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8화 〉쌓여가는 것. (98/220)



〈 98화 〉쌓여가는 것.

파벨과 대련을 끝낸 로기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연무장에서 계속 훈련을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도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아니었다. 그래서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막상 할 일이 없어서 그냥 돌아다니고만 있었다. 같이 놀만한 아이들이 있었다면 어울렸겠지만 그는 이곳에서 친구라고 할만한 이들을 사귀지 못했다. 원래 상단에 있던 아이들이 있었다면 그들과 놀기라도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성에 남은 제 또래의 아이도 없다.


그렇다고  성의 아이들과 놀기엔  내키지 않아서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이곳에서 겉돌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기사가 되고자 하기는 했지만 그건 살아가고자 하기 위함이었지 특별히 동경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왜 걷고 있는지  살아가고 있는지도 알  없었다. 그러던 그때 그의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너네 아빠는 벨카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건데?"
"그건  말씀드릴 테니까요."

투덜거리는 어셔와 어쩔  없다는 듯 쓰게 웃는 메디아.

"그러고 보니 나도 벨카를 처음 봤다기엔 뭔가 많이 익숙한데. 너희  도시에서 살았던가?"
"그럴 리가 우리는 여기 온 지 이제 일주일쯤 됐다고."

하얀색과 검은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난쟁이, 류드밀라와 조용히 그들과 함께 하는 벨카까지. 어느새 친해진 네 사람이 왁자지껄 떠들며 복도의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로기는 걸음도 멈추고 그들을, 벨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소녀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텐데. 그를 알아차렸는지 어셔가 그를 보고 얼굴을 구긴다. 때문에 메디아와 류드밀라도 그를 알아차린  그를 보았다.

로기는 언뜻 금빛과도 마주친 것 같았지만 소녀는 어떠한 반응조차 보이지 않고 그들과 함께 그를 스쳐 지나간다. 자신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무관심한 모습에 조금이나마 잊혔던 아픔이 가슴을 찔렀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싶어도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저 붉은 꼬리만을 흔적으로 남기고 멀어져 가는 소녀와 그들의 뒷모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이 아프다. 끔찍한 공허함이 가슴에 스며들어 구멍을 내버린 것만 같아 끝끝내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로기는 주저앉고 말았다. 소녀는 매정하게도 단 한 번도 그를 뒤돌아보지 않았다. 로기는 자신이 왜 필요 이상으로 파벨과의 대련에서 전력을 다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또 다른 자신이었으므로.


"저분 어셔의 대련 상대였죠?"
"몰라, 저런 녀석 따위."


그들은 벨카가 아이올로스에게 불려가면서 그녀를 데려다주었다가 아이올로스의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오는 길이었다.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몰라도 얼마 걸리지는 않았지만 어셔는 그가 벨카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짐작할  없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메디아가 알 것 같다고 해서 그녀를 따라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럴 때 하필 로기를 마주치는 바람에 어셔의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

"얘 갑자기 왜 이래?"
"글쎄요. 저도 대련 때 어셔가 매번 지는 상대라는 것밖에는 잘 모르겠는걸요."
"그런 걸로 이렇게 상대를 철천지원수 보듯이 한다고?"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로기를 만나고 유독 불편한 기색의 어셔를 이상하게 보았다.

"너는 따로 아는  있어?"
"미안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아무리 봐도 단순한 승부욕으로 보기엔 이상한 어셔의 모습에 류드밀라가 벨카의 귀에 속삭이며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거부였다.


"아무리 봐도 뭔가 있는 거 같죠?"
"그런 거 같지?"

그녀들은 그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구태여 캐묻지 않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일쯤은 있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곳은 어느 방 앞이었다.


"여기는 왜? 다른 사람  아니야?"

메디아를 따라온 어셔는  방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문을 잠그고 있는 자물쇠가  화려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다른 방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 같았다.

"너무 조급해하시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메디아는 자신의 품에서 열쇠를 하나 꺼내들어 문을 잠그고 있는 자물쇠에 끼워놓고 돌렸다.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열리는 자물쇠.

"여기  방 아니지 않아?"
"일단 들어가 보시면 알 거예요."


어셔는 그녀가 태연히 문을 여는 모습에 혹시 귀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이올로스가 벨카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가르쳐 준다고 했지 않았던가? 이 방이 어째서 그 이유와 관련되어 있는지 이해할  없었다. 적어도 방안의 풍경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곳에는 한 사람을 그려놓은 그림들과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 낡고 먼지 냄새가 나는 가구들이 가득했다.

누군가 꾸준히 이곳을 찾아와 청소하는 것처럼 장신구에는 먼지 한 톨 묻어있지 않았으며 가구들도 깨끗해 보였지만 낡은 흔적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멈춰버린  같았다. 하지만 어셔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건.

"이거 설마 전부 벨카야?"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붉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대체 일주일 사이에 언제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렸는지 이해할  없었을 때. 메디아가 그의 말을 부정했다.

"이분은 벨카가 아니에요."
"...기억났어. 안 본 지 오래돼서 가물가물했는데. 벨카와 메아의 어머니, 너무 닮았잖아."

이어지는 류드밀라의 말에 어셔는 놀라고 말았다.

"그러면 이건."
"네, 전부 어머님의 초상화와 물건들이에요."

메디아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초상화들을 자세히 보았다. 처음에는 너무 똑같아서 착각했지만 이제 보니 눈동자가 다르다. 벨카의 눈동자는 금색이었지만 초상화에는 메디아처럼 자수정 같은 자줏빛 눈동자가 그려져 있었으니까. 좀  자세히 차이점을 찾으면 벨카가 어디까지나 소녀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면 초상화 속의 그녀는 미세한 차이로 여인이라 부르는 것이  알맞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가장 큰 초상화의 이야기였다.  외에도 다양한 모습들이 크고 작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으니까. 어떤 그림은 조금 더 어린 모습으로 티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었고 또 어떤 그림은 책을 읽는 모습도 보였다. 누군가와 놀고 있는 듯한 어떤 그림은 눈동자 색이 다르지만 않았다면 벨카와 정말 똑같았다. 그 그림들을 하나씩 보고 있으면 점점 어려지고 있는 모습 같기도 했다.


어셔는 혹시 벨카는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에 힐긋 소녀를 보았지만 자신과 일부분을 제외하면 완전히 똑같은 모습의 그림들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없는 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성에서  사람을  적이..."


그는 생각 없이 말하다가 두 팔을 교차하며 휘파람 소리가 날락말락  정도로  소리를 내는 류드밀라를 발견했다. 때문에 뒤늦게 입을 다물었지만 메디아는 이미 그의 말을 들었는지 표정이 어둡다.

"어머님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니까요."

메디아는 소녀와 한없이 닮은 초상화  하나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이미 유리와 액자로 보관 중인데도 잘못 건드리면 흠집이라도 내버릴까 조심스럽지만 진짜 어머니를 대하듯 애틋한 손길이었다.

"그, 미안."

류드밀라의 한심하다는 눈길에도 어셔는 할 말이 없었다. 이건 확실히 그의 잘못이었으니.

"후후, 아니에요. 어차피 이곳을 보여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어머님이 돌아가신 게 어셔의 탓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곧 초상화를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저는 벨카에게서 어머님의 모습을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만 벨카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던 거예요."

어셔는 메디아가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느꼈다. 이 그림만 보아도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눈동자만 아니라면 정말 똑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아버님도 저와 같을 거라 생각해요."


그는 다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벨카와 너무나도 닮은 여인을.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림 속의 여인은 생동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아이올로스와 같은 일을 겪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저 상상만으로도 다리가 풀려버릴 듯한 느낌에 어셔는 겨우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벨카는 벨카고 어머님은 어머님인걸요."

애써 미소 짓는 메디아의 모습이 애처로워 어셔는 더욱 몸집을 부풀리는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들이 그렇게 방안에 가득한 여인의 초상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메아, 여기 원래 이런 게 있었던가?"

류드밀라가 무언가 발견했는지 이상하다는  말하자 그들의 시선은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침대의 끄트머리, 매트와 지지대 사이가 나왔다. 그곳에는 웬 종이 쪼가리의 끄트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던 것이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요..."


메디아는 확신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면서도 조심스레 침대의 사이에 끼워져있던 종이를 빼내었다. 그렇게 빼낸 종이는 이 방의 세월만큼이나 묵었는지 너덜너덜하고 누렇게 변해있었다. 메디아가 혹시라도 찢어질까 조심스레 종이를 펼치자 나오는 건.


"""지도?"""

그들의 말이 겹쳤다. 그건 누가 봐도 지도였으니까.

"이거 아무래도 영지의 지도 같은데요?"
"세세한 부분까지 나와 있지 않은 걸 보면 시중에서 팔던 것 같지만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확실해."


메디아의 말에 류드밀라도 동의했다. 하지만 어셔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여기 지도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는데? 세세한 부분은 안 나와 있다며."
"영지의 자세한 곳까지 기록한 지도는 아이올로스 님과  측근 밖에 안 들고 있어. 그분들 외에 그런 걸 가지고 있으면 사형감이라고."
"고작 그런 거 가지고?"
"고작이 아니야. 엄청 중요해."

잘못해서 그런 게 적대적인 영지의 손에 들어간다면 공략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그녀의 말에 어셔는 수긍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왜 지도가 있는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종이의 상태를 보면 이곳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전 이런 건 한 번도."

문득 메디아의 말이 멈추었다. 대체 무엇 때문인지 류드밀라가 지도를 확인하려 했지만.

"이곳에 계셨습니까? 아가씨. 류드밀라도 함께 있었군요."
"히스."


히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무산되었다.

"윽, 숙부 님이 이곳에는 왜."
"류드밀라, 아버지가 찾으신다."


그의 말에 류드밀라의 표정이 굳었다.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일까? 가족을 만나러 가는 것치고는 질색하는 것 같았다. 메디아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요. 류다."
"하지만."
"약속했잖아요? 류다가 혼나야 한다면 제가 혼나겠다고."
"....고마워."

그녀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어셔는 슬쩍 물었다.


"그런 거라면 우리도 따라가도 상관없지?"

그의 말에 메디아와 류드밀라가 놀란 듯 그를 보았다. 그의 뒤에 얌전히 있던 소녀 또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발견한 그녀들은 웃으며 수락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류드밀라나 그들이 같이 혼나는 일은 없었다.

"어이구! 메디아 아가씨! 제 못난 딸이 폐를 끼치지는 않았는지요?"
"폐라니요. 류다와는 다시 만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히스의 안내를 따라서 어셔가 그녀들과 함께 류드밀라의 아버지가 있는 손님방에 도착했을 때. 그들만 들어왔을 땐 근엄한 표정을 짓다가도 메디아가 방에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친근감이 느껴질 정도로 푸근하게 변해 아첨하는 사내가 있었다. 말하는 것으로 보면 류드밀라의 아버지라는  확실한데. 어셔는 이 정도로 순식간에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기겁했다. 그놈의 아첨은 언제 끝나는지 너무나 길어서 벨카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너네 아버지 원래 저러시냐?"

심지어 자신의 딸을 격하시키는 듯한 말까지 서슴없이 하니 어셔가 언짢은 표정으로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야. 늘 저랬어."
"네가 왜  아빠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다."


류드밀라는 그의 말에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만! 저는 당신의 아첨이나 들으러 온  아니에요! 그리고 류다는 제 친구예요. 제 친구를 깎아내리는 말은 그만두세요!"

아마 메디아가 끝내 화가 나서  소리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 오랫동안 붙잡혀 있어야 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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