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골목을 따라서.
"나는 그때만 해도 꼼짝없이 사샤를 잃는 줄로만 알았다."
드발린은 싸구려 술로 목을 축이며 말을 이었다. 사샤, 어느새 그의 삶이 된 딸. 술로 모든 걸 잊고 싶어도 자꾸만 떠올랐다. 술로 모든 걸 잊어도 잊히지 않는,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러면 어머님은 어떻게."
그는 안타까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 메디아를 보며 웃었다. 사샤의 삶이 비극만은 아니었다는 증거가 그의 앞에 있는데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랴.
"그 후에 몇 년이 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구나."
그럴 만도 했다. 그는 하나뿐인 딸을 잃고 벌이도 얼마 되지 못하는 주제에 언제나 독하기만 한 싸구려 술로 나날을 지내었으니. 당시의 영지는 누구도 남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몬스터들은 수시로 쳐들어왔지만 직접 나서서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영지를 지켜야 할 기사들은 안전한 곳에서 징병 된 병사들을 지휘하기만 할 뿐 직접 나서는 일이 없었고 줄초상이 끊이지 않았다.
그나마 남은 이들에게 요령이 생겼을 무렵에는 그런 일도 줄었지만 기사들의 횡포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영지의 주인이 그 모양이니 그를 따르는 가신들이라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영지민들에겐 영주보다도 그들이 더 공포스러운 존재이기도 했다. 올바른 말을 하는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그나마 기사답던 이들은 거의 다 죽었다. 그것이 어떤 이들의 소행인지는 쉬쉬할 뿐 알만한 이들은 알고 있었다.
"크흐, 빌어먹을 녀석들."
술집에는 언제나 분을 참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
"또야! 또 그 기사 놈이 질리지도 않고 아내를 범하러 왔다고!"
애통한 자들의 목소리.
"어쩔 수가 없잖나. 우리는 힘이 없는데."
포기한 이들의 목소리가 함께였다. 이럴 때만큼은 그도 이 자리에 조심스레 끼어들 수 있었다.
"이 주점도 사람이 많이 늘었군."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중얼거리자 맞은편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늘만 하지."
그는 구두장이였다. 그의 딸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이었기에 드발린은 사샤를 잊고자 하면서도 그와 함께 마시며 그녀를 떠올렸다. 그들은 서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만큼 힘들고 괴로웠던 시기였다. 그날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야! 들어봐! 영주의 목이 성문에 걸렸어!"
쾅! 문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점의 문을 열고 난입한 남자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헛소리는 딴 데 가서 해."
"그런 환상까지 볼 정도로 영주를 죽이고 싶었냐?"
"누군들 안 바라겠냐."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그럴만하지 않은가? 수십 년이란 세월은 그들을 지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땅의 영주되는 자는 부패할지언정 무능하지는 않아서 반란의 기색이 보이면 즉시 숙청을 당했고 영지민들이 일으킨 봉기조차 철저하게 말려 죽여 처리했다. 그런 자를 아무런 징조조차 없이 누군가 반란을 일으켜 죽였다는데 그 누가 믿을까?
"이 사람들이 진짜라니까 그러네! 정 못 믿겠으면 직접 봐! 이미 많은 사람이 성문에 모였으니까!"
그리고는 휙 떠나버린 그의 모습에 그들은 순순히 믿지 못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성으로 향했다.
"저 말이 진짜라고 생각하나?"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지 않나."
친구와 말을 나누면서도 그들은 성문으로 걸어가자 이미 많은 인파가 그곳에 자리 잡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정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알았다. 모두가 볼 수 있게 성문의 꼭대기가 아니라 밧줄로 묶어 좀 더 아래쪽에 매단 영주의 목을 그들은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란은 진짜로 벌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을 때.
언제나 굳게 닫혀 있는 모습만 보았던 성의 문이 열리며 반란을 일으킨 이들의 모습이 드러나자 모두가 경악했다. 처음엔 선두에 선 이를 알아본 이들은 소수였지만 점차 퍼져나가 모두의 귀에 그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건 그 누구도 아닌 아이올로스, 네 아비였으니 말이다."
"세상에. 그렇다는 건..."
그래, 폭정과 수탈을 일삼던 영주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들의 손에 최후를 맞았다. 그 누가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그런 자가 자신의 아들에게 고작해야 하룻밤 사이에 최후를 맞을 거라고. 그리하여 아이올로스가 새로이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모두는 전 영주의 폭거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조차 누릴 시간이 없었다. 영주가 되기 위해 자신의 친아비마저 죽여버린 그의 비정함에 공포에 떨어야만 했으므로. 하지만 그 시간도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올로스는 그의 아버지가 행했던 모든 악습을 철폐하고 방탕한 생활과 수탈과 횡포를 일삼던 기사들을 숙청하며 금지했다. 그는 영지민들에게 과도하게 부여되던 세금 또한 줄이고 하나둘씩 개선해나갔다. 결정적으로 그에 대한 공포가 줄어든 이유는 그의 아버지에게 끌려갔던 많은 여자들을 원래의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만큼은 기뻐할 수 없었다.
모두의 딸 혹은 아내가 돌아왔는데. 그의 딸만큼은 그에게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괴로움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만 같았다.
"아빠."
그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사샤?"
듣지 못한지 오래되었지만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던 그 목소리였다. 그가 퍼뜩 고개를 들었을 때 볼 수 있었던 건 이제는 소녀라기보다 여인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그의 딸이었다.
"사샤. 사샤! 왜, 왜 이제야!"
그는 기뻐할 겨를도 없이 목놓아 울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딸은 그의 왜소한 몸으론 채 다 안아줄 수 없을 정도로 커서 딸의 품에 안긴 꼴이 되었지만 그의 딸은 그런 초라한 그를 마주 안아주었다.
"미안해요. 아빠. 사실은 오래전부터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겁이 나서 찾아오지 못했어요."
"아니다. 아니야. 내 잘못이다. 그때 너를 지켜줄 수만 있었다면!"
그가 겨우 진정했을 무렵.
"사샤, 아직이야?"
그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밖에서 제 딸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하는 생각만으로 눈물이 쏙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에 그녀는 생각났다는 듯 장난스레 웃으며.
"맞다! 들어와도 괜찮아!"
그리고 들어온 것이 바로 아이올로스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샤가 그를 찾아왔던 건 그와의 결혼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까 무서웠지만 이 사실만이라도 알리고 싶어서 찾아왔었다고. 그에겐 기쁘기도 하면서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겨우 딸을 되찾았다 생각했더니 웬 놈팡이가 딸을 채간 상황이었으니. 그것도 새로이 영주가 된 이가 말이다. 덕분에 그는 초록 난쟁이였음에도 그들의 결혼식을 지켜볼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사샤가 부른 배를 이끌고 찾아오기도 했다. 그에게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이유였다. 아이를 낳으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음에도 행복하게 아이의 이름을 고민하던 딸의 모습에 그는 결국 손녀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녀는 딸을 출산하고 시름시름 앓았지만 그럼에도 제 딸이 5살이 되던 날까지 어미로서 사랑을 다했다. 그의 딸은 비록 짧았지만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떠나갔다.
""""....""""
이야기가 끝나고 정적이 서점 안을 채웠다. 그의 오랜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 그들을 감싸는 듯했다. 그러다 드발린이 열어놓았던 문으로 어느덧 주홍빛이 맴도는 햇빛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구나. 이 근처는 치안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니 빨리 돌아가는 편이 좋겠구나."
"아, 네. 어쩔 수 없네요."
메디아도 그 빛을 보았는지 수긍했다. 그렇게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쉬운 마음으로 서점을 나서다 어셔는 깜빡할 뻔했던 것을 깨닫고 그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거 얼마 하나요?"
"으음? 어차피 이곳의 책은 주워오는 것이 대부분이니. 동화 65전만 주려무나."
"그럼 철전 5전이죠? 여기요."
그러면서 재빨리 철전을 두고 책을 들고 다른 아이를 따라나서는 어셔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뒤늦게 저 책이 어떤 책인지 생각난 것이다. 남자아이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가 자리에 앉았을 때. 이제는 정말 떠났을 거라 생각했던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다음에도 이곳에 놀러 와도 될까요?"
그곳에는 문을 살짝 열어두고 그에게 묻는 메디아가 있었다.
"언제든지 놀러 오거라."
서점은 다시 손님을 찾았다.
"아버님과 어머님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서점을 나온 뒤 메디아가 중얼거린 말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도 그저 냉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올로스에게 그런 면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류드밀라도 덩달아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셔는 그런 그녀들이 부러웠다. 천천히 걷다 보니 그들은 시간이 좀 흘렀는데도 이제야 골목을 빠져나오는 길목에 서있었다. 겨우 골목을 빠져나가나 싶었던 순간 메디아의 말이 들려왔다.
"...지도가 바뀌었어요."
"뭐?"
그들은 놀라 메디아가 들고 있는 지도를 보았다.
"정말이네."
"저기 말고 또 갈 곳이 있었다고?"
지도에 새겨진 룬의 모양은 똑같았지만 확실하게 그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메디아의 물음에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도에 새겨진 룬은 원래 새겨져 있었던 곳보다 더 안쪽의 골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은 늦었고 저 안쪽의 골목이라면 인적이 더욱 드물 것이 분명했다. 지금은 돌아가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가자."
벨카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또 언제 여기로 올 수 있을지 모르잖아?"
"해가 저물 시간도 아직 멀었으니까."
어셔도 류드밀라도 지도에 새로 새겨진 곳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아직 이야기의 여운이 남아 그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끝까지 그 흔적을 따라가보는 편이 더 후련할 것 같았다. 그들은 다시 골목길로 돌아갔다. 드발린의 서점은 들리지 않았다. 다음에 다시 오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여기 어째 가면 갈수록 길이 아닌 것 같은 곳이 나오는데 확실한 거지?"
하지만 설레는 마음도 잠시 그들은 점점 더 험난해지는 길인듯 길 같지 않은 길에 의문이 들었다. 막다른 길이 나왔었지만 작은 벽돌로 정말 대충 만들어 놓은 듯한 계단을 발견하고 그곳을 통해 올라가 난간을 타고 보니 그들은 어느새 어떤 지붕을 밟고 걸어 다니고 있거나 커다란 파이프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가라면 못 갈 것도 없었지만 제대로 된 길도 아닌 곳을 걸어 다니는 기분이란 뭔가 즐겁기도 했지만 그래서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저도 이상하다곤 생각하지만 이 지도에 표시된 위치를 보면 이곳 말고는 딱히 길이 보이지 않는걸요?"
지도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들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분명 길은 아닐 텐데 마치 그곳으로 지나가려 만들어 놓은 듯이 배치된 파이프나 판자, 벽돌 같은 것들이 그곳을 길처럼 만들었다. 그런 흔적들을 따라 지붕과 지붕 사이를 넘기도 하고 벽을 타고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도 하며 얼마쯤 더 나아갔을까? 그들의 앞에는 어느새 터널이 보였다.
"이런 곳에 웬 터널이."
정말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터널이었다. 이 영지는 산 만큼은 아니지만 살짝 높은 언덕 같은 지형이라 정말 이상한 건 또 아닌 것 같았지만 이 터널과 연결되어 있는 길은 이미 오래전에 막혀버린 것 같았다.
"...여기로 들어가야 하는 거겠죠?"
"마침 지도의 표시도 딱 여기잖아."
"저기 위에도 좀 봐."
터널의 위에는 역시 글자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그 고대어라고 생각되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분명 대놓고 들어가라 이야기하는 것 같은 모습이지만.
"안이 너무 어두워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안 보여."
그 안의 암흑이 그들의 걸음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기왕 이곳까지 왔으니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터널의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터널의 안은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야, 너희 거기 있는 거 맞지?"
류드밀라의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있어. 메디아랑 손도 잡고 있잖아."
어셔는 가끔씩 같은 말을 하는 류드밀라를 이해했다. 그렇게라도 말을 주고받지 않으면 서로 떨어져 혼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손을 잡고는 있었지만 한쪽 손만 잡을 수 있는 그녀가 얼마나 불안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도 벨카와 메디아의 손을 땀이 나도록 쥐고 있었으니까. 그러던 그때 드디어 빛이 그들을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