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2화 〉쌓여가는 것. (102/220)



〈 102화 〉쌓여가는 것.
류드밀라는 수프를  그릇째 마신 뒤에야 겨우 두통이 가신 듯 한숨을 내쉬었다.

"끄으, 이제 겨우 살 것 같아."
"그렇게 힘들어할 거면서 옐은 왜 마신 거야?"


심지어 그보다 두 병은 적게 마셨으면서 더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얼마나 술을  마시는지  만했다.

"원래는 그냥 1병 정도만 마시려 했단 말이야."


하지만 분위기를 타서 더 마셔버렸다고.

"그럼 그 뒤에 있었던 일은 기억나냐?"
"으으, 무슨 일?"


류드밀라는 소녀가 떠주는 수프를 홀짝이다 이상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중간부터 기억이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싶었지."
"끄응, 잠깐만 나도 3병 정도 마실 때 이후로 기억이 없어서."
"...진짜냐."

 말은 어셔가 기억하는 류드밀라의 모습은 이미 취한 상태였다는 말이었다. 어쩐지 중간부터 감정이 더 격해지는  같더니. 취해서 그런 것이었던가. 그가 어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그녀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후후, 술에 취한 류다 정말로 귀여웠죠."


그때 들려온 메디아의 말에 어셔와 류드밀라는 눈을 마주쳤다. 그래, 지금 이곳에서 옐을 가장 많이 마셨으면서도 멀쩡한 사람, 즉 그들의 행동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동시에 깨달은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은근히 사람을 놀리기 좋아하는 상대가. 류드밀라야 말할 것도 없었고 어셔도 메디아의 성격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리는 모습을 본 그들은 애써 속마음을 진정시켰다.

"어, 어제 내가 무슨 일이라도 했어?"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며 류드밀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메디아는 쿡쿡 웃으며.

"정말 기억 안 나세요? 어제 히스의 품에 안겨서 잔뜩 어리광 부리셨잖아요?"
"내가? 그 양반한테?!"

그리고 돌아온 대답에 경악하는 류드밀라.

"류다도 히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셨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으아아,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그녀는 메디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길 바라듯 물었지만 그녀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우윽! 내가 살다 살다 그 양반한테 어리광을 부리다니!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류드밀라는 충격으로 두통도 잊었는지 부들부들 떨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혹시 뭔가 더 벌인  없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메디아에게 고작 어제 있었던 말을 들었을 뿐인데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벌인 것처럼 괴로워했다. 하기야 아무리 혈육이라지만 친근감은커녕 냉기만 풀풀 날리는 이에게 어리광을 부렸으니 그의 반응이 더 걱정될만했다. 어셔는 아마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한동안 상대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 다른 일은 없었어요. 히스가 류드밀라를 재워주긴 했지만요."
"으아아! 메아, 날 좀 말리지 그랬어? 그 양반 성격이라면 오늘 나를 보자마자 하루 종일 잔소리할게 뻔한데."
"어머, 제가 보기엔 히스도 싫어하는  같지는 않았는데요?"
"좋지도 않았다는 거잖아! 나는 망했어! 망했다고!"


그러면서 주저앉는 류드밀라의 모습은 참으로 허망해 보였다. 어셔가 그녀를 동정하기를 잠시 아직 자신의 술 버릇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떠올린 것이 문제였을까? 곧장 메디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어셔는 포식자 앞에선 초식동물처럼 굳어버렸다.

"그리고 어셔는..."


그가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며 긴장으로 꿀꺽 침을 삼키는 것도 잠시.

"그다지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냥 저랑 같이 푸념을 좀 늘어놓은 정도?"
"휴, 다행이다."
"우우, 그럴 수가. 너는 동지라고 생각했는데."


덕분에 혼자만 흑역사를 쌓은 꼴이  류드밀라는 더욱 절망했다. 그렇게 어셔가 안심할 무렵. 지금까지 류드밀라에게 수프를 떠주고 있었던 벨카가 메디아에게 물었다.


"메디아도 수프, 필요해?"
"그러네요. 딱히 마실 필요는 없을 거 같지만 일단 저도 간단하게 아침은 때워야 할 것 같으니까요. 한 그릇만 주실래요?"

소녀가 다른 그릇에 수프를 떠서 건네주자 그녀는 잠깐 내용물을 살폈다.


"역시 뜨레스카였나요. 나쁘지는 않지만."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떠먹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 배를 채우기엔 아쉬운데 말이죠."

그런 메디아의 모습에 벨카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면 파이 만들어 줄까?"
"네?"


성의 주방은 기본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열리는 만찬장을 위해서만 요리가 가능한 곳이지만 한구석쯤에 따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메디아의 말로는 가신들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곳이라는데 대신 재료는 본인의 부담이라고. 지금 그들은 그곳에 모여 붉은 꼬리를 흔적으로 남기며 주방 안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역시 벨카의  때문이었다.

"파이라니, 혹시 애플파이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그러면서 파이를 만들어오겠다며 방을 나서는 그녀를 그들이 따라나섰던 것이다. 그야 정말로 소녀가 직접 만드는 것인지 궁금했으니까. 그녀를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어셔도 벨카가 요리를 한다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이렇게 그녀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의아하게 바라보기는 했지만 특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거야."

단지 그렇게 말했지만 그들은 아무도 떠나지 않고 소녀가 파이를 만드는 모습을 구경했다.


"진짜 애플파이네요."
"그러게."
"정말로 만들 줄 알았구나."

메디아와 류드밀라, 어셔는 자신들의 앞에서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먹음직스러운 파이의 모습을 보았다. 빵으로 된 겉껍질이 접시처럼 내용물을 감싸고 위에는 격자무늬로 만들어진 빵이 뚜껑의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로 잼처럼 옅은 갈색으로 열에 살짝 녹은 사과들이 얼핏 엿보였다.  그래도 아침에 먹은 것이라곤 맑은 수프가 전부여서 그런지 빵의 고소한 향과 함께 녹은 사과의 달달한 향이 식욕을 자극했다.

소녀는 그들이 완성된 파이를 구경하는 사이 칼을 가져와 파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멍하니 있는 것도 잠시.


"어셔."
"어? 어. 잘 먹을게."


어셔는 가장 먼저 자신의 접시에 놓이는 파이를 보았다. 잘리면서 살짝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뚜렷한 모양을 유지하는 파이는 내용물을 흘릴 듯 말 듯 한 모습으로 접시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메디아와 류드밀라에게도 나누어지는 파이를 보면서 포크를 들었다. 포크로 조각을 다시 나누어 그것을 찍어 한입 먹으면 빵이 으스러지며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을 감쌌다.

"와! 엄청 맛있어요!"


메디아의 말대로 소녀가 만든 파이는 무척이나 맛있었다. 확실히 맛있었지만 어셔는 그녀가 언제 이런  만드는 방법을 배웠는지 궁금했다.

"이런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시프를 따라서."
"흐응, 가끔 시프 씨를 도우러 가신다더니 그런 거였군요?"
"왜, 왜?"

어셔는 파이를 먹다가 자신에게 모이는 메디아와 류드밀라의 장난기 가득한 시선에 당황했다.


"정말 이런 건 좀 빨리 알아채시라구요? 어셔 씨를 위해서잖아요?"


그가 메디아의 말에 뒤늦게 깨닫고 벨카를 보면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하다가도 뭔가 생각났다는  어셔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셔,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 줘."
"응? 그건... 왜."

어셔는 어째서인지 물으려 했지만 그제야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우으, 버겁단 말이야."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파이만 깨작거렸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류드밀라가 한심한 건지 부러운 건지 모를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달아."
"그러네요. 처음 먹을 땐 적당히 달았는데 말이죠."


그녀들의 말대로 파이는 너무나 달았다. 결국 파이는 두 조각이 남았다.


"아오, 더럽게 단단하네 진짜."


기트가 유난히 단단한 게 걸렸다며 바짝 마른 생선을 패대기쳤다.

"야야, 그렇게 험하게 두들기다가 먹지도 못하고 버린다?"


도나르를 비롯해 몬스터를 막기 위해 출정한 기사들은 늦은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바짝 말린 생선을 패대기쳐 부드럽게 만든 뒤 질겅질겅 씹어먹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쉽비스킷보다는 훨씬  단단하고 맛도 더 좋잖아."
"야, 그거랑 비교하지  그건 슬링의 탄환으로 써도  정도라고."

기트를 향한 타박에 괜한 오두르가 기겁했다.


"그렇긴 한데. 뜨레스카는 그냥 먹기엔 좀 비리단 말이지. 차라리 구워 먹던가."
"뭐, 어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지."

뜨레스카는 구름 지대에서 무척이나 흔한 생선이라 이 생선을 주식으로 하는 이들은 많았다. 파시페니아에선 구워 먹는 방식이었는데 란투아에서는 국물을 우려서 수프를 만들어 먹는 것이 보통이라고. 아무튼 엄청나게 싸고 흔한 생선이었다. 이거 덕분에 굶어죽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아무 데서나 다 말려서 보존식으로 쓰지.

"어떻게 고향에서 먹던 뜨레스카랑  차이가 없냐?"
"같은 종이니까 그렇지. 어딜 가나 이건 말려서 먹는다는 규칙이라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그들에겐 그리운 맛이기도 했다. 곧 다시 지겨워질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있었지만 말이다.


"다른 지역이라고 해서 이 비린내에선 벗어날 수 없다는 거냐."

샬비는 좀 과장스럽게 말했지만 이 정도면 그다지 비린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제대로 된 음식이 먹고 싶은데도  때문에 보존식을 먹어야 하니 한탄할 뿐이었다. 게다가 상단처럼  거리를 가는 것도 아니라 돌아가면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비교적 가깝다 보니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이곳 방식대로 끓여먹어도 좋겠지만 주변이 싹 다 농지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보니. 이곳에서 불을 피우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너희도 다른 기사들한테 들었을 거 아니야? 여기선 불을 무기로 활용하기 어렵다고."

실크 모스를 상대할 때도 그랬다. 드래곤처럼 날개의 피막까지 질긴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날아다니는 녀석이라면 불화살만큼 효과가 좋은 건 없겠지만 문제는 란투아가 대규모 농경지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방이라는 특성상 날개에 불이 붙으면 독성 인분에 불이 붙어서 말 그대로 불의 비가 내리게  테고 놈의 몸체에도 불이 붙게 되어 민가에 떨어지면 그건 그것대로 뒷감당이 힘들었다.


"결국 우리들이 고생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지."

따로 앉아서 제대로 식사하지도 못하고 보존식으로 대충 식사를 마치며 그들은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됐고. 다 먹었으면 이제 일 시작하자. 이번엔 남아 있는 녀석들을 싹 다 조져야 하니까."

이번에 습격한 몬스터들은 실크 모스와는 다른 데저트 로커스트라는 이름의 몬스터였다. 본래 사막에서 살던 녀석들이지만 먹이가 풍부한 곳을 찾아 이동하는 탓에 란투아에선 자주 습격이 벌어진다는 듯하다.


"우리 쪽에는 드래곤 때문에 접근도 못하던 녀석들인데 말이야."
"그러면  하냐? 드래곤 자체만으로 재앙인데."

드래곤 때문에 다른 몬스터들이 접근하지 않는 다곤 하지만 그건 빈대 하나 잡겠다고 집을 태우는 격이었다.


"꺄아아악!"

그러다 들려오는 여인의 비명소리에 그들은 대화도 멈추고 곧바로 달려갔다.


-키르르르륵!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달려가자 커다랗고 투명한 갈색 눈에 초록색 몸통을 가진 거대한 메뚜기가 한 여인을 깔아뭉개듯이 올라타고 있었다. 당장 그녀를 숙주로 삼을 생각이었는지 몸체를 아래로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두르!"
-끼기기긱!

그의 외침에 곧바로 슬링의 탄환이 놈의  한 짝을 깨트렸다. 그러자 고통스러운지 몸체를 들썩이는 놈의 목에 그대로 장검을 꽂아 밀었다. 다행히 이번엔 사람과 비슷한 크기의 몬스터였고 무게도 비교적 가벼웠기 때문에 쉽게 밀렸다. 덮쳐지던 여인을 동료들이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그대로 장검을 비틀었다.

-끼륵...!

그러자 기분 나쁜 단말마를 흘리는 놈에게서 그는 바로 몸을 뺐다. 독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몬스터의 체액은  자체만으로 위험성이 높았으니까.

"우웩, 이거 또 있구만."


그는 몬스터의 단면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와이어 같은 것들의 모습에 혀를 찼다. 몬스터의 몸에 기생하는 기생충이었다. 간혹 인간의 몸에도 기생하기 때문에 골치 아픈 녀석들이다. 때문에 몬스터의 시체를 처리하기 어렵게 만드는 원흉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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