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4화 〉쌓여가는 것. (104/220)



〈 104화 〉쌓여가는 것.

"빌어먹을."

도나르는 나지막이 욕을 읊조렸다. 파시페니아, 끔찍하게도 자랑스러웠던 고국. 그는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해왔다. 그중에는 시위하는 시민들을 제압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수뇌부에서는 그들의 시위를 무력시위라 판단했고 곧바로 제압 명령이 떨어졌다. 도나르를 비롯한 이들에게 거부권 같은  있을 리가 없었다.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다며 변명하던 상관처럼 그는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면서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은 것은.

"기트."

그를 붙잡은 이는 기트였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도나르와 기트는 친구보다는 동료라 하는 것이 더 옳았지만 지금까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같은 부대 출신의 동기라는 것이 가장 컸다.

"우리가 삽을  잡아본 지 얼마나 됐더라?"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그는 기트가 자신이 직접 저 굴로 내려갈 것이라는 말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른 뜬구름 잡는 듯한 소리에 어이가 없어진 찰나. 도나르는 뒤늦게 그가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  같았다.

"하, 설마. 너 인마."
"어때? 좀 힘든가?"
"그걸 말이라고."


그는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오는  막을 수 없었다. 설마  지긋지긋했던 일이 지금 해결책이 되어줄 것이라고 도저히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어쨌거나 웃음을 멈출  없었다. 그런 그를 다른 이들이 이상하다는 듯 보았을 때 도나르는 소리쳤다.

"뭐 하고 있냐 이것들아! 삽 정도는 하나씩 들고 다닐 거 아니냐?"

그래, 그 방법이 아무리 힘들고 고된 일이라 해도 가장 안전하게 생존자들을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기꺼이 실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말에 드디어 그 의미를 알아차린 동료들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여기서 나온다고?"
"기트으으!! 도나르한테 무슨 말을  거냐?!"


오두르가 먼 산을 보았고 샬비가 억 소리를 내며 목덜미를 잡았다. 다른 동료들도 그리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하지만 2 기사단의 기사들은 그들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기야 같은 기사라고는 해도 나라가 달랐던 그들과 우리 사이엔 문화의 차이란 것이 있으니까.


"지금부터 우리들이  일은 간단하다. 굴이 정면에 나올 때까지 삽으로 열심히 땅을 파! 생존자를 구출해야지!"
"땅을 파는 중에 몬스터가 나오면 어쩌려고?"
"야전삽이잖아. 그냥 삽으로 족쳐!"


그들의 대화에 그제야 그들이 하려는 일을 알아차리고 당황하는 기사들을 내버려 두고 그들은 두 개의 굴을 각각 파내려 갈 인원을 반으로 나뉘었다. 정작 말을 꺼냈을 땐 그렇게 불평했으면서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초록 난쟁이들의 마을로 통하는 굴은 총 두 개. 초록 난쟁이들의 덩치도 덩치지만 원래 인원수가 많지는 않은 듯 그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끝까지 파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저쪽에서도 땅을  테고 우리가 삽질만 몇 번 해봤냐? 좀 쉬었다고 녹슬었나 보다?"
"으어어, 기트  자식. 나중에 한턱 안 쏘기만 해봐라!"

그들은 이를 갈면서도 열심히 땅을 파내려 갔다.

-키리리릭?
"꺼져!"


그들이 땅을 파면서 굴을 강제로 넓히는 소리가 들렸는지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는 듯 굴속에서 고개를 내미는 데저트 로커스트의 커다란 안면에 그대로 삽의 날로 내려찍어 갈라버렸다. 여차하면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게 삽이 날카롭게 갈려있는 것도 있었지만 데저트 로커스트의 갑각이 그리 단단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렇게 안면이 반으로 갈라진 놈의 목 옆에 다시 삽을 찍어서 강제로 끄집어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삽으로 내려찍어 묵사발로 만들었다.


-끼르...
"다리는 전부 작살내고 머리도 잘라! 급하니까 뒤처리는 나중에 하자고!"

결국 변변찮은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박살 나버린 놈을 뒤로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땅을 파내었다. 수직으로 내려가던 굴은 그들이 판 땅의 높이가 그들보다 높아졌을 때에야 앞으로 통하는 길이 보였다. 초록 난쟁이들이 생활하는 굴의 천장과 넓이는 생각보다 넓은 편이라 그들이 허리만 숙이면 지나가기에도 충분히 넓어 보였다. 하지만  정도로는 역시 그들이 전투를 벌이기엔 부족한 공간이다.

"이거 발광석 아니야?"
"진짜네. 안 그래도 이렇게 굴속에서 살고 있으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걸로 굴속을 밝히고 있었나 보네."


초록 난쟁이들이 촛불 대신 사용하던 것으로 보이는 녹색 빛을 뿜는 머리통만 한 발광석들을 여럿 발견하기도 했다.

-키리..익!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삽질  하고 뭐하고 있냐? 게으름 피우지 말고  파내!"

중간중간 기어 나오는 놈들을 삽으로 찍어 죽여버리면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흙을 파내고 수십 마리나 되는 데저트 로커스트들을 학살했을까? 그들은 드디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야리꾸리한 냄새가 나는 곳에 도달했다. 그들은 이미 놈들보다 색이 옅고 크기를 팔뚝 정도의 크기로 작게 줄여 놓은  같은 모습의 유충들이 달려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놈들의 번식장이 멀지 않았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마침 반대편에서도 그들처럼 땅을 파고  이들이 보였다. 그들이 땅을 파내면서 초록 난쟁이들이 꾸렸던 지하 마을은 땅 위로 훤히 드러나 햇빛을 받고 있었다. 저 굴만을 제외하고. 이 냄새는 그들이 파고 온 굴과는 따로 파놓은 곳에서 풍겨오고 있었다. 저곳이 놈들이 초록 난쟁이의 굴을 차지하면서 정해둔 번식장이리라.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도나르는 마침 근처에 있던 발광석을 들고  안을 살폈다.

"하아... 하아."

그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전에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벽에 조명으로 사용하기 위해 박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발광석들의 애매한 불빛과 가끔씩  불빛을 가리는 움직임뿐이다. 그가 좀 더 자세히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안쪽을 주시하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발광석들의 희미한 빛으로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놈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차라리 그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역겨운 벌레의 아래에 초록 난쟁이 여인 하나가 깔려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데저트 로커스트의 가느다랗지만 길고 억센 다리에 강제로 다리를 벌린 채로 놈이 몸체를 구부려  끄트머리에서 튀어나온 인간과도 유사한 생식기를 강제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초록빛을 띄는 그들의 피부가 발광석의 빛에 더욱 진한 초록색으로 비치며 그녀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끈끈한 액체들마저 초록빛으로 물들였다.


아래의 여인은 실신한  반응도 존재하지 않건만 놈은 제 물건을 여인의 안에서 흔들며 욕구를 채우기 바빴다. 그에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놈들과 생존자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찔꺽거리는 소리.


"으윽."

쾌락 아닌 쾌락을 주입받은 여인들의 기운 없는 신음 소리가 굴 안에 가득했다. 본디 초록 난쟁이들의 보금자리였을 이곳은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한 초록색만이 가득한 몬스터들의 번식장이 되어 있었다. 이 야리꾸리한 냄새의 정체는 여인들이 강제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생긴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비중을 차지하는  놈들이 숙주를 삼을  뿜어내는 것 때문일 것이다.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숙주로 삼는다.

압도적인 덩치를 가진 몬스터들은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 숙주를 범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보다 작은 중형종이나 소형종들은 그러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인지 종종 마약 성분으로 대상을 무력화시키는데 데저트 로커스트도 그러한 부류인 듯했다. 이 여인들이 특히 이렇게 무력한 모습도 그런 이유겠지. 그래도 놈들에게 인간보다 덩치도 작고 제대로 보호받지도 못하는 초록 난쟁이들은 좋은 먹잇감이었으리라.

그는 어떻게든 생존자들과 놈들의 위치를 전부 확인하고 굴 입구에서 몸을 뒤로 물렸다.


"자, 생존자는 14명쯤 되는  같다. 남아 있는 로커스트들은 한창 바쁘신 모양이니 그대로 보내버리자고."


그들은 다시 삽을 들고 그대로 놈들이 번식장이 있는 굴의 벽을 파내 벽을 허물었다.


-끼리릭?!

갑작스러운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놈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달려드는 것은 한참 숙주를 범하느라 바빴던 성체들이 아닌 색이 옅고 수백 마리의 작은 유충들이었다.

"쯧! 이거 아무리 봐도 오늘 습격당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적어도 이틀은 됐겠어!"

그들은 날아드는 유충들을 삽으로 쳐내거나 베어내고 나머지는 그대로 밟아 죽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목표는 지금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성체들이었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놈들은 그들을 경계하면서도 뒤로는 제 생식기를 여인의 안에서 빼내지 않거나 아예 숙주를 범하는 데만 집중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들은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면서 놈들에게 다가갔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그녀들을 놈들에게서 떼어내는 것이었다.


"벽으로 밀어붙여!"


그들은 놈들을 마리당 두 명씩 달라붙어 삽을 이용해 벽으로 밀어붙였다. 아직 생존자가 있는데 몬스터의 피를 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남은 인원은 여인들을 빼내야 하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2 기사단의 기사들이 그들을 도왔다. 도나르는 놈의 물건에 꿰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여인의 몸을 붙잡고 당겼다. 그러자 끈적한 소리와 함께 빠져나오는 놈의 물건과 함께 여인의 아래로 하얀 흔적이 남았다.

모든 여인들을 구출한 것을 확인한 이들은 삽으로 놈들을 제압한 상태 그대로 목을 쳐내버리고 마무리를 지었다. 몬스터의 제압보다는 땅을 파내는 것이 더 힘들었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생존자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후우. 오랜만에 삽질   빡세게 했네."

도나르는 대충 흙을 쌓아 만든 계단에 앉아 삽에 기대어 한숨을 돌렸다. 그들이 삽을 사용하는데 능숙하다고 해도 시간이 걸리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어서 태양이 기울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어셔 녀석 훈련은 못 봐주겠는데."

설마 일이 이렇게 늦어질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이 근처에는 지도에 표시된 마을도 없었기에 단순히 몬스터들을 섬멸시키면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초록 난쟁이들의 화전 마을을 발견한 뒤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설마 사흘 전에 이미 점령 당한 곳이었을 줄이야."

대부분의 여인들은 아직 놈들이 뿜어낸 마약 성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 마을로 안내해 주었던 초록 난쟁이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놈들이 그들의 마을에 쳐들어 온 것은 벌써 사흘 전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놈들이 영지를 습격한  이곳을 나름의 전초 기지로 삼아 이곳에서 번식해 불어난 숫자로 습격을 해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어떻게 혼자 도망친 것이냐는 의문이 남았지만.

"그, 그게 말입니더."

그녀는 놈들이 습격해 왔을 때. 사흘 동안 천들을 몸에 꽁꽁 둘러서 놈들의 시선을 피해 있다가 비상용 통로를 이용해 나왔다고 한다. 도나르는 그녀의 말대로 초록 난쟁이의 덩치로도 겨우 들어갈 법한 지상으로 이어지는 굴을 놈들의 번식장으로 이용되던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우 도망쳐 나왔나 싶었는데 결국 놈들 중 하나에게 들켜서 당할 뻔한 것을 그들이 구해주게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닙니다."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리던 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아까 전 그녀를 발로 차고 짓누르며 강압적으로 행동했던 그 기사였다.

"드문 일이 아니라니. 이런 경우가 흔합니까?"


그러다 그는 생존자가 있는 굴속에 불을 지핀 마른 풀을 집어넣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하기야 이런 일이 드물었다면 그런 것조차 없었겠지.


"예, 대부분 초록 난쟁이들이 이렇게 허가도 없이 마을을 만들었다가 몬스터들에게 습격당해 몬스터를 생산하는 곳이나 다름없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갑자기 많은 몬스터들이 습격해 오는 일이 있으면 꼭 확인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 묻고 싶었습니다. 어째서 그들을 그렇게 힘들여 구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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