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쌓여가는 것.
"거참, 새벽부터 쉴 틈이 없네."
도나르는 자기 위해 벗어두었던 갑옷을 하나 둘 껴입으며 구시렁거렸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잠들어 있어야 했을 시간이었으나 갑작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무슨 일인가 하니 또 몬스터의 습격이라고.
"그러게요. 설마 이런 시간까지 몬스터들이 습격해 올 줄은 몰랐어요."
때문에 시프 또한 덩달아 잠에서 깨어나 그가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파시페니아의 갑옷은 혼자 입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빨리 입을 수 있기에 고마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원래 이러는 게 정상이라고. 파시페니아가 이상하게 평화로웠을 뿐이야."
국민들은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는 동포의 피와 절규로 가득한 세월을 정말로 평화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아마 파시페니아는 지금도 내전이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떠나왔을 때보다 상황이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차라리 드래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습격해오던 과거가 훨씬 더 좋았다는 몹쓸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무거운 책임감이 되살아나 그를 짓눌렀다.
"시프, 나는 아직도 의문이 들어. 정말 내가 그곳을 떠나온 게 잘 한 일이었을까?"
그래서였다. 그런 말을 시프에게 해버린 것은. 도나르는 다시 한번 그때를 떠올렸다. 그를 향해 파시페니아를 떠나라던 그분의 말을. 사실 도나르는 나라를 떠나는 상단 계획에 대해 누구보다 반대했었다. 안 그래도 그들에게 불리한 내전이었다. 그들이 떠난다면 더욱더 불리해질 것이 뻔한 사실이었으니까.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놓지고 싶지 않아서 더 많은 이들을 구하고 싶었기에. 하지만 그는 이곳에 있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괜찮을까?"
아직도 많은 동포들이 그곳에서 죽고 죽어가고 있을 텐데. 이곳에서도 많은 이들이 몬스터들에게 죽어나가고 있는데. 그는 이곳에서 이렇게 적응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시작된 사치스럽고도 단조로운 일상이 그는 때때로 숨이 막혀버릴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런 그를 시프는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시프?"
"미안해요. 저는 도나르가 어떤 마음일지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그녀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그분의 말씀과 다른 사람들의 말을 엮어서 조심스레 예상해볼 뿐이었다. 그런 건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할만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도나르는 그분이 걱정되는 거죠?"
"...어."
그분에게 입은 은혜가 너무나 컸지만 그분에게 은혜를 갚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그를 괴롭게 했다.
"사실은 저도 그래요. 그래서 계속 그분의 곁에 있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렸었는데. 그분은 저를 마차에 태우면서 저에게 행복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시프는 마차에 반쯤 강제로 태워져 그곳을 떠나왔다.
"저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왜 저는 그곳에 남을 수 없었을까요? 제가 그곳에 있으면 왜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걸까요?"
특히 판에게 그런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마차에 자신을 태워보낸 그가 잠깐이나마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요. 그리고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니라 도나르 덕분이에요."
시프의 말에 도나르는 떠올렸다. 그녀를 지켜달라던 그분의 말씀을. 실패하고 말았던 그 부탁을.
"그러니까 괴로워하지 말아요.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는 사실만큼 저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는걸요."
그 말이야말로, 그녀야말로 그의 구원이었다. 그는 그녀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시프 또한 그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고마워. 시프. 덕분에 좀 정신이 드네. 난 이제 일하러 가볼게."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렇게 남은 갑옷을 껴입은 그가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후아."
"이런, 나 때문에 깬 거냐?"
옆 침대에 잠들어 있던 아이들 중 소녀가 부스스 일어나 반쯤 감긴 금빛으로 그를 보았다.
"어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말이다. 어셔한테는 오후에 훈련하자고 해. 너는 좀 더 자고."
혼자 훈련을 하게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술을 좀 과하게 마신 모양이니 아침엔 좀 고생할 것을 생각했다. 아무리 성년이라 해도 아직 어린 나이인데 대체 뭐가 그리 힘든 일이 많은지 술을 잔뜩 마시고 곯아떨어진 어셔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벨카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시프의 배웅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단장이라는 양반이 제일 늦으면 어떡하냐?"
"꼬우면 네가 단장하던가."
"우우~ 행패다!"
그는 동료들과 장난스러운 타박을 주고받으며 출정을 서둘렀다. 이 소중한 일상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끄응."
어셔는 머리를 울리는 것 같은 어지러운 감각에 잠에서 깨어났다.
"물, 물 좀."
"여기 있어."
그리고 느껴지는 타는 듯한 갈증에 생각보다 먼저 몸을 일으켜 물을 찾으면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차가운 유리잔의 감촉이 그의 손에 닿았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대로 유리잔의 물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입을 거쳐 목 안을 타고 흐르자 겨우 가신 갈증과 맑아진 정신으로 주변을 보면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방과 작은 서랍장 위에 물병을 놓아두는 벨카가 보였다.
"아, 새벽 훈련 나갔어야 했는데."
시간을 보면 이미 한참 늦은 것 같았지만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싶어 일어나려던 그를 소녀가 붙잡았다.
"벨카? 무슨 일이라도."
"새벽에 몬스터가 쳐들어와서 훈련을 오후로 미룬다고 전해 달랬어."
어셔는 그녀의 말에 강제로나마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눕혔다. 웬만하면 바로 훈련을 하러 갔겠는데.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려서 도저히 무리였다. 소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걱정스레 그의 이마를 쓸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길에 조금 괜찮아질 것도 같았지만 여전히 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벨카가 물었다.
"아직 힘들어?"
"잘못하면 토할 것 같아."
멀미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멀미 같은 건 아니었다. 지금은 마차를 타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대체 뭐가 문제인가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이라고 한다면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어제 메디아가 류드밀라의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며 가득 들고 와서 마셨던 옐이었다. 그게 제법 맛있어서 덩달아 많이 마셨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았다. 술이라는 게 이런 것이었던가? 어셔가 아직도 머릿속을 울리는 통증이 가시질 않아 괴로워할 때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일어났니?"
"시프 누나."
시프가 쟁반에 그릇 하나와 숟가락 하나를 들고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내밀어진 그릇의 안에는 무언가 생선의 살 같으면서도 딱딱해 보이는 것이 투명하고 노란 국물 안을 떠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뭐예요?"
"아침 식사 때 남은 게 있었는데. 마침 숙취해소에 좋다기에 받아왔어."
시프의 말에 납득했지만 그릇은 하나뿐이었다. 벨카도 같이 옐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벨카는?"
"나는 필요 없으니까."
소녀는 그릇과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는 숟가락으로 그릇의 내용물을 떠서 그에게 내미는 그녀.
"그, 벨카?"
"?"
"나 혼자서 먹을 수 있는데."
어셔의 알아서 먹겠다는 말에도 소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숟가락을 내밀 뿐이었다. 그냥 둘만 있었다면 신경 쓰지 않고 먹었겠지만.
"그럼 나는 이만 일을 하러 갈 테니 느긋하게 있으렴."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시프는 장난스레 웃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결국 어셔는 한숨을 내쉬며 소녀가 내미는 수프를 받아 마시자 그 향처럼 구수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이거 제법 괜찮네?"
끓인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뜨뜻한 수프가 속을 진정시켰다. 덕분에 소녀가 숟가락에 담아 내미는 국물을 그대로 마시다 보니 그릇 안의 내용물을 전부 해치운 후였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때쯤에는 머리를 괴롭히던 두통도 한결 나아졌지만 정작 할 일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침 식사를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 같았고 또 훈련은 오후로 미뤄졌다고 하니 참 애매한 시간에 깨어버렸다. 그러다 소녀가 쟁반에 그릇과 숟가락을 올리고 들고 가려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디 가려고?"
"다 먹으면 주방에 가져다주면 된다고 했으니까."
"그럼 같이 가자."
어셔는 그녀가 들려던 쟁반을 대신 들어주었다. 벨카는 자신의 일이라며 다시 받아들려 했지만 그는 이런 걸 같이 가져가 준다고 해서 혼날 일은 아니라며 그녀와 함께 주방으로 갔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거였어요?"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신청했었거든."
그리고 주방에서 일하던 시프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보다 마침 잘 됐구나."
그녀는 그러면서 커다란 냄비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 아가씨께 가져다주겠니?"
"메디아한테요?"
그는 어쩐지 아침 식사로 타이밍 좋게 숙취해소에 좋다는 수프가 나왔었는지 이상했었지만 어제 자신만 옐을 마신 게 아니었다는 걸 생각해냈다. 메디아는 이 성의 아가씨였고 류드밀라도 결코 낮은 신분은 아닌 것 같았으니 둘을 위해 준비하는 겸 식사용으로 함께 준비했던 것이리라.
"벨카한테 가져다 달라고 하기엔 너무 무거워서 직접 가져갈까 했는데. 설거지 거리가 아직 많이 남아서."
은색 광택이 나는 커다란 냄비는 척 봐도 무거워 보였는데 직접 들어보니 안쪽에 가득한 그 내용물 때문에 어셔가 들기에도 꽤 버거운 무게였다.
"알았어요."
이런 잔심부름이라면 익숙한 어셔였기에 순순히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럼 부탁할게."
이런 걸 벨카에게 들게 할 순 없었으니까. 메디아는 딱히 소녀를 부려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벨카는 어딘가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일은 일이라며 메디아를 보살폈다. 하는 행동을 보면 시녀보다는 보모 같았지만 아마 그가 따라오지 않았다면 이 무거운 걸 들고 가려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들에게서 어제 기억이 사라진 후가 어땠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소녀를 따라 메디아의 방문 앞에 섰을 때였다.
"우아아아아!!"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소리가 안쪽에서 잘 안 들리는 편인데도 문밖까지 울려 퍼지는 요란한 비명에 어셔는 잠깐 멈춰 섰지만 소녀는 멈칫하는 일도 없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그리고 들려오는 건 지극히 평온한 메디아의 목소리. 방금 전에 들려온 비명과는 너무 다른 분위기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어머, 마침 잘 들고 오셨네요! 안 그래도 류다가 슬슬 버티기 힘들어 보였거든요."
방 안에는 머리를 한 손으로나마 부여잡고 끙끙 앓는 류드밀라와 아픈 기색도 없이 그들을 반기는 메디아의 모습을 보고 그 비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류다. 일어나 보세요. 수프라구요?"
"끄으으응."
그녀의 말에 힘겨워하면서도 겨우 몸을 일으킬락 말락 하던 류드밀라는 어셔가 간이 식탁 위에 올려둔 냄비를 향해 어기적어기적 기어 와 간신히 그 앞에 자리 잡았다. 그러자 벨카는 따로 가져온 그릇에 냄비의 내용을 떠먹여주려는 것 같았지만 류드밀라는 그대로 소녀가 뜬 그릇째로 들고 수프를 들이마셨다.
"으으, 한 그릇 더."
벨카는 한동안 끙끙 앓는 류드밀라를 위해 계속 수프를 떠주어야 했다.
"숙취라는 게 저렇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나?"
정작 그녀와 비슷하게 마신 어셔는 상당히 아프기는 했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노력하면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숙취라는 게 원래. 사람마다 다르다더라구요. 류다는 술에 약한데 어제 그렇게 많이 마셨으니까. 어쩔 수 없죠."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류드밀라가 저렇게 구는 것을 보면 이 수프는 이제 온 것이 분명한데.
"어째 넌 멀쩡하다?"
"저는 예전부터 술에는 강했으니까요. 10병 정도는 문제없답니다?"
"뭐."
어셔는 간신히 떠올렸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기억했을 때 마셨던 병의 숫자는 5개였고 류드밀라도 그쯤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녀의 절반쯤 마신 류드밀라는 저 모양이고 어셔도 저만큼은 아니지만 고통스러웠는데. 혹시나 싶어서 아직 류드밀라에게 수프를 떠주던 벨카에게 물었다.
"혹시 벨카는 어제 옐을 몇 병 마셨어?"
"한 잔만. 그 이상은 힘들 것 같아서."
소녀가 멀쩡한 건 그냥 적게 마셨기 때문인 듯했다.
"우리는?"
"메디아가 10병, 어셔가 6병, 류드밀라가 4병이었어."
생각보다 1병씩 차이가 났지만 그래도 메디아가 마신 옐의 양은 정말로 많았다. 아무리 술을 마시는 것에 개인차가 난다지만 제일 많이 마신 메디아가 가장 멀쩡하다는 사실에 어셔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