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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화 〉쌓여가는 것. (105/220)



〈 105화 〉쌓여가는 것.

도나르는 그의 말에 답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무슨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녀들을 구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것이 의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은 파시페니아가 아니다. 란투아의 기사들에게 명예란 그렇게 절박한 것이 아니었다. 의무란 영지와 영지민, 가족을, 주군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무에 영지민이 아닌 이들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아직 란투아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직 주군을 섬긴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으니. 이미 그를 구속하던 고국의 의무는 그곳을 떠나오면서. 아니, 반기를 들면서부터 버렸을 터인데. 도나르를 비롯한 이들은 아직도 스스로 그 의무에 얽매여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몬스터와 함께 생존자를 죽여도 상관없다고 하는 그들을 두고 생존자들을 구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면 편한 일이었다. 이곳의 기사들은 파시페니아와는 다르다. 누구든 그들을 존경하였고 그들은 의무와 함께 따르는 권력과 여자, 부를 즐겼다. 그들 또한 이젠 이곳의 기사니 이곳의 기사처럼 행동하면 되지 않느냐? 물음을 던지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건 타인에게 단순히 주입받은 의무감이 아니라.

"단순히 귀찮다는 이유로 사람을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할 방법이 정말로 굴속으로 내려가 몬스터와 싸우는 선택지 밖에 없었다면 도나르는 직접 마른 풀에 불을 붙여 굴속에 밀어 넣었어야 했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을 위해서든. 동료들을 위해서든. 그들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든. 하지만 방법이 있었다. 자신들이 조금만 더 노력하고 조금만 더 고생하면 더 많은 이들이 구해질 수 있는 방법이. 아무리  많은 이들을 구할  있다고 해도 소수의 사람들이  버려져야만 하는가?

"그것이 설령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없는 이들이라도 말입니까? 또한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는 못 써먹을 이들이라도 말입니까?"

그의 말을 들은 기사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도나르는 그에게 오히려 묻고 싶었다.


"초록 난쟁이가 왜 멀쩡한 영지와 마을을 두고 숨쉬기도 어려운 굴을 파서 허가되지 않은 마을을 꾸리는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그래, 왜 이들은 멀쩡한 영지, 멀쩡한 마을들을 두고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고 도움을 구할 수도 없으며 척박한 곳에 마을을 꾸렸는가?

"그건."
"그들의 취급이 어떤지는 익히 들었고 어떤 일을 겪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에게 회색 난쟁이와 인간의 틈바구니에서 산다는 건. 차라리 몬스터의 위협을 받으며 사는 것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초록 난쟁이들을 싫어하시게 된 이유가 있다면 기억나십니까?"


도나르를 비롯한 파시페니아의 기사들은 그것이 어떤 기분일지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도 살고 싶었을 겁니다."

그저 그뿐인 이유였을 것이다. 그들이 굴을 파서 마을로 만든 이유는 최소한 몬스터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들키게 되기 마련. 결국 수많은 초록 난쟁이의 마을들이 이들과 같은 수순을 밟았겠지. 언젠간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앞을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그것만이 살 길이었으므로. 이들에게  명만이라도 친절한 이가 있었다면 이렇게 영지와 마을을 나와 살고 있었을까?

"...구한 이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은 영지민이 아닙니다."

초록 난쟁이란 대부분 란투아에 있어서 허가되지 않은 마을을 꾸렸다가 몬스터의 번식장이 되어 터전을 공격하게 만드는 몹쓸 자들이었다. 더욱이 이미 몬스터들의 씨를 받아들이고 잉태하며 낳았던 이들이라면 어떠할까? 몬스터의 숙주가 되었던 인간도 취급이 그리 좋지 않은데. 하물며 초록 난쟁이라면?


"영지로 데려갔다가 매음굴에 끌려가 땡전 한 푼 받지 못하고 혹사당하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아마 더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기사는 짐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또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 고민하던 도나르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한  여기냐?"

기트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어쩔  없었다.


"너는 뭐 좋은 방법이 있냐?"
"그런 건 아닌데."


그들이 초록 난쟁이들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아이올로스의 영지로 들어가기 전 잠시 들렀던 그리고 아이들과 시프와 함께 살려 했던 광산 마을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하니 기사들은 놀란 눈치다.


"이곳에는 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요. 별다른 문제는 없습니다만."


명반석이나 철광석 같은 여러 자원들이 나오는 곳일 뿐만 아니라 질이 좋은 식용 소금까지 생산되는 곳이라 원래는 독립한 가신에게 주어지는 땅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산 위에 세워진 마을의 특성상 멀리 내다볼 수 있었기에 가장 먼저 봉화를 올리는 곳이기도 한다는데.


"이곳에서 근무한 기사들에겐 꼭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탓에 아무도 이곳을 영지로 삼으려 하지 않습니다."
"고작 그런 일들로."
"전 4 기사단이 몬스터들과 공멸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거리상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 최소한으로 근무하는 인원도 있고 봉화를 위해서나 여러 이유로 발전한 곳이라는 모양이다. 단순한 마을치고 다른 마을보다 거리가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었고 집도  꾸려진 것이 그런 이유였던가. 그들이 구불구불한 길을 타고  위에 오르자 잠깐 보았던 곳일 뿐임에도 어쩐지 그리운 마을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마을로 들어서는 찰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기, 기사 님들이 어쩐 일로."
"퍄랴르 씨, 접니다."
"이 목소리는, 도나르 씨?"

그가 놀란 표정으로 도나르를 바라보았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만 오늘은 쉬는 날입니까?"
"하하하, 허리를 삐는 바람에 그만."


그가 멋쩍은 듯 웃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호쾌한 인상의 회색 난쟁이였지만 과연 이들 또한 초록 난쟁이를 받아줄까? 이미 어떤 반응일지 예상하면서도 그는 지금까지의 사정을 입에 담았다. 초록 난쟁이들을 구해낸 일부터 이들이 갈 곳이 없다는 사실까지.


"끄응, 사정이 딱하다는 건 알겠네만 초록 난쟁이라니."

역시나 꺼림칙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모습에 쓰게 웃었다.

"일단 안으로 드시게. 밖에서 이야기하기엔 그런 듯하니."


그의 안내를 따라 그들은 힐디스비니를 이끌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우르! 잘 지냈냐?"
"오, 도나르. 오랜만이구만!"

그와 같은 갑옷을 입고 밖에 설치된 평상 위에서 무언가 손질하는 모습의 기사는 그들과 함께 왔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한쪽 다리가 끊기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탓에 대부분의 시간을 잠들어 지내야 했던 기사 중에 한 명이었다.

"도나르라고?"
"뭐야. 언제 왔어?"
"샬비 있냐!?"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같이 익숙한 목소리에 그들은 웃음이 나왔다. 아이올로스는 웬만해서는 파시페니아 출신의 기사들은 전부 고용하려 했었으나 그들은 예외적으로 자유가 허락되었다. 부상이 심각하기도 했고 기사 일에서 손을 떼고자 하던 이들이기도 해서 그렇지만 사실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살게 된 대신 일종의 치안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여차하면 봉화를 올리는 것은 덤이다.

"그래서 일은  어때?"
"생각보다 좋아. 마을 사람들도 친절한 편이고 어르신도 계시는 데다 여차하면 뜨루스한테 치료받으면 그만이니까."
"뜨루스도 여기 정착한 거냐?"

그의 놀란 목소리에 우르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그에게 손짓했다.

"말도 마. 깨어났을 때 웬 난쟁이 아가씨가 치료해 주고 있어서 놀랐는데 말이지."
"설마."

그는 이곳을 출발하기 전에 뜨루스의 곁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던 난쟁이 여인을 떠올렸다.


"알고 보니까. 뜨루스 이거더라고."


새끼손가락만 펼친 그의 모습에 도나르는 어이가 없었다.


"그 녀석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게 결정하는 거 아니냐?"

혹시 뜨루스가 호구 잡힌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그는 그래 봬도 능력 하나만큼은 좋은 친구였으니까. 문제는 그 외에는 그다지 능숙한 녀석이 아니라는 건데.

"우리라고 그런 생각 안 해봤겠냐? 지켜봤는데 일단 그런 건 아닌 것 같더라."
"그러면 다행인데."
"그래서 일도 바쁠 텐데 우리랑 대화나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냐?"

그는 괜히 뜨루스에 대해 걱정하다 우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게 말이다."

그 뒤는 퍄랴르에게 설명했던 그대로였다.

"난감한데. 초록 난쟁이의 취급이  정도라."
"그래서 이곳에라도 맡기려 했는데. 역시 사람들 반응이 심상치가 않다."


초록 난쟁이들을 본 주민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수군거리기도 하고 대놓고 경멸을 드러내는 이들도 많았다. 지금도 그들과 기사들이 초록 난쟁이들을 보호하는 형태로 서 있어서 그렇지 아니라면 돌이나 쓰레기라도 던졌을  같다. 그들이 말없이 고민하던 때. 우르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감탄했다.

"아! 정 그렇다면 내가 좋은 장소를 아는데 가볼 거냐?"
"좋은 장소?"

긴가민가하며 그를 따라가자 보이는 것은 봉화와 바로 근처에 세워진 커다란 건물이었다. 건물은 정말 최소한의 관리만 한 듯 언뜻 보면 이곳저곳이 허름한 게 보인다.

"이거 설마 성당이냐?"
"사람들 말로는 그렇다는데  쓴지 오래돼서 사실상 봉화를 관리하는 내 숙소 취급이지."


결국 건물의 크기가 크기인지라  하나만 쓰고 있다고.

"성당이 이렇게 방치되다니. 성지랑 멀어서 그런가?"
"멀기만 하겠냐? 구름 지대 너머라 오지도 못할 텐데."
"그렇겠지."


어지간하면 구름 지대를 건넌다는 미친 생각은 정말로 절박한 사정이 있거나 죽고 싶지 않은 이상에야 건너려 하지도 않을 테니까.


"어쨌든 마을과도  떨어져 있으니까. 여기라면 괜찮지 않겠냐?"
"나쁘지는 않겠네."


우르의 말대로 그곳에서 초록 난쟁이들을 지내게 하고 그곳을 관리하게 하면 어떻겠냐고 하니 퍄랴르는 그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데서나 살다가 몬스터들만 늘리는  사양이니 말이네."


그래도 역시 초록 난쟁이들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거리낄 것도 없이 드러내는 그의 모습에 한숨만 나올 다름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렇지?"


성당의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깨끗한 내부의 모습에 감탄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라 해도 일단 성당이었기 때문인지 어딘가 경건한 느낌마저 드는 내부는 마흔 명 정도는 거뜬히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쭉 늘어선 기다란 의자들을 좀 치워 놓으면 사람이 지내기에도 괜찮을 듯했다. 하지만 그전에.

"조금만 쉬다 갈까."
"너희 일하는 중 아니었냐?"
"뭐, 어떠냐? 이것도 일이지.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면 돼."

그러면서 기사 하나에게 시선을 주니 손을 들어 동그라미를 그리는 모습에 킥킥 웃었다. 란투아의 기사라고 해서 다 딱딱한  아니었으니까. 놀기 좋아하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하지만.

"여기 상당히 시원하다?"
"그렇지. 덕분에  편하게 일한다고."
"잘못하면 이대로 잘  같은데."

성당 내부의 시원한 공기가 밖에서 일하며 뜨거워진 그의 몸을 차갑게 식히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다른 이들도 도나르와 다르지 않았는지 벌써 성당에 배치된 의자에 앉아 있거나 벽에 기대던가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심하면 바닥에 벌러덩 누워있는 녀석도 있었다. 초록 난쟁이들은 적응이 안 되는지 쭈뼛거리며 한곳에 모여 있었지만. 그러다 기트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기트!  지냈냐?"


그 모습을 우르도 보았는지 반긴다.


"흐아암, 나야 잘 지냈지."
"그런데 너희는  다 피곤해 보이냐?"
"새벽부터 일해서 지금까지 한숨도 못 잤다."
"아이고. 여기도 그건 예외는 없나 보네."

몬스터가 자신들을 헤아려 줄 리도 없으니까. 그래도 여긴 그만큼 노력하는 대로 돈이 나오니 만족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 좀 잘만 한 곳은 없냐? 잠깐  좀 붙이고 싶은데."
"저기 내 방 있는데 거기서 좀 자. 난 도나르랑 더 얘기나 하려니까."
"고맙다."


기트가 그렇게 가버리고 도나르는 초록 난쟁이의 거주 문제도 해결했겠다. 우르와 못다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트 녀석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왜 저러냐?"
"트라우마가 떠오른 모양이더라."
"아, 그 녀석 딸이 있었다고 했던가?"


때문에 그들은 피곤에 절어 방으로 들어가는 기트를 뒤쫓아 가는 초록 난쟁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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