하는 아이들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어셔는 벨카만큼은 아니지만 그녀에게도 약했기에 시프도 진지하게 그만두라고 이야기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건 안돼요. 찾아야 할 사람들이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어셔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게다가 녀석이 어떤 마음일지 모르는 것도 아니라서 더 문제야."
도나르는 어셔가 그러는 이유를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벨카가 차마 어셔를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제 그들과 같이 지내는 모습만 보면 나름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건 확실한데 말이다.
"아오! 또 살이 찝혔어!"
어셔는 씻기 위해 옷을 벗다 살을 꼬집는 느낌에 콩콩 뛰며 아픔을 떨쳐내려 애썼다. 훈련을 할 때 입는 옷은 가끔 이렇게 말썽을 일으키고는 했다. 옷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가죽 보호구와 연결되는 부분들이 이렇게 살을 집어서 예상치 못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가 옷과 씨름하고 있을 때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