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쌓여가는 것.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알고 있겠지?"
파벨은 그의 위에서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에 몸을 굳혔다. 그의 아버지, 그레고리의 목소리는 그가 평소 듣던 것보다도 훨씬 더 굳어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을 꾸짖기 위함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욱 반발하고 싶었다. 이런 상황에선 조금쯤 자신의 편을 들어주면 어디 덧나는가?
"그건 그 녀석이 먼저!"
"끝까지 날 실망시키는구나. 파벨."
때문에 충동적으로 거짓을 내뱉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욱 엄해진 아버지의 목소리.
"내가 사실 여부조차 알지 못하고 널 혼 내려는 것이라 생각한 거냐?"
그의 말에 파벨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아버지는 근위대의 단장이었다. 일의 특성상 다른 기사들보다 출정하는 빈도는 드물지만 성에서 머무르는 일이 많고 그만큼 성내의 소식에 민감했다. 그런 그에게 파벨은 뻔한 거짓말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한 것이다.
"아니... 요."
그것을 알기에 그는 뒤늦게나마 잘못을 인정했다.
"나는 네가 한 짓을 대부분 알고 있다. 정말 네가 저지른 일들을 듣고 있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더구나."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말에 약간이나마 들었던 죄책감도 분노가 되었다.
"윽!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아버지가 뭘 아시는데요!?"
언제나 엄격했던 아버지였다. 이 성의 주인인 아이올로스 님의 옆을 지키고 가장 신뢰받으며 뛰어난 기사인 그를 언제나 존경했다. 파벨은 그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엄격한 훈련을 빠짐없이 받아왔고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일을 해내고 대련을 할 때마다 승리를 쟁취했다. 다른 어떤 아이들보다 더 뛰어나고 강했기에 인기를 얻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선망의 시선을 받는 것이 좋았다.
그럴수록 자신의 아버지에게 더욱 가까워지는 것 같았으니까. 누구보다 뛰어나다면 그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를 칭찬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혼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또래의 견습 기사끼리 이루어지는 시합에서 우승했을 때도 아버지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던 놈들을 두들겨 팼을 때도. 그는 칭찬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더 정진하라거나 왜 그랬냐는 추궁뿐.
그들의 방에 돌아오는 일도 드문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기는 했는지 의문이었다.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는 여자가 탐이 나서 빼앗고자 결투를 신청했지."
그 말에 파벨은 들켰다기 보다 알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너는 기사가 아니다. 하물며 결투라는 건 기사들에게도 거의 금기시되는 일이다. 그런데 최소한의 자격도 없이 개인적인 욕망으로 결투를 신청했구나. 그것도 내가 옛날에 쓰던 장갑으로."
그가 들어 보인 건 파벨이 들고 있었던 낡은 장갑이었다. 아버지인 그가 버릴 것이란 말에 버리는 척하면서 몰래 숨겨두었던 장갑이다.
"그리고 여성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욕탕 탈의실에 유독 습기가 많이 찬다는 말도 들었지."
이어지는 그레고리의 말에 그의 몸이 굳었다.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의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샬럿이라는 하녀가 알려주었다."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이미 오래전에 들켰다는 사실에 파벨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가 말하기를 그녀는 처음에는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끼지 않던 습기가 끼고 자신의 속옷에 아무리 봐도 물과는 다른 것이 묻어있어서 욕탕을 들어가는 척하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탈의실을 엿보았다고. 모든 것이 들켰다는 사실에 파벨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면 어째서 그때 저를 혼내지 않으신 건데요?"
그가 아는 아버지의 성격상 그를 혼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자신을 혼내지 않았는가?
"원래는 나도 그러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너를 혼내지 말라 부탁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그녀를 협박해서 입을 다물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네가 아직 어리다며 여자에게 한참 호기심을 가질 나이라며 말렸다. 나는 그 말이 타당하다 여기고 너를 내버려 두었다. 언젠가는 그만둘 거라 생각한 거지."
그의 아버지라면 누군가 말리지 않는 이상 분명히 그를 혼냈을 사람이라는걸.
"하지만 이번 일은 어떤 변명을 갖다 붙여도 너의 잘못이다."
너는 기사의 명예를 들먹인 주제에 기사들에게 금기시되고 자격조차 없는 결투를 신청하고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자 멋대로 상대를 판단하여 비겁하고 수치를 모르는 방법으로 한 사람을 괴롭혔다. 상대를 모욕하기까지 했지. 그로서 기어코 결투를 벌여놓고 꼴사납게 패배했다.
"따라와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보호구와 가검을 차고 와라"
그리고 그가 데려온 곳은 연무장이었다. 이미 예상한 바였다. 아버지가 그를 혼낼 때 주로 이용하는 것이 실전에 가까운 대련이었으니까.
"이 사람들은..."
하지만 그곳에는 어셔와 대련을 하던 로기와 파시페니아에서 왔다는 기사들 중 한 사람이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고리는 그 기사에게 다가갔다.
"제 요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비 경."
"아닙니다. 아이들끼리의 대련이라면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될 테니 말입니다."
파벨은 그레고리가 자신에게 무엇을 시킬지 알 것 같았다.
"저 아이와는 이미 이야기해두었다. 신호를 주면 시작해라."
대련이었다. 그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셔는 실력이고 뭐고 간에 발휘할 틈도 없이 비겁한 수를 써서 일방적으로 맞고 패배하고 말았지만 많은 기사가 애용하는 장검은 파벨의 특기였던 것이다. 그레고리는 저 녀석에게 지는 것을 원하겠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니까. 이거라면 파벨은 자신이 그의 생각보다 더 훌륭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신호가 울려 퍼졌을 때.
파벨은 곧바로 로기에게 달려들며 가검을 휘둘렀다. 로기가 어셔를 매번 이기던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어셔는 별 볼일 없는 녀석이었다. 비겁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정식으로 싸운다면 그가 쉽게 이길 수 있었다. 이 녀석을 쓰러트리면 그가 뛰어나다는 것과 동시에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그래서 너무 방심했던 걸지도 모른다. 다음 순간 볼 수 있었던 건 그의 코앞에서 멈춰 있는 로기의 검 끝이었다.
가검임에도 날카로워 보이는 끄트머리가 그의 눈을 살벌하게 노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니 로기가 한 손으로 그의 검을 잡고 다른 손에 한 손으로 검을 쥐어 그의 눈을 노린 것이다.
"마, 말도 안 돼요! 이건 무효예요!"
실전에서 저렇게 검을 잡아챌 수 있을 리가 없다. 가검이니까 가능한 행위였다. 그러나 그에 반박한 건 다름 아닌 그레고리였다.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거냐? 아니면 계속할 테냐?"
"윽, 방심해서! 방심해서 그런 거니까요!"
파벨은 뒤로 물러나며 이번에는 신중하게 기회를 엿보았다. 분명 파벨이 아는 것과 비슷하지만 로기의 자세나 검술은 그의 눈에 익은 검술과는 어딘가 달랐다. 같은 자세 같은데도 이어지는 자세나 보폭이 차이가 난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낯선 기술이라 당한 것뿐이라고 여기면서 다시 한번 로기를 공격하려 했을 때.
"뭐?"
간발의 차로 먼저 움직인 로기가 그가 낀 보호구 사이에 가검을 밀어 넣고 그대로 눌러 그를 땅을 보게 만들었다. 그의 목뒤에는 크로스 가드의 뾰족한 부분이 닿아서 당장이라도 찌를 것 같았다. 그 뒤로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몇 번이고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성공하지 못하고 땅에 내팽개쳐지거나 급소를 노려지던가 제압당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패배였다.
결국 다시 도전할 체력마저 다했을 때 그레고리는 샬비와 대화를 나누었다.
"파시페니아의 검술은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 더 유연하군요."
"란투아의 검술은 사람보다는 몬스터를 상대하는데 더 집중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예, 아무래도 주변 국가가 다 연맹원이다 보니 말입니다."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저, 혹시 많이 바쁘신가요?"
파벨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그가 자주 훔쳐보았던 샬럿이 작은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던 것이다. 잠깐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하고 샬비를 보았다. 그레고리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 그녀의 자비였다.
"아, 아니, 이건 말입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샬비가 무어라 말하려는 더 말해보지만 그레고리는 볼 일이 다 끝났다는 듯 파벨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는 그레고리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뒷짐을 지고 샬비를 올려다보는 샬럿과 쩔쩔매는 샬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째서였을까? 가슴이 아팠다. 그저 아팠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땐 다시 그레고리의 집무실이었다.
"너는 앞으로 나의 아들이 아니다."
연이어 그의 냉정한 선고가 그를 짓누른다.
"의식주 정도는 네가 다 자랄 때까지 보장해 주마. 하지만 너는 네 잘잘못을 뉘우치고 제대로 된 기사가 무엇인지 깨달을 때까지 나를 아버지라 부를 생각은 하지 말아라. 이게 너에게 내리는 벌이다."
그와 동시에 파벨은 그가 보물로 여겼던 아버지의 낡은 장갑을 빼앗기고 문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면서 그의 아버지와 비슷한 위치의 히스와 마주쳤던 것도 같지만 파벨은 멍하니 걸어서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레고리가 들어오는 일이 없어서 대부분 혼자서 지냈던 방이었지만 알맹이가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그 느낌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히스는 그런 파벨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그레고리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벌이 지나치게 과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소리 마."
히스가 자신을 질책하듯 묻자 그레고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사에게 있어서 결투란 금기나 다름없는 행위다. 그 의미가 어떤 건지 제때 새겨주지 않으면 멋대로 힘을 휘두르고 다닐 거야."
기사는 확실히 힘과 실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기사가 의무감과 명예를 알지 못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힘을 쓰고 돌아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너도 기억하고 있을 거 아니야? 아이올로스 님이 즉위하시기 전에 이 영지가 어땠는지."
"...."
히스는 말없이 그가 건네는 차를 받아 마셨다.
"나를 불렀다고 들었어."
소녀가 붉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문틈으로 들어왔다. 아이올로스는 눈을 감아버렸지만 더욱 짙어진 그리운 향기에 코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아냐, 잠깐 나가 있도록."
그는 자신의 옆을 지키던 하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소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도저히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겨우 속을 진정시킨 그는 눈을 뜨고 다시 한번 소녀를 직시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다리게 했음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하얀 얼굴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그녀와 지독히도 닮은 소녀란 독이었다.
거부하고 싶지 않은 치명적인 독. 그 독에 마음껏 중독되어 소녀를 탐하고 목이 타는 듯한 갈증과 그리움을 채우고 싶었다. 그는 이번에 구해두었던 새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앞으로 일어날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하는 작은 새가 짹짹 지저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펜던트를 꺼내들었다.
"너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그건..."
소녀는 그가 든 펜던트를 확인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마녀라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의 정체를. 무엇보다 아이올로스는 아내에게 들어 지식으로나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다.
"붉은 마녀는 주황색, 검은 마녀는 하늘색, 하얀 마녀는 연두색이었지."
하지만 예외가 세 가지 있었다. 각각의 색에 맞추어서.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
그가 말을 이어갈수록 소녀가 몸을 떨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 가지 모두 특별한 마녀를 만났을 때에만 나타나는 색이었으므로.
"거래를 하고 싶다."
펜던트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