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쌓여가는 것.
기트는 오늘따라 특히 천근만근한 몸을 느끼며 단출한 방에 들어섰다. 새벽부터 일을 시작했던 탓인지 아니면 아직도 몸이 낯선 이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탓인지 알 길은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미친 듯이 피곤하다는 사실이다.
"하, 이 자식. 청소는 좀 하고 살라니까."
그는 이곳저곳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물건들과 옷가지를 보면서 대충 구석으로 밀어놓고 침대를 보았다. 우르가 허락했으니 상관은 없겠지만 입고 있는 갑옷이 걸렸다. 그냥 벗을까 싶어도 그래도 일하는 중이기에 벗는 것도 문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허리 부분을 고정하는 버클만 살짝 풀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래 봤자 느껴지는 건 딱딱한 투구의 차가운 감촉뿐이었으나 그는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공간만으로도 만족했다.
그저 잠깐 눈을 붙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아빠..."
또다시 지옥에 발을 들이고 있는가? 하필이면 그 아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아빠라 불러주었을 때에. 그는 언제나처럼 손을 뻗었다. 건물의 잔해에 깔려버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그 자그마한 손을 붙잡아 저 끝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잡아야 했다. 설령 그 끝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반드시 잡아야 했다. 겨우겨우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아이의 손을 붙잡는 순간.
"아저씨! 저기 봐요!"
"...어, 그렇구나."
알고 있었다. 이건 그의 기억일 뿐이라는 것을. 그렇게 조용하던 아이가 드디어 그에게 마음을 열고 웃어주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왜 슬픈 것일까. 그는 아이와 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언제나 건틀릿을 쓰고 다니던 그의 손은 아이를 위해 벗어둔 상태였다. 나라의 규칙 탓에 완전히 갑옷을 벗을 수는 없었지만 직접 손을 잡은 곳만큼은 이렇게 맨손이었다. 아이가 그의 손을 잡고 이끈다.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힘이 그는 언제나 무거웠다.
"아저씨, 왜 아저씨들은 항상 가면을 쓰거나 갑옷을 입고 다녀요?"
"그게 규칙이니까."
그들은 어느새 공원이 아닌 작고 허름하지만 아늑한 집에 들어와 있었다. 이때는 언제였더라. 그가 힘들게 얻은 휴일이면 늘 어디론가 놀러 다녔던 그들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어디에도 가지 않고 둘이서 집에 눌러 앉아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거나 신문을 보며 세상 이야기나 했었다.
"이상해요. 그런 규칙."
"어쩔 수 없지. 최근에는 평화로워서 너는 잘 모르겠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끊임없이 드래곤이 습격해왔으니까."
"으에, 그 얘기는 이제 지긋지긋해요."
기사들은 갑옷을 벗어둘 틈이 없었고 여차하면 징병되는 남자들도 보호구를 일상적으로 차고 다니는 것은 필수였다. 이제는 휴일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는데도 이런 풍습이 남아 있는 건 그것이 익숙하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이상해요! 저는 아저씨 맨얼굴 보기도 힘들단 말이에요. 다른 애들도 아빠 얼굴을 그리라고 하면 전부 투구나 가면만 그려!"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규칙이었으니까.
"적어도 집에서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투구만이라도 벗고 다녀요!"
"그럼 그럴까?"
그가 정말로 그녀의 말을 들어줄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의 아이의 모습에 그는 웃으며 자신의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그가 앞을 보면 아이와 집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가운 갑옷들이 쭉 늘어선 광경이 보였다. 얼굴을 만져 보지만 그가 벗었다고 생각했던 투구는 그대로였다.
"기트! 집중 안 하고 뭐 하나! 지금은 훈련시간이다! 지금 훈련이 장난 같아 보이나!"
"아닙니다!"
"아닌데 왜 졸고 있나! 머리 박는다! 실시!"
"실시!"
듣기 싫은 교관의 목소리에 군말 없이 따르고 억지스러운 이들의 말에도 군말 없이 따르며 간신히 하루를 마쳐가면 어느덧 집에 도착하고.
"아, 오셨, 어요?"
어색한 목소리로 집 앞에 나와 그를 반기는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비록 소심한 아이였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뻐 피로가 가시는 기분으로 다녀왔다고 말하면.
"이 역귀 년이! 어디서 빵을 훔쳐 가고 지랄이야!"
어디선가 화가 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골목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그는 그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곳에는 만신창이가 된 아이와 후덕한 인상의 여인이 씩씩 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 도둑을 잡은 지가 언젠데 이제 와! 하여간 우리나라 기사들이란!"
그는 오늘 휴일이었다. 애초에 직접 신고하지 않았다면 근처에 기사가 있지 않은 이상 알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
"아무튼 이 애 좀 치워 봐! 이 역귀 년 때문에 오늘 장사 다 망쳤다고!"
그러면서 그녀는 그를 퍽 밀치고 가버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 보인 건 넝마 같은 천으로나마 만든 붕대로 몸 이곳저곳을 가린 아이였다. 곳곳에 진물과 피가 흐르는 아이는 몸을 벌벌 떨며 차가운 강철 갑옷을 입은 그를 보고 있었다.
"...아저씨도 저를 때리실 건가요?"
이 아이라면 알고 있었다. 역귀라 불리며 골목을 전전하는 아이는 이 구역에서 제법 유명한 사실이었으니. 그는 그런 아이에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꼬마야."
그는 아이에게 손바닥이 보이도록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빠..."
건물에 깔린 아이가 보였다. 그는 손을 뻗었다. 제발 닿으라고 닿기를 원하며. 좁은 틈이 무너져 내려 죽기 직전 누군가 굴속의 그를 끌어당겼다.
"이거 놔! 놓으라고! 안에 이리나가 있단 말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지옥. 그는 아마 이 지옥을 영원토록 버릴 수 없으리라. 아이가 자신을 아빠라 불러주었기에. 건물이 무너지며 그가 강제로 살아남는 순간마다 아이는 그에게 미소 짓고 있었기에. 그가 제 몸이 경련하는 것을 느끼며 번뜩 눈을 떴을 때.
"이, 일어나셨습니꺼?"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맨 처음 그들이 구했던 초록 난쟁이였다. 심지어 그녀의 손이 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몰라 멍하니 있으니.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데이.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서."
"...다 봤나 보구나."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끅, 흑."
그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그녀는 따라들어가도 괜찮을지 고민 끝에 문을 연 방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껴 우는소리에 몸을 굳혔다. 이대로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문을 열지도 닫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로 있던 그녀는 흐느끼는 소리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망설임 끝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멀쩡한 침대도 두고 벽에 기대어 앉아 울고 있는 기트였다. 그가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음에도 마치 갑옷이 울음소리를 내는 것 같은 모습에 그녀는 잠깐 물러났지만.
"미안하다. 그러니 제발. 제발."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애원하는 듯한 소리에 그녀는 물러서던 발걸음을 멈추고 오히려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정말로 자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레 투구의 틈을 통해 안을 살펴보았지만 투구의 안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가 강철 인형이라 말하는 것처럼.
"이리나..."
그는 정말 애원하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였다. 자신들을 구해준 그를 위로하고 싶어서 일어날 때까지 그의 손을 잡고 있으려 했던 것뿐이었다. 그가 입은 갑옷 때문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 같았지만 손을 잡자마자 그가 깨어날 줄은 몰랐다.
"못 볼 꼴을 보여주고 말았구만."
그는 쓰게 웃으며 잠깐 풀어놓았던 버클을 다시 채웠다.
"아, 아닙니더. 그, 멋대로 들어와서 정말로 죄송합니데이."
"생각해 보니 왜 들어온 거냐? 어차피 볼 것도 없을 텐데."
뭔가 노리고 왔다기엔 허술한 그녀의 모습에 의아해하니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그, 구해주신 건 정말로 감사합니데이. 그렇지만 어째서 지들을 구해주신 건지 궁금했습니더."
몬스터들이 그들의 은신처를 습격해왔을 때. 그녀는 동족들이 이제 자신들은 끝이라며 인간들이 자신들을 구해줄리 없다며 절망하는 모습만을 보았다. 그 누구도 자신들을 구해줄 리가 없다며 자포자기한 채 몬스터들에게 죽어나가고 범해졌다. 그런데 그녀가 들은 것과는 다르게 이 기사들은 그들을 구해주었다. 그것도 삽을 들고 힘들여서 그들의 하찮은 목숨을 구했다. 그러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기트라는 이가 그들이 란투아에선 당연하다며 당하고 살던 그녀를 같은 기사로부터 구해주고 삽을 이용해 그들을 구한다는 발상까지 한 그가 정말로 궁금했다. 하지만 역시 실례였을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듯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그뿐이야."
그와 함께 방을 나가기 전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마침 깨우려고 했는데 잘 나왔네."
"잠깐 졸기만 했던 거 같은데 벌써 갈 시간이냐?"
자신에게 말을 거는 도나르에게 기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그런 건 아니고. 이것 좀 봐라."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도나르가 내미는 것을 보았다가 말 그대로 경악했다.
"너 어디서 유물 하나 주워온 거냐?"
기트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나도 이걸 봤을 땐 놀랐다고."
도나르도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손에 있는 것을 보았다. 기트를 따라나온 초록 난쟁이도 그의 손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알아보지 못한 눈치다.
"그게 뭡니꺼?"
호기심이 철갑을 입은 기사들에 대한 두려움마저 이겨낸 것일까? 그녀의 물음에 기트와 도나르는 잠깐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기트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뭐시냐. 간단하게 말하자면 부니에트 통조림이다."
"부니... 에트?"
그녀는 그들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 하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부니에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던 모양이다.
"그, 그그그, 그렇게 귀한 생선 말입니꺼?"
"그렇지."
그들이 긍정하자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통조림을 보았다.
"하지만 지가 아는 부니에트는 엄청 큽니더. 그런 쬐만한 통에."
"당연히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건 아니지. 이건 통조림이라고 일종의 보존식품이다."
통조림이라는 건 여러 가지 가공 기술이 발달한 파시페니아에서 음식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만든 것이었다. 예전부터 그 방법은 존재해 왔지만 그것을 실전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나라는 드물다. 내용물도 그렇고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다.
"대단합니더. 그런 게 언제."
이렇게 그녀가 감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지만 이것의 정체를 아는 그들은 뭐라 하기 힘든 복잡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용물이 보고 싶냐?"
"예?! 괜찮습니꺼?"
"직접 따줄 테니까 보고 생각해 봐."
기트는 도나르에게서 통조림을 받아들고 허리춤에 있던 단검으로 단단한 통조림의 한 면을 가볍게 땄다. 물론 보기보다 얇아서 요령만 있다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대단하다는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자, 여기."
그리고 그녀가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통조림의 안을 보았을 때 마주친 것은 웬 허여멀겋게 죽은 눈알이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이야. 하필이면 마지막 남은 생선 잔해물 통조림의 내용물이 3대 최악 중 하나였을 줄이야."
그래, 그 통조림은 말만 좋아 고급 생선을 썼다 뿐이지 기사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는 최악의 전투식량이었다. 흔하다 해도 차라리 뜨레스카를 말린 것이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나을 지경이니.
"우르 녀석. 그런 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 통조림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우르였다.
"걔도 까먹고 있었는데 나중에 안 쓰던 옷 주머니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더라."
그들은 적당히 휴식도 취했겠다. 마을을 나와 영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도나르는 통조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어딘가 멍한 기트에게 말했다.
"역시 걱정되냐?"
"뭐가."
기트는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었지만 그가 무얼 말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도나르도 마찬가지였다.
"이리나랑 꽤 닮았잖아. 뭐, 안 닮은 점이 더 많기는 한데."
"...그 아이는 이리나가 아니야."
"아무튼 우르랑 다른 녀석들이 해코지 당하는 일 없게 봐준다니까. 걱정 말라고."
그들은 그 말을 끝으로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도나르가 지나가듯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저 그뿐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독립해야 할 이유가 늘어난 거 같다."
기트는 그 말에 도나르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산 위에 있는 광산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웃고 말았다. 그래, 이런 녀석이니까. 그분도 믿고 맡겼던 것이겠지. 기트는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쿠션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