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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화 〉골목을 따라서. (117/220)



〈 117화 〉골목을 따라서.

메디아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터널의 안으로 들어왔으니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곳에 붉은 꽃으로 가득한 들판이 있다면 어떨까? 그녀가 꽃 하나에 손을 가져다 대자 살랑이며 스치는 꽃잎의 감촉마저 생생했다. 붉게 빛나는 이상한 모양의 꽃이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얇은 꽃잎과 뾰족하게 가시를 세운 것 같은 꽃술까지. 그녀는 이런 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여기는..."

분명 햇빛 같은 건 들지 않는 곳일 텐데 그녀와 들판의 모습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분명 터널 안으로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녀의 친구들은 어디로 가고 어찌하여 그녀 혼자 이곳에 있는가? 주변을 더 둘러보았지만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밤처럼 새카만 하늘만 보일뿐 어디에도 출구 같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을 벗어나고자 계속 걸어갔지만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들판의 모습에 불안해졌다.

그녀는 걸음을 점점 빨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혼자 남아 빠져나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쉬지 않고 달렸으나 아무리 달려도 그녀는 들판에서 벗어날  없었다.

"류다! 벨카! 어셔!"

함께 터널에 들어왔던 친구들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러보지만 그 어디에서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 어디로 간 건가요."

결국 사무치는 외로움에 그녀가 들판 한가운데에 주저앉은 순간이었다. 붉은 실이 시야 한구석에 스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 그녀의 손을 붙잡은 건.

"벨카?"


그 손길의 주인일 것이라 생각하고 메디아가 고개를 들었을  강렬한 빛이 그녀의 눈을 감게 만들었다.


"읏?!"

잠시 눈을 깜빡이며 정면에서 쏟아지는 빛을 피하고 메디아가 가장 먼저 느낀 건 그녀의 양손을 잡고 있는 온기였다. 옆을 보면 그녀와 함께 터널로 들어갔던 이들이 모두 함께였다. 방금 전의 일은 그저 꿈이었던 것일까? 메디아는 그 잠깐 사이에 졸았던 것이라 여기다 문득 자신의 옆에 있던 이들이 아무 말도 없다는  깨달았다.

"다들 왜 그러시나요? 무슨 문제라도."
"메, 메아. 아, 앞에... 앞에!"

그러자 그녀의 옆에 있던 류드밀라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메디아는 대체 뭐가 문제인가 싶어 앞을 보면 다시 강렬한 빛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비록 저물고 있는 태양이라 해도 그 빛은 여전히 똑바로 바라보기엔 강렬한 빛이라 메디아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들의 앞에 있던 것을 알아보고 굳어버렸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결코 이곳에 존재할 리 없는, 있어선 안 될 존재가 저물어가는 태양을 뒤로하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노을빛을 산란하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순은의 비늘. 그들보다 머리 몇 개는 커 보이는 덩치. 날카롭게 벼린 검과도 같은 날카로운 손톱. 기다란 목과 그보다 긴 꼬리. 활짝 펼치면 그들을  번이나 감싸고도 남을 커다란 장막과도 같은 날개.

"드래곤..."

그건 그 어떠한 몬스터보다 재앙이라 부르기에 마땅한 존재였다. 무기질적인 파충류의 자안 앞에서 그들은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긴장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셔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나마 가검의 손잡이를 잡고는 있었지만 뽑고자 해도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날을 날카롭게 연마한 장검으로도 저 비늘에 상처하나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날은커녕 둔기로 쓰기에도 애매한 가검으로 무엇을 할  있을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드래곤의 앞에  있다는 건 남은 것이 죽음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드래곤의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면 모를 리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다 어셔는 메디아가 그들의 손을 놓고 드래곤에게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아!  하는 짓...!?"


류드밀라도 그 모습을 발견했는지 경악했지만 이미 그녀는 드래곤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자체만으로 무기나 다름없는 몬스터의 앞에 서 있는 메디아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그 미래를 짐작할  있었을 터였다. 다음 순간 그녀가 홀린 듯이 손을 뻗었을  드래곤이 순한 양처럼 그녀의 손에 머리를 갖다 대지 않았다면.

"뭐?"


이내 자연스레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메디아의 행동에도 드래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오히려 반기는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았다.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다. 저것이 정말  어떤 몬스터보다 흉포하며 잔학하기로 유명한 드래곤이 맞단 말인가? 황혼 녘의 태양빛 속에서 메디아는 손길을 거두지 않았고 드래곤은 끝까지 얌전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태양이 완전히 저물었을 때 드래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은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지금껏 본 것이 거짓말처럼. 다만 그들이 이곳에 꽤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는 건 확실했다. 막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노을이 지던 하늘에는 더 이상 태양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아직 밝은 하늘이 저 너머에 태양이 있음을 알려주었지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는 건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이 전조도 없이 사라지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어셔였다.

"...돌아갈까."
"...그럴까요?"

어셔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했지만 그들은 따로 트집을 잡는 일 없이 수긍했다.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 지쳐있었으니까.


"그런데 여긴 또 어디야? 처음 보는 곳인데."

드래곤이 사라진 뒤에야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푸른 들판이 있었다. 메디아가 잠깐 빠져들었던 꿈과는 달리 이곳저곳에 크고 작은 호수가 있는 들판. 근처에 민가 같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성벽이 이곳이 영지의 안쪽이라는 것만을 알려줄 뿐이다.


"아마도 개발 금지 구역인  같아요."
"그런 곳도 있어?"
"네, 영지의 안쪽이라 해도 무작정 개발해버리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니까요."

어셔는 그녀의 말을 듣고 벨카와 함께 호수로 다가가 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드래곤이 환상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곳에는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남아있는 건 드래곤의 모습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작은 호수의 모습이다. 들판의 이곳저곳에 노을을 담고 빛나는 호수들이 땅속에 숨겨진 하늘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깐 손을 담그자 역시 차가운 감촉이 그의 손을 감싼다.

"그런데 여긴 왜 물만 있어? 이렇게 물이 많으면 물고기 같은  살 것도 같은데."


하지만 그가 아는 호수와는 달리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맑기만 할 뿐 변변찮은 물고기 하나 보이지 않는 호수가 어셔는 의아했다.


"물고기라니. 성지에만 있다는 것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메디아와 류드밀라의 시선이다. 어셔가 무안한 마음에 괜히 호수에 담근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내 호수가 크게 일렁인다.


"기왕 이곳에 왔으니까.   놀다 갈까요?"
"나는 좋아! 또 언제 호수 같은 곳에 오겠어?"

메디아와 류드밀라가 치마를 걷고 호수로 들어온 것이다. 호수가  넓긴 해도 기껏해야 종아리 언저리가 끝이니 류드밀라에게도 문제는 없었다.


"으앗?! 벨카?"

그때 자신의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어셔가 놀라 옆을 보면 어느새 그의 곁에 서있던 벨카가 물에 적신 손으로 그의 볼을 만지고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소녀의 금빛에는 즐거운 기색이 맴돌았다. 그에 어셔도 질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손에 물을 묻혔다.


"히읏!"


그가 그 손으로 그녀의  주변에 물을 묻히자 벨카가 차가운 감촉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켁! 갑자기 뭐야!?"


어셔는 갑자기 들이닥친 물벼락에 물이 들이친 곳을 보면 그곳에는 메디아와 류드밀라가 불만스럽게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정말, 이곳에 두 분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시라구요?"
"그런 건 너희 둘만 있을 때 하란 말이야."
"야, 너희 진짜!"


결국 어셔는 자신의 손에 물을 퍼담아 그녀들에게 뿌렸다. 그들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과 피곤한 몸도 잊고 어느새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놀기 바빴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분명 메디아 아가씨를 따라 터널로 들어갔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올로스의 호통에 전령으로  기사가 고개를 숙이지만 그럼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분명 근위대는 메디아들의 호위에 전력을 다했다. 단장인 그레고리가 기사 몇을 이끌고 직접 터널의 안쪽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터널의 안은 어두웠기 때문에 횃불을 들고 들어가 비밀문이나 아이들이 다른 곳으로 갈만한 크기의 통로가 있는지 살폈지만  어디에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이 막다른 터널 벽을 뚫고 들어가기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면 땅으로 꺼졌다는 건가!"

정작 소리치고 있는 아이롤로스도 그들이 결코 농땡이를 피우거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메디아가 사라졌다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모르기에  문제였다.

"1 기사단부터 4 기사단까지 최소한의 경계 인원을 제외하고 기사들을 전부 소집해라! 얼른!"

도나르는 때아닌 소집령에 이번에도 몬스터의 습격이라 생각했지만 메디아를 비롯해 그녀와 함께 있던 아이들까지 단체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에 놀라고 있었다.  말은 어셔와 벨카도 사라졌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는 재빨리 정비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섰다. 그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는 아이올로스는 언제나 냉철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초조하게 그들에게 수색 명령을 내렸다.


"수색이라니. 우리 여기 지형은 전혀 모르지 않아?"

오두르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아직 이 영지의 구조를 알지 못했다. 지도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걸 아직 가신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그들에게 보여줄 리도 없었으니 도나르는 난감해 하다. 그에게 다가갔다.


"아이올로스 님."
"무슨 일이지?"


그가 말을 걸자 신경질적으로 답하는 아이올로스의 모습에도 도나르는 침착하게 말했다.


"저희는 길을 모르니 안내해 줄 사람이 한 명 필요합니다."
"하아, 그렇군. 자네들은 아직 이곳을 잘 모를 테니."

그는 급한 기색은 지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은 듯했다. 도나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납치 같은 것이 아니라면 혹시 짐작 가는 곳이 따로 있습니까?"

도나르는 메디아와 류드밀라의 성격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어셔와 벨카가 어떤지 알고 있었다. 특히나 샛길도 없는 막다른 동굴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면 마법에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이라는  분명 접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소녀가 마녀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 위험한 것이었다면 벨카가 아이들을 그곳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었을 리가 없었다.


"짐작 가는 곳인가."

아이올로스는 잠깐 생각에 빠진 듯하다 떠오른 것이 있는 듯 준비되어 있던 힐디스비니에 올라탔다. 그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그들은 그대로 어디론가 향하는 그를 뒤쫓았다.


"보통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힐디스비니까지 길들였던 건가?"


샬비의 감탄에 도나르도 동의하는 바였다. 힐디스비니를 길들였다는 건 최소한 기사로서 모든 자격을 갖추었다 보아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말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올로스는 힐디스비니를 재촉하며 몰아붙였다. 벨카라는 소녀는 마녀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 또한 마녀였다. 그 말은  메디아 또한 마녀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 터널은 그의 아내가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던 시절 자신만의 비밀 장소라며 알려주었던 곳.

만약 그곳에 마법이 걸려 있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마녀인 제 딸과 소녀가 이끌렸다면 그곳은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그녀는 분명 그곳이 가장 소중한 곳이라 이야기했었다.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곳은 분명. 그들이 힐디스비니를 타고 도착한 곳은 도시가 발달한 다른 구역과는 다르게 간간이 나무가 자라고 풀이 가득한 곳이었다. 오래전부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순찰만 돌릴 뿐 정말 급하지 않다면 개발하는 것이 금지된 구역.


아이올로스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과거의 추억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사샤."

그는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그가 끼어들 자격 같은 건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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