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쌓여가는 것.
"초록 난쟁이들을 구하고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라."
도나르와 함께 출정했던 기사들이 돌아온 뒤. 아이올로스는 게라르두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예, 부관의 보고에 의하면 그렇다 합니다."
"남아 있던 생존자들은 전원 구출. 이런 경우가 또 있었던가?"
초록 난쟁이들이 몬스터들에게서 구출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몬스터들에게 잡아먹힌 자들을 제외한다 치더라도 전원 생존한 경우는 처음입니다."
게라르두스의 말대로였다. 이전에 구출되었던 초록 난쟁이들은 그저 몬스터들과 싸우다 우연히 구해지거나 살아남은 것뿐이었다. 그야 초록 난쟁이들이 마을을 만들면 굴을 파고 내려가 그 안에서 생활하는 탓에 몬스터들은 그대로 그곳에서 번식장을 만들게 된다. 때문에 안의 몬스터들을 섬멸하기 위해 굴속에 불을 지펴 넣어 몬스터들이 도망쳐 나오면 죽이는 간편한 방법을 이용해왔던 것이다.
그 안의 생존자는 물론 질식해 죽겠지만 별다른 방도가 나오지 않았기에 연맹의 모든 영지가 사용해왔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오늘 생존자들이 모두 살아남는 이례적인 일이 생겼다. 그것도 얼마 전에 받아들인 파시페니아의 기사들에 의해.
"날카롭게 갈아놓은 삽으로 땅을 파면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때려죽인다. 정말 어처구니 없이 비효율적인 방식이군."
생존자를 구하는 것은 좋지만 그 과정이 단순하면서도 너무 번거롭다. 가장 큰 문제는 일련의 과정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다는 것이다. 새벽에 시작된 몬스터들의 침공이 오전에 끝이 났는데. 잔당을 처리하고 돌아온 시간이 저녁때다. 초록 난쟁이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기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이번에는 너무 늦었다. 그것은 영지를 지켜야 하는 아이올로스의 입장에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방법은 폐기하시겠습니까?"
게라르두스의 말에 그는 손에 쥔 깃펜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힐디스비니의 억센 깃털 중 펜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것을 선별하여 만들어진 깃펜이지만 그는 보통 장식용으로 남겨두는 잔털을 다 깎아버렸기 때문에 단순한 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작은 열쇠를 꺼내어 잠가두었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있던 것은 힐디스비니에게 붙어있었던 깃털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있는 다른 깃펜이었다.
그의 아내가 선물한 펜이었다. 본래 그녀를 거두어 주었던 초록 난쟁이가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라고 했던가.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아니, 단순하지만 생존자들을 구하기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기사들이어서야 수지가 맞지 않지."
이건 방법의 문제가 아닌 인력의 문제였다. 그는 서랍을 닫아 잠그고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내용을 완성해 게라르두스에게 내밀었다.
"공고를 하나 내도록 하지."
기사들이 아닌 징병 되는 병사들이라도 기초적인 전투훈련 정도는 받는다. 그 과정을 전부 수료하면 나름 쓸만한 수준은 된다. 그는 그들 중에서 지원자를 뽑기로 했다. 이번에 사용된 방법을 전문적으로 하고 다닐 새로운 병과를 창설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기사보다는 봉급이 떨어지지만 그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은 꿈도 꾸기 힘든 액수와 대우였다. 그 내용을 읽은 게라르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복사해 병사들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는 나가기 전에 아이올로스에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일이 많아지겠군."
그런 병과를 새로 만든다는 것은 곧 초록 난쟁이들을 정식으로 영지민으로 대우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일이 많아지는 것은 물론 여러 문제와 소란이 일어날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아마 영지민들의 반발도 상당하겠지.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초록 난쟁이들에 대한 차별이 줄어든다면 그들이 화전 마을을 만들 일도 없을 것이고 그것은 몬스터들의 숙주가 줄어든다는 말과 같았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별을 바라보다 새장을 바라보았다. 새장의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래서 요시프. 마음을 바꾼 이유를 알 수 있겠나?"
게라르두스는 아이올로스에게 보고를 마치고 문밖에서 기다리던 기사와 함께 걸어가며 물었다. 그는 자신의 부관이었기에 그가 초록 난쟁이를 싫어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란투아에 사는 대부분의 이들이 초록 난쟁이를 싫어하기는 하지만 그는 특히 유난이었다. 그런데 그가 4 기사단을 도와 초록 난쟁이들을 구했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도 자신이 한 행동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예전부터 초록 난쟁이에 대해 물으면 단호히 싹을 뽑아야 하지 않겠냐며 주장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독기가 빠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어릴 적 초록 난쟁이들을 숙주 삼아 대량으로 늘어난 몬스터 때문에 가족을 잃은 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을 구한다는 것이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변했다라. 아무래도 4 기사단의 이들이 무언가 영향을 준 것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히스 경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이 내용을 보면 알아서 준비해 주실 거다."
"예."
예전 같았으면 그에게 이런 일을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기사이니 당연히 명령을 어기진 않겠지만 저런 걸 전달하는 그의 마음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으니까. 종이를 들고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이 작은 변화가 싫지 않았다.
"시프, 다녀왔어."
도나르는 게라르두스보다 먼저 보고를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원래는 게라르두스를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일이 오래 걸리니 먼저 가라는 말을 듣고 온 것이었다.
"오늘은 많이 늦었네요?"
"어후, 말도 마. 새벽부터 몬스터들이 습격했는데. 숫자가 어지간히 많아야지."
시프가 자신의 투구를 받아주는 모습에 조금 쑥스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그는 갑옷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재빨리 갑옷을 입고 출정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곁에 두어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한시도 빠짐없이 갑옷을 입고 살아야 했던 때보다는 괜찮았다.
"식사는 제대로 하셨나요?"
"아침은 바빠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점심엔 뜨레스카 말린 걸 몇 개 뜯어먹었어."
그나마 저녁은 출정했던 기사들끼리 만찬장에 모여 늦은 저녁을 먹으며 맥주를 한 잔씩 걸치긴 했다. 여기는 맥주를 옐이라고 부르던가? 지역이 달라서 그런지 아니면 제조법의 차이인지 이곳의 맥주는 그들의 입맛엔 너무 달았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술을 마실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참고로 저녁은 따로 준비되어 있었던 딱딱한 호밀빵과 걸쭉한 비프 스튜였다. 스튜야 간단하게 데울 수 있어서 나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호밀빵을 깨어서 스튜에 적셔 먹느라 고생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부니에트 통조림이었지만.
"부니에트, 통조림이라면..."
그의 말을 들은 시프가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 그것도 나름 보존식품이라고 상단의 식량에 포함되어 있었고 시프도 그것을 먹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식량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에 그분이 사실 그들을 골탕 먹이려던 것은 아닐까? 상단 사람들과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최후의 최후까지 그것을 먹는 걸 미루었는데도 결국 먹어야 할 상황이 와서 전부 먹게 되었는데. 그에 대한 시프의 감상이란.
"이런 말 하긴 조금 그렇지만 쉽비스킷보다 맛이 없는 건 처음이에요."
그것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 우르가 주머니에 놓아두고 잊고 있던 걸 오늘 발견해서 벌칙 게임에 사용했거든."
쉽 비스킷은 그냥 물에 불려먹으면 종이를 씹는 듯한 맛이 나도 적어도 아무 맛도 나지 않고 요리해서라도 맛을 개선할 수 있지만 부니에트 통조림은 그런 게 없었다. 생선 비린내와 뭐라 형언키 어려운 비린내가 뒤섞여서 먹는 것은 고사하고 입에 대는 것도 고역이었다. 덕분에 벌칙에 걸린 2 기사단의 기사들이나 동료들이 살짝씩 집어먹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도 오늘은 너무 많이 일해서 그런가 아직도 좀 출출하네."
그래도 정말 굶어 죽기 직전이 아니라면 부니에트 통조림은 사양이었다. 그렇게 그가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있으니 시프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감탄했다.
"아! 그러고 보니."
"뭐가 있어?"
"일단 씻고 오실래요? 그동안 준비해드릴게요."
안 그래도 땀 때문에 찝찝하기도 해서 몸을 씻고 나오면 그의 손바닥만 한 파이 두 조각을 볼 수 있었다.
"이게 웬 파이야? 직접 만들었어?"
"제가 만든 건 아니에요."
그러면서 그녀가 눈짓하는 곳을 보면 그곳에는 어셔와 함께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가 있었다. 아직 자기에는 이른 시간 같은데 피곤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새근새근 잘도 잔다.
"설마 벨카가 만들었다고?"
"네, 어느 날부터 가끔 저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가르쳐 달라더니 이런 걸 만들었더라고요."
게다가 파이의 위에는 각각 시프와 도나르의 이름이 적힌 작은 팻말이 있었다. 시프가 가져다준 포크로 작게 조각을 나누어 하나 집어먹으면 사과의 달콤한 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맛있는데?"
"그렇죠?"
달기는 하지만 약간의 신맛이 부담스러운 느낌을 잡아준다. 이게 정말 소녀가 만든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시프와 함께 파이를 먹다 보니 어느새 접시 위는 텅 비어 있었다. 덕분에 출출했던 느낌이 사라졌다. 이게 아이를 키우는 기분인가.
"시프."
"네?"
"아이를 낳으면 역시 딸로 하자."
아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딸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이전에도 했던 말이었지만 이번에 그녀는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당신도 참. 그런 게 저희 마음대로 되나요."
"그런가?"
시프가 빈 접시를 주방에 가져다 두러 간 사이 도나르는 침대로 다가가 곤히 잠든 아이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주었다.
"고맙다."
그의 일상에 아이들은 어느샌가 빼놓을 수 없는 가족이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