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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화 〉골목을 따라서. (108/220)



〈 108화 〉골목을 따라서.

상단을 따라 란투아에 온 어셔는 이곳의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해가고 있었다. 가끔은 아이들이 그에게 메디아들과 어떻게 친해졌냐 묻는 일도 있었지만.


"그런 건 알아서 뭐 하게?"

어쩌면 저렇게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 파벨을 따라 그가 결투를 하게 몰아붙였던 아이들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혐오감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그나마 메디아나 류드밀라에 대해서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었지만 벨카에 대한 말까지 나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없었다. 메디아의 말을 들어보면 그와 소녀의 사이는 공공연한 일이라는 데도. 그가 싸울 기세를 보여야 기겁해서 물러나곤 했다.


사실 그가 그녀들과 어떻게 친해졌는지 진지하게 말하고자 하더라도 대답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어셔도 어쩌다 그녀들과 친해졌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친해져 있었다는 느낌이라. 그래도 아이들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던 놈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덕분인지 그 이상으로 시비를 걸거나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오늘도 어셔는 새벽 훈련과 식사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소녀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그 녀석 진짜  물지?"

류드밀라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현재 그들은 말을 위해 마련된 마구간 앞에 서있었다.  이유란 메디아가 그녀에게 어셔가 말을 키우고 있다고 해서 호기심을 가진 류드밀라가 직접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말을 직접 보게  그녀는 잔뜩 겁을 먹고 마구간의 근처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안 문다니까."

물기는 하지만 적어도 류드밀라 같은 여자아이는 물지 않을 것이 뻔했다. 본의 아니게 말을 키우게 된 어셔는  녀석이 남자에게는 정말 까칠하게 구는 주제에 여자에게는 환장하는 녀석이라는  알 수 있었으니까. 숲에서 그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던 힐리스란 늑대의 심정이 어땠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진짜?"
"진짜."
"정말?"
"정말이라니까."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도 몇 번째인지 모를 일이다. 겁이 나면 그만두면 될 텐데 호기심을 감출 수 없는지 조금씩이나마 다가오는데.

-푸르릉!
"흐익!"


말이 거세게 투레질이라도 하면 마구간의 기둥 뒤로 황급히 도망치며 원점으로 돌아가는 류드밀라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메디아와 그녀가 다시 만나는 데 오래 걸렸는지  만했다. 숙부인 히스를 닮았는지 인상은 무척이나 날카롭게 생겨서는 정작 본인은 얼마나 소심한가? 그렇다고 그만두지도 않고 말에게 다가오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미련하다 싶었다.

"힘내요! 류다! 정말 얌전한걸요?"


그거 여자한테만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어셔는 꾹 참았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다가오지 못하니 오히려 말이 기다리다 지친 듯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어어?"

류드밀라는 갑자기 자신에게 걸어오는 하얀 말의 모습에 얼이 빠진듯하다 이내 얼굴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그리고 드디어 코앞에 왔을 때. 그녀는 말에게 치이기라도 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눈을 꼭 감았지만.


"읏?!"

그녀는 축축한 것이 볼을 핥는 감촉에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느끼고 기겁해서 눈을 떴다.

"지금 핥은 거야?"

그녀는 멍하니 있다 다시 말에게 핥아졌다.

"우읍! 좋다는 건 알겠으니까 그만 핥아!"
"말도 류다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그녀들은 아무래도 말의 행동이 그녀들을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진실을 아는 어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마음에 들기는 했으리라. 두 사람은 어셔가 봐도 보기 힘든 미모를 가진 아이들이었으니. 저 녀석이 종족을 불문하고 여자라면 가리지 않는 난봉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다른 이들에겐 뭐라 설명할 길이 없으니 그냥 두고 보자 생각한 순간.


"흐이잇?! 어, 어딜 핥는 거야!?"


놈이 혀를 내밀어 류드밀라의 목을 핥는 모습을 보고 어셔는 녀석의 뒤로 다가갔다.


"야."

녀석은 몸을 떨면서도 못 들은  태연하게 굴려고 했지만 그 모습이 더 열받게 만들었다.


"이 발정 난 망아지가!!"
-푸히이이이잉!

 안에 말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류드밀라는 멍하니  광경을 보았다.


"...말이 원래 저렇게 다루는 생물이던가?"
"네, 어셔의 말대로라면 나쁜 버릇은 고치는 게 좋다는걸요."


그녀는 메디아의 말에도 뭔가 아닌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지만 믿기로 했다.


"뭔가 기분 나쁘긴 했으니까. 으으, 축축해."
"닦아줄게."
"고마워."

말의 침에 찝찝해 하는 류드밀라에게 벨카가 다가가 손수건으로 말이 핥으며 묻은 침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말 구경도 끝낸 그들은 그날도 평소와 같이 하루를 보낼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거 기억나시나요?"

자신의 방에 모인 그들에게 메디아가 조심스레 테이블 위에 낡은 종이 한 장을 올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 종이의 정체를 그들은 알고 있었다.

"메아 어머니 방에 있던 지도잖아?"
"그거 들고 있었어?"


종이에 대충 그려진 듯한 영지의 모습은 분명 그들이 그녀의 어머니의 방에 찾아갔을 때 발견한 지도였다.

"그냥 두려고 했었지만 지도 위에 적힌 글자가 마음에 걸려서요."
"글자라고?"


그런 건 없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지도를 보았는데.

"진짜 있네?"

아무것도 없었던 지도의 위에는 파란 잉크로 쓰인 알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지?"
"저도 모르겠어요. 도나르 경에게도 살짝 물어봤지만 모르는 글자라던데요."
"도나르 아저씨도?"

어셔는 좀  자세히 지도 위의 글자를 살펴보았지만 역시 그도 모르는 글자였다.

"그냥 장난 식으로 아무렇게나 써놓은 거 아니야? 글자처럼 보이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것 같다구요."


정작 그렇게 말하는 메디아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풀이 죽은 그녀의 모습에 어셔와 류드밀라가 서로 눈치만 보았을 때 벨카가 손을 뻗었다.


"지도, 잠깐만 볼 수 있을까?"

소녀의 말에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 글자. 알아볼 수 있어?"
"응."


종이를 받아든 벨카는 지도를 유심히 보는 것 같더니 이내 눈을 감고 그  수 없는 글자 위에 손가락을 얹고는 글자들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말괄량이 란에게."
"빛이?!"


조용히 읊조린 그녀의 말과 동시에 소녀의 손가락이 글자의 끝까지 쓸어내렸을 때 벌어진 광경에 그들은 헛숨을 들이켰다. 소녀의 손가락이 닿아있던 지도에서 정확히는 그 이상한 글자에서 푸른빛이 아롱이더니 글자를 이루던 푸른빛은 작은 지렁이처럼 지도 위를 꾸물꾸물 스며들어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지도에 스며든 푸른빛은 천천히 움직이다 지도 안의 어느 한곳에서 멈추어 서서 또 다른 모양을 만들어 내었다.

"이건 퍼스잖아."

마법책을 많이 보았던 어셔였기에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룬이었다. 소녀가 그것을 부른 적이 있었기에 이름 또한 기억하고 있었던 룬이다.


"퍼스라고?  이상한 그림이?"

류드밀라는 알아보지 못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지도를 보았지만 결국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네, 확실해요. 룬이라면 저도 어머님께 배운 적이..."

대신 메디아도 룬을 알아본 것 같았는데 그녀는 말을 하다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소녀를 보았다. 그녀는 이미 지도에서 손을 떼고 눈을 뜨고 있었다.

"벨카, 바, 방금 뭐라고 하셨죠?"


메디아가 다급하게 소녀에게 물었다. 그 모습이 워낙 절박해 보여 그녀를 보고 있으면 벨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괄량이 란에게."
"세상에."


글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어조의 말을 소녀에게서 들은 메디아는 경악한 건지 감동했는지 모를 모습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 끝에.


"...란은 어머님께서 저를 부르던 말이에요."

벨카가 그녀의 어머니가 메디아를 부르던 별명 같은 것을 알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잠깐만 그렇다면 이건."

류드밀라가 다시 지도를 보았다. 아까의 그 이상한 글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 같이 푸르게 빛나는 룬만이 지도 위에 남아 있었다.

"네, 어머님께서 남기신 게 확실해요."

그녀의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에선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지도만 보고 있으니 어셔는 조금 답답해져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요?"
"어머니가 남긴  확실하다며. 안 찾아봐?"

메디아는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어머니께서 저에게 남기신 거니까. 찾아봐야겠죠?"
"그럼 지금 당장..."
"잠깐! 지금 당장은 안돼!"

그때 류드밀라가 당장이라도 지도에 표시된 곳을 찾아가려는 것을 멈춰 세웠다.

"왜?"
"왜냐니! 이 지도를 봐. 이런 걸로 쉽게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건, 좀 힘들겠네."

그녀의 말을 듣고 지도를 다시 보니 그리 쉬워 보일  같지는 않았다. 구획별로 세세하게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도 아니고 영지라는 것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덩그러니 윤곽의 모습만 그려진 정도였으니까. 이런 걸로 저 표시가 있는 곳을 찾으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적어도 내일로 미뤄."
"왜 하필 내일이야?"
"먹을 걸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잖아."
"앗, 그러네요."


류드밀라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어셔는 이곳에 온 지 조금 되어가지만 그래봤자 성 안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고 이 도시의 길도 잘 모른다. 그렇다고 메디아나 류드밀라가 잘 안다고 생각하기엔.

"여기쯤이면 동남쪽인데. 정말 자주 가지도 않는 곳에 있잖아."
"그러게요. 여긴 그다지 볼  없다고 생각하고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지금 그녀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역시 이곳을 찾으려면 좀 더 자세한 지도가 필요할 것 같네요."
"그건 어디서 구하게?"
"으음, 그러게요. 그런 지도는 비싸기도 하고 구하기도 어려우니까요."


함께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그에겐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류드밀라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하아, 내일 아빠한테 들려서 좀 더 자세한 지도를 달라고 해보자."
"류다네 아버지께요?"
"너네 아빠가 쉽게  것 같지는 않은데."

어셔는 히스와 비슷한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려 보았다. 인상은 히스와 전혀 다른데 다른 의미로 깐깐할 것 같은 인상이랄까. 아마 류드밀라에게 잔소리를 쏟아붓지 않을까 싶었다.


"윽, 어쩔  없잖아. 잔소리 듣는  확실하겠지만 그곳 찾아야 할 거 아니야?"
"류다..."

메디아의 감동한 표정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결국 그들은 지도에 있는 곳을 찾아보는 건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 하루 동안은 먹을 것을 챙기거나 또 필요한 것을 이것저것 의논했다. 중간에 어셔는 도나르와 훈련을 하러 가야 했지만 훈련이 끝나고 다시 돌아와서 의논을 계속했다. 사실 중간부터는 필요한 것을 구하기 보다 메디아의 어머니가 무엇을 남겨두었을까? 하는 생각에 서로 예상하는 것을 말해보기 바빴다.

뻔하게도 보물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게 메디아를 위한 것일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냥 서로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즐거웠을 뿐이다. 그러다 어셔는 문득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를 하다 잠들어버렸던 것일까? 멍한 정신으로 주변을 돌아보면 언제 밤이 되었는지 어두컴컴한 방이 보였다. 문제는 이곳이 메디아의 방이라는 것인데 그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그의 팔을 감싼 부드러운 감촉에 돌아보면 그곳에는 잠들어있는 소녀가 있었다. 소파가 넓기도 하고 벨카의 덩치가 작다 보니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오줌 마려운데."


그는 소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메디아는 커다란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는데. 류드밀라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녀의 숙부라던 히스가 데려갔나 싶었지만 류드밀라가 메디아와 함께 잔다는 사실은 어셔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 혼자서 어디로 갔다는 소리인데.


"얘는 또 어디로 간 거야?"

어차피 메디아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기엔 어셔는 그리 대담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같은 나이대의 여자아이들이라 신경 쓰이는데 말이다. 가끔씩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상한 생각이 든다는 게 제일 문제였다. 아무튼 화장실을 찾는 김에 없어진 류드밀라를 찾기로 하며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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