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1화 〉골목을 따라서. (111/220)



〈 111화 〉골목을 따라서.

"일단 제대로 된 지도를 얻는 게 먼저인데 말이죠."

카페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던 그들이 가장 먼저 들려야 하는 곳은 류드밀라네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단이었다. 메디아의 어머니가 남겨놓은 지도는 너무 간략해서 알아보기 힘들었으니까.

"아빠한테 들키지 않고 빨리 지도만 들고 오는 게 중요해."


류드밀라의 말에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들 동의했다. 안 그래도 피곤한 참인데 쓸데없이 시간을 뺏기는 것은 사양이었다. 어셔는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런데 너네 아빠는..."
"힉!"


어셔는 류드밀라에게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묻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류드밀라가 그가 말을 거는 순간 작은 비명을 지르며 메디아의 뒤로 숨어버렸으니까. 그녀는 메디아에게 어른들이 했던 일에 대한 설명과 남녀가 같이 목욕을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들은 뒤로 계속 저런 상태였다.

"후후, 류다. 그냥 목욕만 한 거잖아요?"
"그, 그렇지만."

메디아가 달래듯 이야기했지만 류드밀라는 좀처럼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목욕만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목욕 중에 단단해진 그의 물건을 잡고 주물거린 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것이 왜 커지고 어떻게 쓰는지도 알게  류드밀라는 어셔를 똑바로 바라보기는커녕 대화도 못하고 있었다. 말을 걸면 저 모양이니.

"그래도 류다는 앞으로  더 조심할 필요가 있어요. 어셔 씨가 엄청난 신사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일이 났을 수도 있었다구요?"

어셔는 차라리 메디아에게 그만 말하라고 하고 싶었다. 그럴수록 그를 힐긋힐긋 쳐다보던 류드밀라의 얼굴은 붉어졌고 그는 그대로 그때 있었던 일과 상상했던 것들을 더 의식하게 되어버리니까. 소녀가 부루퉁하게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엄한 것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류드밀라네 아빠는 무슨 일을 하시는데?"


그가 상단을 운영한다는 건 들었지만 무언가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물건이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네요. 기본적으로는 상인이시지만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
"무슨 소리야?"
"그건 직접 보시면  거예요."

이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그녀가 쓰게 웃으며 가리킨 곳을 본 순간 어셔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왜냐하면 그의 코앞에 커다란 곤충의 머리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그가 숲을 떠나기 전 마을을 습격했던 몬스터와 닮아있는 모습에 어셔는 혹시 몰라서 가져왔던 가검을 빼 들 생각도 못 하고 몸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벨카가 그의 앞으로 나서는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벨카, 갑자기 왜."


그리고 소녀가 가까이 갔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놈의 모습에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놈에게는 머리만 남아 있을  몸통이 없었다.

"죽었잖아?"
"네, 살아 있었다면 이 근처는 진작에 엉망이 되었을걸요?"

주변을 돌아보니 이런 것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을  수 있었다. 생김새가 다양한 곤충의 시체들을 늘어놓은 장터의 모습에 설마 했지만.

"혹시 류드밀라네 아버지가 판다는 게."
"몬스터의 시체야."


류드밀라는 여전히 메디아의 뒤에 숨어있으면서도 그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이런  돈이 된다고?"
"물론 돈이 되고 말고."

그때 누군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난쟁이치고는 어셔보다 머리 하나는  장신. 후덕하다기 보다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얼핏 보면 거부감이 드는 모습. 제법 긴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쓴 실크해트와 그와 같은 색의 옷은 분명 고급스러운 재료를 사용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티가 나는 듯한 이상한 모습이다. 작지만 얍삽한 사냥꾼을 보는 것 같은 회색 난쟁이의 정체는.

"윽, 아빠."


류드밀라의 아버지였다.

"안녕하십니까? 메디아 아가씨. 제 딸과 어울려주신다니 영광입니다."
"그쪽도 평안하신가요. 그리고 류다는  친구니까요."

그가 모자를 들며 인사하자 메디아도 치마 끝을 살짝 들었다 놓으며 인사했다. 그녀와 인사를 나눈 그는 류드밀라를 보았다.

"이야기는 들었다. 지도가 필요하다지?"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녀는 말해주고 싶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곤란하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상단에 들린다면서 정작 이 아비에겐 한 마디 말도 없다니."
"어차피 다 알고 있었으면서."
"직접 듣는 것과 부하에게 이야기를 듣는 건 말이 다르지. 잠깐 보고 가도 상관없을 텐데. 이 아비는 서운하구나."
"우웩."

류드밀라가 대놓고 토할  같은 표정을 지어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 상단의 물건이라 해도 그냥 가져갈 생각이었니?"
"오늘만 쓰고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거든!"

그녀의 말에 그는 혀를 쯧쯧 찼다.


"이런 이런 내가 뭐라고 가르쳤지?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거래는 확실하게."
"그렇지."
"뭐, 뭘 원하는데?"

어셔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그들이 정말 부녀가 맞는지 의심할 뻔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손가락으로 제 볼을 툭툭 건드리지 않았다면.

"으, 으으으."

 모습에 류드밀라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들의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쪼르르 다가가 그의 볼에 쪽 하고 뽀뽀했다.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지도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나저나 잠시 시간이 되신다면 구경하고 가시겠습니까? 좋은 물건이 많이 들어왔습니다만."
"아니요. 오늘을  일이 있어서 말이에요. 그럼 안녕히."

그가 메디아에게 권유했지만 곧바로 거절하고 류드밀라를 데리고 돌아섰다. 그들에겐 메디아의 어머니가 남겨둔 지도에 있는 표시로 가는 게  중요했으니까. 어셔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는 류드밀라가 걱정되어 말을 걸었지만.


"야..."
"아빠 정말 싫어! 옷도 저게 뭐야! 항상 이상한 옷만 입고 다니고!"

그러기가 무섭게 폭발하는 그녀를 보고 류드밀라를 위해서라도 먼저  구간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목표는 실패했지만 지도를 얻는 것은 성공했으니 지장은 없었다.


"그런데 진짜 몬스터 시체 같은 거로 돈을 버는 사람이 있구나."

어셔에게 있어서 몬스터라는 건 기분 나쁜 생물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법을 사용한다는 드래곤들은  예외였지만. 가재의 살은 제법 맛있기도 했고 껍질이 비싼 값에 팔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런 걸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저런 걸 찾는 이상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거지 뭐."

류드밀라가 꼬치의 고기를 물어뜯으며 말했다. 그녀를 달래기 위해 산 것이었지만 여전히 짜증이 풀리지 않은 듯 물어뜯는 모습이 신경질적이다.


"꼭 이상한 것도 아니에요. 몬스터의 시체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주변에도 피해가 가니까 용도를 찾다 보니 나온 느낌이라서요."

메디아의 말을 들어보면 오히려 저게 일반적인 일이라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실크 모스의 인분은 그대로 두면 독성을 띄는데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잖아요."

실크 모스의 인분의 독성은 사람이 들이키는 것만으로 발작을 일으키게 만들고 심하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많은 양의 흙과 섞어서 묵히면 중화되고 오히려 좋은 비료가 되므로 실크 모스의 인분은 그렇게 처리한다고.


"그냥 그렇게 취급하면 말도  해! 난  몬스터의 눈알에서 나온 물이 끓여먹으면 몸에 좋다며 사 가는 사람도 봤다고."
"그, 그건 좀."
"...그걸 끓여 먹는다고?"
"몰라. 그것 말고도 이상한 걸 사 가는 사람은 많아서."

정말 그녀의 아버지는 돈이 되면 뭐든지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대화하다 보니 인원에 맞춰 하나씩 샀던 꼬치를  먹어치운 후였다.


"벨카는  먹어도 돼?"
"응."

여전히 벨카는 고기를 먹지 않아서 어셔가 대신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좀 보이는 것 같네요."
"그러게. 좀 더 자세한 지도에 저런 표시를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류드밀라의 아버지가 건네준 지도는 확실히 그들이 들고 있던 지도보다  세세하게 이 영지의 길과 구조를 그리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 목적지의 위치를 더 정확히 알고자 나란히 앉아 지도를 보았다.

"이것도 완벽한 건 아니지만 길을 찾는데 문제는 없겠어요."
"응, 이쪽으로 가려면 동쪽 대로를 따라가면 될 것 같아."

길을 찾는  좋았지만 어셔는 오늘따라 이 상황이 불편하다고 느꼈다. 오른쪽에는 벨카가 그의 옆에 붙어 있었고 왼쪽에는 메디아가 지도를 들고 있었다. 류드밀라는 여전히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면 숨기 바빠 메디아의 옆에 있었지만 여자아이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뭔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생각 이상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도저히 지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들이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서 문제는 없었지만.

"어? 여기는."

그녀들이 이끄는 대로 걷던 어셔는 기시감을 느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적어서 그렇지 이곳은 처음으로 영지에 들어왔을  도나르 아저씨들이 물건을 팔았던 곳이 확실했다.

"잠깐만 지도  줘봐."


메디아에게서 지도를 건네받은 그는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이야?"
"동쪽 광장이 보이니까. 딱 여기일 거예요."

어셔는 그녀가 가리킨 곳에 손을 집어두고 다른 지도에 표시가 있는 곳을 보았다. 지도의 크기가 달라서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알  없었지만 생각보다 거리가 멀지 않았다. 제법 돌아가야 할  같았지만 이 근처가 확실했다. 그가 이곳 토박이가 아니라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딱 하나 알고 있는 곳이 있었다. 저 위치쯤에 있을 만한 건.

"구두 가게인가?"
"구두 가게요?"
"그럼 구두 가게 하나 찾자고 우리가 이렇게 나온 거야?"
"그건 나도 모르지 일단 가보자."

어셔는 그녀들을 데리고 구두 가게로 가는 길을 떠올렸다. 번화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골목도 아닌 애매한 구간을 기억을 되짚으며 돌아다니다 보면.

"혹시 저기를 말하는 거야?"
"맞아!"

류드밀라가 가리킨 곳에는 그때 소녀의 구두를 맞추었던 구두 가게가 있었다. 두 건물 사이에 끼여 있는 것처럼 구석진 곳에 있는 세로로  단칸 건물. 정리된  같으면서도 정리되지 않은 가죽 조각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낡은 가게를 그 가게만큼이나 낡은 노인이 그때와 같이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다가가 보았지만.


"룬 같은 건 어디에도 안 보이는데?"
"지도도 딱히 변화가 없네요."
"끙. 역시 위치만 비슷한 거였나?"


혹시나 하면서도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쉬운 일이다.

"너희는 이 근처에 아는 곳 있어?"
"있을 리가요. 저희는 이 근처에 오는 것도 처음인걸요."
"이쪽은 영지에서도 정리하지 않아서 오래된 곳이 대부분이라 볼 게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들의 말을 듣고 보니 이곳은 그녀들과 함께 놀았던 곳에 비해 낡은 건물들이나 크기도 제각각인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이곳에 처음 왔을  대단하다고 느꼈었는데 이제 보니 이곳저곳에 세월의 흐름이 보였다. 겨우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허탕이라는 생각에 이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을 때.


"알렉산드라?"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졸고 있던 노인이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셔는 그들을 이미 본 적이 있음에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노인이 혹시 문제가 생겼나 싶었지만 벨카가 구두를 맞출 때 가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니, 아니군. 이전에 구두를 사 갔던 아이들이었나."


다행히 노인은 그들이 누구였는지 알아차린  같았지만 메디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잠깐만요. 어머님의 성함을 할아버지가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노인이 그녀의 말에 놀란 듯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흔들리는 노인의 눈이 무언가를 확인하듯 그녀를 살폈다.

"너네 어머니 이름은 사샤 아니었어?"
"사샤는 어머님의 애칭이에요."


어셔는 아이올로스가 벨카를 처음 보았을  사샤라 불렀던 것을 떠올리며 이야기하자 그것이 애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디아는 노인에게 절박하게 물었다.


"말씀해 주세요. 어머님을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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