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골목을 따라서.
노인은 구두장이였다. 단지 이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왔다는 것이 남다르다면 남다른 점이리라. 그와 함께 늙어갈 것을 약속했던 아내는 어느덧 먼저 떠나가 버리고 딸이라고 하나 있던 아이는 시집을 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찾아오는 일도 없다. 그에게 남은 곳이라고는 낡고 구석진 단칸 가게 하나. 그에게 찾아오는 손님들은 정해져 있거나 가끔 아는 얼굴이 몇 정도. 장점이라고는 오래되었다 뿐인 그런 가게였다.
그의 곁에 자리 잡아 구두 가게를 늘 끼워두고 실랑이를 벌일 것 같았던 가게들도 세월이 흐르며 바뀌고 그 주인도 몇 번이나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가게를 정리하고 그 안에 마련된 간신히 몸만 뉠 수 있는 좁은 방 안에서 버릇처럼 구두가 상하지 않게 구두를 닦던 그는 자신의 손이 눈에 띄었다. 오랫동안 구두를 잡아 가죽 냄새와 구두약의 쩐내가 말라붙은 굳은살이 가득한 손이다.
그는 구두를 닦던 헝겊을 내려두고 몇 번이나 읽고 확인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석에 밀어두었던 편지를 되새겨보았다. 그는 가만히 편지를 읽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촛불을 놓아둔 램프가 깜빡이며 한계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는 구태여 촛불을 갈아줄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천장에는 밧줄이 내려와 둥글게 여지를 남겨놓았다. 저곳이라면 그에게 조금이나마 평안을 안겨줄 수 있을까?
편지보다도 구석에 밀어 넣은 돈들은 그다지 그를 붙잡지 못했다. 이윽고 그는 밧줄이 남겨둔 여지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그가 가만히 밧줄을 바라보고 있으면 똑똑 누군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그는 머리를 빼고 소리가 들려오는 문으로 다가갔다.
"이 밤에 뉘시오?"
그가 문을 열고 밖을 살폈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살피지 못했던 아래쪽에서 앳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는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노을처럼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독특한 머리카락과 자수정처럼 반짝이는 보랏빛 눈동자. 그가 오랫동안 가게를 지키는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여자아이가 가게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니?"
"그게, 구두를 사고 싶어서..."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아이는 작은 주머니를 손에 꼭 쥐고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잠깐 아이의 모습을 살폈다. 크면 많은 남자들을 울릴 듯한 아이의 모습에 그는 왜 이 여자아이를 전혀 본 적이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냥 놔두어도 온갖 잡것들이 꼬일 텐데.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지 않았다. 그는 잠시 주변을 살폈다. 어두컴컴한 밤이 내려앉은 거리는 간간이 집에서 새어 나오는 빛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들어오거라."
"실례하겠습니다."
아이는 조심스레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와아. 이게 다 구두 만들 때 쓰는 것들이에요?"
"그래."
겁을 먹은 것 같았던 아이는 가게 안에 가득 쌓여있는 가죽 조각들을 보고 눈을 빛냈다. 정말 특별할 것 없는 가죽 조각이었을 뿐인데.
"네 구두를 사러 온 게냐?"
"그건 아니고. 아빠한테 드리고 싶어서."
"그렇구나 아버지의 발 크기는 어떻게 되느냐 "
그의 말에 아이는 우물쭈물 거리면서도 제 아비의 발 크기를 어림짐작해서 보여주었다. 발의 크기를 보아하니 난쟁이로 보이는데. 정작 아이는 난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아이가 왜 말하기를 망설였는지 알 것 같았지만 그는 말하지 않고 아이가 요구하는 대로 구두를 만들 준비를 하다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돈은 있느냐."
"앗, 여기요!"
아이가 내민 건 지금까지 소중히 들고 있던 작은 주머니였다. 그가 주머니를 열어 안쪽을 보면 철전 몇 개와 동화들이 섞여 있었다. 잘 세어봐도 철전 12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쌈짓돈. 다시 소녀를 보면 불안한 표정이 엿보였다.
"혹시 모자라나요?"
확실히 모자란 값이었다. 구두는 아무리 싸다고 해도 철전 30전은 있어야 했으니까.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하단다."
하지만 어째서였을까? 그런 말을 해버린 건. 그는 반값도 되지 않는 돈을 받아들고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일 찾아오겠느냐 그쯤이면 완성될 것 같구나."
"그럼 부탁드릴게요!"
아이가 인사하고 밤길을 나아가는 모습을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촛불을 이어붙이고 하루가 늘어났다. 다음날 그는 문을 열었다. 아침으로는 언제나 찾는 식당에서 간단한 수프와 빵으로 배를 채우고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다리며 잘 만든 구두를 닦는 단순한 작업만을 반복하는 시간. 그래도 지금처럼 구두를 닦는 일이라도 있으면 괜찮았다. 그마저도 아니었다면 손님이 자신을 깨우길 기다리며 선잠을 자는 것이 전부였으니.
그가 문득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밤이 찾아와 어느 가게고 문을 닫은 후였다. 걸어 다니는 사람도 몇 보이지 않는 외로운 거리에 그는 초라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문을 닫기 위해 이것저것 꺼내놓았던 물건들을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그의 하루 일과는 것으로 끝이었을 터였다. 그 아이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 구두 다 됐어요?"
어젯밤에 찾아온 여자아이였다. 그는 그렇게 아이에게 완성된 구두를 들려주었다. 마지막 손님으로는 썩 괜찮았다고 생각하며 그는 가게를 마무리하고 밧줄 앞에 섰다. 하지만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밧줄을 잡고 망설이다 내려왔다. 촛불은 아직 타오르고 있었다. 하루만 미뤄도 뭐라 할 이들은 없었으니까. 그날도 장사는 잘되지 않았다. 가끔 구두를 닦으러 오는 이들이 몇으로 끼니 정도는 해결할 푼돈만 들어온 정도였다.
하루가 저물고 더 이상 남은 주문도 없었다. 그가 밧줄 앞에 섰을 때. 똑똑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문을 열면 어제 구두를 사갔을 아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거짓말하셨죠? 아빠한테 들었어요. 구두 그것보다 더 비싸다면서요."
아이는 속았다며 투정을 부리며 반드시 갚을 테니까. 원래 값을 말해달라 졸랐다. 하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기에 입을 다물었지만 그 이후로 아이는 매일 같이 그를 찾아와 정확한 값을 물었고 그의 곁에서 재잘재잘 떠들다 가곤 했다. 밧줄은 어느새 천장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구나."
노인은 메디아의 모습에서 그녀의 어머니를 발견한 듯 푸스스 웃었다.
"어머님이 이곳에..."
메디아는 그저 낡은 곳이라 생각해 찾아오지 않았던 이곳에 어머니의 흔적이 남았다는 것이 신기한 듯 노인과 구두 가게를 보았다. 어셔는 그의 이야기를 듣다 지도를 보았다.
"그러면 이건 너네 어머니가 추억 삼을 만한 곳을 표시해 둔 걸까?"
"그런 걸까요."
어셔는 소중한 추억을 남긴 곳을 이렇게 비밀지도 같은 것으로 남겨놓은 그녀의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메디아는 어셔가 들고 있는 지도를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에 노인의 눈도 지도로 향했다. 그도 파란 표시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곳이라면 어디인지 알 것 같구나."
"정말인가요!?"
"그래, 모를 수가 없지."
노인의 말에 그녀는 당장 가르쳐달라는 듯 굴었지만 그는 메디아를 멈춰세웠다.
"잠깐 시간을 내어주겠느냐?"
"네?"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렇단다."
노인이 그녀에게 요구한 것은 별 건 아니었다.
"제 신발을 만들고 싶다구요? 하지만 그건."
"안되겠느냐?"
메디아는 불편한 표정으로 망설였지만 노인의 간절한 모습을 보았다. 그러다 생각난 듯 노인에게 물었다.
"벨카의 구두. 여기서 맞추었다고 했죠?"
"그래, 그 머리카락이 알렉산드라를 떠올리게 해서 기억하고 있었단다."
그는 잠깐 소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류다의 것까지 벨카의 구두와 같은 디자인으로 함께 만들어주세요."
"엑, 내 것도?"
"괜찮잖아요? 값은 치를 테니까요."
노인은 기꺼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돈도 받지 않으려 하는 그에게 구두 한 켤레에 철전을 12전 씩 받기로 한 뒤에야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발의 크기를 재었다.
"으, 이거 너무 간지러운데."
먼저 가죽 판에 발을 올려 크기를 재게 된 류드밀라는 노인의 거친 손이 발을 스치는 감각이 낯설고 간지러운 듯 몸을 떨었다. 어셔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벨카의 구두를 샀을 때에도 12전을 받았던 것을 떠올리고 주머니를 뒤져 철전 18전을 꺼냈다.
"할아버지. 여기요. 원래 구두 하나에 철전 30전이라면서요."
소녀와 메디아의 어머니가 그저 닮았다는 이유라면 제값을 주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노인은 그가 내미는 돈을 거절했다.
"그 구두는 철전 12전이 맞다.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그래도."
끝내 노인은 어셔가 내미는 철전을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류드밀라의 발을 재고 이어서 메디아의 발까지 잰 노인에게 그들은 이 지도가 어디를 가리키는지 들을 수 있었다.
"마법서점이요?"
"그 지도가 알렉산드라가 남겨놓은 것이 확실하다면 말이다."
"마법서점이라니. 거기 장사가 되긴 하나?"
"우리 아빠는 그런 거 팔자고 하면 돈이 안 된다며 바로 태워버릴걸."
"동화책 같은 느낌으로 파는 곳일까요?"
그들은 그 말을 듣고 정말 맞는지 의심스러웠지만 따로 짐작 가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는 어떻게 가면 되나요?"
"특별할 것도 없단다. 저쪽 골목을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올 테니."
그가 가리킨 골목이 지도에도 있는지 확인하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노인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알렉산드라를 처음 봤을 때 그녀가 딱 저만한 나이였는데. 어느새 그녀의 아이와 그 친구들이 자신의 가게에서 수다를 떠는 모습이 그의 앞에 있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구두가 완성되면 오거라."
노인은 곧 목적지를 정하고 이별을 고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주변이 변하는 중에도 그 하나만큼은 이 자리를 지켰는데 세월에는 장사 없다더니 그의 손은 굳은살이 빈틈없이 차지하여 돌덩이처럼 보인다. 언제까지고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마음과는 달리 그의 몸은 늙어서 제대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힘을 내어 움직였다.
굽은 허리를 억지로나마 피며 가죽을 고르고 고른다. 알렉산드라의 아이와 그 친구의 구두를 만드는데 좋지 않은 재료를 쓸 수는 없었으니까. 가죽 조각이 가득한 선반을 얼마나 뒤집었을까? 아무리 살펴봐도 그가 원하는 가죽이 모자랐다. 혀를 차며 그가 원하는 가죽을 사기 위해 돈을 찾았지만 하필이면 철전이 19전밖에 없다. 그가 원하는 가죽을 무두장이에게서 얻으려면 적어도 철전 16전은 더 필요했는데.
모자라는 조각을 채우려면 가죽의 일부만 있어도 되겠지만 무두장이들은 무조건 큰 가죽만 고집할 테니까. 그는 어쩔 수 없이 흥정이라도 해보고자 채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가게 문을 닫아 두기 위해 아이들의 발 크기를 재었던 가죽 판을 옮기려 했을 때. 그는 판위에 철전이 올라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철전 18개. 그는 누가 이 철전을 두고 갔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아이인가."
노인은 이야기를 듣고 자신에게 철전을 내밀던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고 쓰게 웃으며 철전을 받아들었다. 덕분에 가죽을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이 길이 맞는 거겠죠?"
어셔와 소녀들은 노인이 가리켰던 골목의 앞에 서서 미심쩍은 눈으로 골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메디아는 정말 이곳이 맞는지 확인하듯 계속 지도와 골목을 번갈아보았지만.
"그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곳이었잖아."
그가 가르쳐준 길은 이곳이 확실했다. 다만 문제는 이 골목이 너무 구석진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슬슬 정오에 가까워 내리쬐는 햇살이 눈부신 오전인데도 골목의 안쪽은 어둡고 그늘져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이런 곳을 어머님께서 돌아다니셨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조금만 들어가도 위험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도 없잖아. 지도에서도 표시는 이 안쪽을 가리키고 있고."
"그건 그렇지만요."
한참을 망설이던 그들은 결국 골목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앞장서는 것은 어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