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골목을 따라서.
그는 이른 시간부터 술을 마시고 자신의 가게로 돌아왔을 때 안쪽에서부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아이들이 신기한 마음에 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는 낡고 구석진 가게. 문을 잠가놓지 않으니 종종 있는 일이었다. 굳이 쫓아낼 필요도 없었다. 그의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아이들은 지레 놀라 도망쳐버렸으니까.
그러나 아이들을 마주했을 때 정작 그가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태생부터 그리 눈이 좋지도 않았고 대낮부터 쓰기만 한 싸구려 술을 속에 들이부었기 때문에 지금 이 광경이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은 지 벌써 10년이 넘어가는 자신의 딸이 그의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으니까. 어릴 적 모습 그대로. 그가 할 수 있었던 건 머저리처럼 그저 딸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사샤, 사샤... 냐?"
"나는 그녀가 아니야."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 소녀의 모습과 이내 마주치는 자신의 딸과는 다른 금빛에 그는 그저 닮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에 아쉬워하는 것도 잠시. 그는 딸과 똑같은 자수정 빛의 눈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마치 두 아이가 그의 딸의 모습을 나누어 갖고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아이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을 때.
"어머님을 아시나요?"
그는 술에 절어 살며 잊고 있었던 세월을 떠올렸다.
"어휴, 냄새. 땅이나 파고 살 것이지 왜 도시에서 꾸역꾸역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음에도 들려오는 모욕적인 말. 찔러오는 눈초리. 싸움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지만 드발린은 초록 난쟁이였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조차 축복받지 못한 미천한 종족. 그의 기억이 시작된 곳은 어느 초록 난쟁이들과도 다르지 않은 어두컴컴한 굴 속. 처음에는 왜 그런 곳에서 사는지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 그저 같이 살던 초록 난쟁이들에게 배운 대로 땅을 파고 어른들이 가져오는 밀알이나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밋밋한 감자나 벌레를 파먹고 살았을 뿐이다.
그는 그날도 다른 이들을 따라 땅을 팠다. 땅을 파야 좀 더 넓은 곳에서 살 수 있었고 열심히 파야 먹을 것을 더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땅을 파던 나날 그는 갑자기 약해진 땅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단단한 땅을 돌로 파내며 살던 그에게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단지 위쪽에서 먹을 만한 식물의 뿌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먹기 위해 더 구멍을 팠던 것인데. 그는 처음으로 빛을 보았다. 푸른 하늘을 보았다.
하늘을 떠가는 솜뭉치들과 저 멀리 보이는 그때는 마냥 웅장했던 영지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새로운 세계. 평생을 몰랐다면 몰라도 한 번 맛본 그 세계를 갈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만류와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기어코 멀리서나마 보았던 그 영지에 다가갈 수 있었다.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저 알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는 계속 쫓겨났지만 그들에게 가치 있는 것을 찾아 거래한 뒤에야 그는 영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꺼져! 어디서 초록 난쟁이가 여기서 식사를 하려고!"
간신히 들어간 영지에서의 생활은 생각 이상으로 고되었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다. 피부가 초록색이라는 이유로. 키가 작다는 이유로. 힘을 못 쓴다는 이유로.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모욕적인 소리를 들으면서 그가 자연스럽게 찾게 된 곳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골목이었다. 그는 그저 하늘을 보며 빛을 보며 살고 싶었던 것인데. 이 찬란한 도시에서도 그에게 허락되는 곳이란 건물에 하늘이 찢겨 조각난 비좁은 골목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일거리를 찾아 일하며 살아왔다. 이 좁은 골목에 버려진 옛 서점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는 길거리를 전전하고 있었겠지. 옛 서점에는 책은 전부 가져가버리고 빈 책장들만이 모여있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마법책이었다. 다른 책은 다 가져갔으면서 그 책 하나만은 남아있었다. 먼지로 가득한 그 책의 모습이 자신과 같아 보여 그는 버려진 마법책을 주워 가져다 두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날도 자신처럼 버려진 마법책을 주워 가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어수선한 분위기에 안 그래도 왜소한 몸을 더욱 수그리며 돌아가려 했을 때. 그는 골목에 쓰러져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붉은 머리카락에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사람을 그다지 마주하지 않는 그가 보기에도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도망치고 도망치다 한계에 부친 것처럼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부탁, 합니다. 아이를...!"
그녀의 말에 그는 그제야 그녀의 품에 아직 채 열기가 식지 않은 핏덩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오는 기사들의 군홧발 소리. 그는 오늘따라 어수선했던 영지가 이 여인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망친 것일까? 그가 머무르는 곳으로 이끌고 가면 기사들이 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그곳은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왜소하고 힘없는 난쟁이.
기사들이 이곳을 찾기 전에 지쳐있는 여인을 데리고 숨을 방법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여인의 품에 있던 아기만큼은 들 수 있었다. 그가 아기를 받아들자 미소 짓는 그녀에게서 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기사들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아기를 들고 옛 서점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문 앞을 지나가는 기사들의 기척에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여인이 있던 곳을 보았다.
"드디어 잡았다. 이 년!"
쓰러져 있던 여인은 기사들에게 강제로 일으켜 세워져 끌려가고 있었다. 같은 인간임에도 물건을 대하듯 거칠고 한치의 배려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눈물이 핏자국처럼 남아 기사들과 함께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본 여인의 모습이었다.
"아빠, 왜 저는 밖으로 나가면 안 돼요?"
그날 그가 거두었던 아기는 쑥쑥 자라서 어느새 활기차게 서점 안을 돌아다녔다. 변변찮은 일도 구하기 힘들어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지만 그래도 아이만큼은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주었다. 덕분에 그의 가난한 주머니 사정치고 아이에게는 젖살이 엿보였다.
"밖에는 사샤처럼 예쁜 아이를 잡아가는 무서운 철 괴물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아이는 그때 잠깐 보았던 여인의 자식이라는 걸 모를 수 없을 만큼 하루가 다르게 커가면서 벌써부터 그 아름다움을 꽃피우려 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는 아이가 밖에 나가는 것을 힘들게 했다. 왜냐면 그때 여인을 붙잡아갔던 기사들을 부리는 영주가 수시로 아름다운 여인들을 골라 자신의 첩이나 노예로 끌고 가는 일이 여전히 빈번했던 탓이다. 막 성인이 된 아이들도 가리지 않았다.
여인은 그날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좋은 일을 겪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서 부탁받은 이 아이까지 그녀와 같은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는 가끔씩 불평할지언정 의젓하게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혹시 나가더라도 로브를 뒤집어쓰고 벗지 않았고 되도록 안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옛 서점의 문에 처음 보는 문패가 걸려있음을 깨달았다.
"드발린의 마법서점?"
처음 보는 문패에 그가 써놓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마법서점이라니. 그는 이곳을 딱히 서점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저 버려지는 마법책들을 주어와 빈 책장을 채웠을 뿐이었던 것이다.
"히히, 어때요? 아빠. 마음에 들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건 딸의 작품이었다.
"마음에 드는구나. 정말, 정말로."
이 골목 안쪽에 버려진 초라한 서점은 비로소 그의 집이 되었다. 아이는 마법책을 좋아했다. 쓴 사람만 조금씩 다른 같은 것이라 봐도 무방한 책인데도 아이는 언제나 즐겁게 책들을 보고 비교하며 놀았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동작을 취하거나 낙서를 하기도 했지만 그마저 웃을 수 있는 즐거운 생활이었다.
"아빠 이거 받아요!"
그러다 제 딸이 가져온 물건에 기겁하는 일도 있었다. 그것이 못해도 그들의 세 달 치 생활비에 가까운 값을 자랑하는 구두를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서 훔쳤다고 보기엔 그의 발에 꼭 맞는 구두.
"이, 이걸 대체 어디서 산 거니?"
"저어기 구두 만드는 할아버지께요."
그는 딸의 말을 듣고 그가 터무니없이 싼값에 구두를 팔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때때로 같이 술을 마실 친구가 생겼다. 이 모든 게 그의 딸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안 됩니다! 그 아이만큼은 안 됩니다!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영주가 딸아이를 알아차리고만 것이다. 아이가 실수한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똑 부러지는 아이는 자신이 조심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주변의 인간들이 문제였다. 언제나 로브를 쓰고 다니는 딸의 모습에 어떤 아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후드를 벗겨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딸을 끌고 가는 기사들을 붙잡다 두들겨 맞았다.
단단한 군화에 왜소한 몸이 으깨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보다 아픈 것은 아이를 붙잡지 못한 손이었다. 그날 결국 그는 딸을 빼앗겼다. 길 한가운데서 울부짖는 그를 그때만큼은 어느 누구도 초록 난쟁이라고 멸시하지 않았다. 그것이 참으로 비참했다.
"...아버님이 그러셨었다구요?"
드발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메디아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영주는 네 아비가 아니었단다."
그가 아이들과 마주한 뒤 그는 아이들을 추레하게나마 마련한 의자와 책상에 앉히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너무 어렸을 때 어미를 잃어 기억마저 희미한 제 어미의 흔적을 더듬고 있는 손녀를 위해서였다. 어차피 이곳을 찾는 손님은 얼마 안 되는 괴짜들 뿐이니 여유롭게 이야기해도 상관없었으니까.
"메디아는 아이들과 놀러 나갔나."
"예, 평소처럼 근위대가 따라붙었으니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아이올로스는 히스에게 보고를 받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는 내성의 밖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넓은 영지의 일부분만큼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은 그 어딘가에 있을 아이들을 찾으면서도 그는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보았던 곳은 지금은 메디아가 좋아하는 성의 뒤편에서였다. 막 영지를 운영할 때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다가 바람을 쐬러 나왔을 때. 창밖으로 성의 뒤편에서 울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처음엔 그냥 하녀가 슬픈 일이 있어서 울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사는 성의 하녀들은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가끔 이렇게 몰래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붉은 머리카락은 처음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위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슬픔으로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만큼은 선연했다. 첫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음날에도 그는 산책을 나왔다.
본래 몸을 움직이는 취미는 없었지만 산책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한적한 곳이라 아무도 보지 않을 그곳에서 그녀는 언제나 울고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을 텐데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었다.
"야, 너는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여기서 매일 울고 있냐?"
생각보다 뾰족하게 나가버린 자신의 말에 깜짝 놀라면서도 뚱하니 그녀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까?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눈을 마주쳤을 때. 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눈물에 젖은 자줏빛 눈동자가 일렁이는 모습과 함께 그녀의 모든 게 자신의 눈에 새겨진 기분이었다. 때문에 할 말을 잃은 찰나.
"흑, 히끅! 집에 가고 싶은데 못 가게 해."
"집에 못 간다니. 여기서 일하면 당연한 거 아니야?"
"흐으, 난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었던 적 없어."
그때 그는 그녀의 말이 기분 나빴다. 이곳은 그의 집이었다. 자신의 집이 싫다는데 기분이 좋을 수가.
"아니, 여기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집에 가고 싶으면 휴가를 받으면 되잖아?"
그녀의 사정을 몰랐기에 할 수 있었던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었다.
"휴가?"
그런 것도 모르고 잠시나마 울음을 멈추었던 그녀의 모습이 그는 기뻤다.
"그래, 휴가. 열심히 일하면 가끔씩 준다고."
그런 자신의 말이 얼마나 잔인한 것이 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