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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8화 〉골목을 따라서. (118/220)



〈 118화 〉골목을 따라서.

어셔가 소녀들과 놀다 걸을 힘도 남아나지 않았을 무렵. 자신들을 찾아온 아이올로스와 도나르들을 발견하고 의아했지만 데리러 와준 것 같아 반가웠다.

"그래서 너희는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냐?"
"어떻게 왔냐고 해도. 그냥 터널을 따라왔는데요?"


도나르가 물었지만 어셔는 도나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냥 터널을 지나왔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냐?"

미묘한 기색의 도나르를 보고 어셔는 무언가 이상하다고는 느꼈지만 지금은 다른   신경 쓰였다.

"아저씨, 혹시 덮을 만한 거 있어요?"
"있기는 한데. 힐디스비니만 급하게 끌고 오느라 지금은 이것밖에 없는데."

그가 어셔에게 내민 건 그가 황야에서 마차를 끌 때 갑옷 위에 덧입던 천이었다. 혹시 몰라 빨아두기는 했지만 황야를 오랫동안 돌아다닌 탓에 천은 여전히 붉은 기가 도는 모래색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요. 자, 벨카."
"응, 고마워."

어셔는 그에게서 천을 받아들고 제 뒤에 숨어있던 소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러자 은근히 이쪽을 바라보던 시선들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도나르는 왜 그런 걸 부탁했는지 알 수 있었다.

"너희들 말이다."
"크흠."


그가 황당하다는 듯 제 동료들을 보자 이곳저곳에서 민망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보다 어린 소녀에게 그러고 싶은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다고 뭐라 하기엔 시선이 가는 것까지 일일이 통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자신이 타기 전에 벨카와 어셔를 힐디스비니 위에 태우고 있으면 류드밀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기 저도 같이 태워주실  있어요?"
"왜? 넌 메디아네 아빠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나?"

그녀는 도나르에게 물었지만 먼저 답한 것은 어셔였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미안."


어셔는 아이올로스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고 류드밀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아빠라 해도 그 정도면 무서웠다. 결국 도나르는 제 앞에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태우고 가야 했다. 힐디스비니의 덩치 덕분에 그래도 자리가 넉넉해서 다행이었다.

"...."


메디아는 실컷 놀 때는 좋았지만 물에 젖은 옷과 머리카락이 몸에 달라붙는 느낌이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힐디스비니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어서 그렇게까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놀러나간 그녀가 늦었다고 데리러 올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도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정작 그는 이렇게 데리러 와주었는데.

그녀가 어색한 마음에 그의 품에 편히 기대지도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나마 힐디스비니 위에서 중심을 잡고 있을 때였다.

"엣취!"

아직 여름 기운이 남은 날이었지만 슬슬 가을에 닿아 여름이 떠나간 밤은 상당히 추웠다. 때문에 으슬으슬 떨려오는 몸과 함께 메디아는 재채기를 해버리고 말았다. 그때 자신의 어깨 위에 닿는 느낌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건 그녀의 아버지가 입고 다니는 외투였기 때문이었다. 천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어른에게 맞추어진 외투는 메디아에겐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의 체온이 남은 옷은 확실하게 그녀에게 온기를 전하고 있었다.

메디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면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앞만을 바라보며 힐디스비니를 몰고 있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외투를 덮어주었단 것을 시치미 떼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그가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그녀는 깨달았다. 예전이었다면 그런 그의 모습에 정말로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고 약간은 무서워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알 수 있었다.

그에겐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겁을 먹었을 뿐이라는걸. 메디아는 잠깐 눈을 감고 어두운 서점 안에서 할아버지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그가 얼마나 그녀의 어머니를 사랑했는지 모른다면 그건 바보였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그녀도 그 빈자리에 외로운 마음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기억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을 그가 얼마나 괴로울지 짐작도 할  없었다. 그녀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메디아가 혼자 힐디스비니 위에서 중심을 잡는  멈추고 그의 품에 기대자 그녀의 추위가 전염된 것처럼 잠깐이나마 그의 몸이 떨리는 것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밀거나 떼어 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밤 기운에 차가웠던 몸은 금세 따스함에 물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메디아."

아이올로스는 돌아오는 길에 그의 품에서 잠들어버린 메디아를 그녀의 방 침대에 눕히며 그 이름을 읊조려 보았다. 옷이 젖은 상태로 잠들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기에 이미 하녀에게 갈아입히라 시킨 후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품에 기대어 잠들었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언제나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고 그에겐 의지하는 일이 드물었던 제 딸이었는데. 어째서.

"...그 아이들인가."

그러다 떠오른 건 사샤와 너무나 닮은 소녀와 어셔였다.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이 모든 변화가 그들이  영지에 온 뒤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는데 그의 딸은 이제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아이올로스가 씁쓸한 마음으로 메디아를 쓰다듬고 있었을 때였다. 그의 옆에서 뻗어 나온 손이 메디아의 이마를 어루만진 건. 그것은  하나 쥐어본 적 없는 여인의 손이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딸의 방안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그가 경계하며 고개를 든 순간. 그의 경계는 허무하게 녹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찌 잊을  있을까? 독특한 색채의 붉은 머리카락과 바람에라도 날아갈까 언제나 안아주고 싶었던 가녀린 몸. 그의 딸과 같은 자수정과도 같은 눈동자까지. 그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래전에 그를 두고 먼저 떠난 그의 아내였으니까.


"사샤."

그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슬프게 미소 지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분명 환상이었다. 환상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은 사람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달빛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어찌 이리도 선명하고 섬세한가? 드디어 그의 손이 그녀의 볼에 닿았을 때 느껴지는 감촉에 그녀가 환상 같은 것이 아닌 진짜라는 걸 알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아내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럴 리가 없을 터였다. 죽은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앞에 그녀가 서있는가? 이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그는 이미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의  또한 그를 끌어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향이었다.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를 흉내  것도 아니었다. 구름 하나 방해하지 않아 달이 태양이 자리했던 중천에 서서 땅을 굽어보는 밤이었다.

소녀는 복도의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누군가 다가오자 소녀는 그제야 말없이 하늘을 보는 것을 멈추고 자신에게 다가온 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둘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서로의 눈동자가 다르지만 않았다면 나이만 다를 뿐 같은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했으리라. 먼저 입을 연건  더 성숙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그를 만나게 해주셔서... 정말로."

그녀가 감사의 말을 입에 담자 소녀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다시금 하늘을 보았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어. 그걸 원한 건 내가 아닌 그였으니까."
"혹시나 했지만 그이는 정말 당신과 거래를 했던 거군요. 당신 같은 분을 알게 되더라도 거래만큼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었는데."
"그만큼 그리웠던 게 아닐까."


소녀의 말에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늘은 점점 더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시간이야."
"그이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이윽고 태양이 떠올랐을  그 자리에 남은 건 소녀뿐이었다. 소녀는 잠시 그녀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응, 하지만 그를 좋아할 수도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소녀마저 떠나간 자리엔 아침 햇살과 함께 떠오른 작은 먼지들만이 맴돌았다.

"꿈, 이었나."


아이올로스는 잠에서 깨어나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지 않은 그의 방이었다. 하지만 그런 천장조차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무리 물을 마시고 마셔도 사라지지 않았던 타는 듯한 갈증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옆을 바라보았다. 몸은 땀이 말라붙어 찝찝하고 무거운데 그 온기와 향기, 그 무게감과 감촉까지 모든 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에 쓸쓸함을 되새기면서도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와 한없이 닮은 소녀와의 거래를 떠올렸다. 그녀와 같이 붉게 물든 펜던트를 들고 했던 말을.

"거래를 하고 싶다."


그의 아내는 항상 이야기하곤 했다. 특별한 마녀에겐 단 한 번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지만 마녀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물론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하지만 아이올로스는 그럼에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참을 수 없었다. 바로 앞에 그녀와 똑닮은 소녀가 있었기에 더더욱. 그래서 그는 거래라는 이름으로 소원을 빈 것이었다.


"사샤를, 알렉산드라를 다시 보게 해다오."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죽은 자신의 아내를 만나고 싶었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 닮은 이를 통해 보는 그녀의 환상보다도 진실된 그녀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것이 마녀의 마법이라 해도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일이었다 해도. 그녀가 말해주었으니까. 미움받는다 해도 특별한 마녀는 마법에 의한 족쇄 때문이라도 제물이 된 생명을 위해서라도 소원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정말 그걸로 상관없어?"


그것으로 좋았다. 기껏해야 그녀를 닮은 소녀를 안는다고 해도 소녀는 사샤가 아니었으니까. 결국 소녀는 그가 거래의 대가로 내민 새장 속의 새를 받아들었다.  새는  남지 않은 고대종으로 비싼 값에 거래되던 새였지만 소녀는 잠시 작은 새가 부리는 재롱을 받아주다 창밖으로 날아가는 새를 붙잡지 않았다. 결국 소녀는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아이올로스 님,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오늘은 그냥  더 자고 싶었다. 꿈속으로 빠져드는 그의 귓가에 어디선가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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