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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화 〉야만의 규칙. (96/220)



〈 96화 〉야만의 규칙.

어셔는 도나르의 말을 떠올렸다. 비록 가슴이 타오르다 못해 머리까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떠올려야만 했다. 그래야만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훈련이 끝났을 때였다.


"잠깐만 기다려 봐라. 너에겐 따로 가르쳐야  게 있으니까."
"이 시간에 할 훈련은 다 끝난  아니었어요?  배고프단 말이에요."

그는 훈련이 끝나고 얼른 밥을 먹으러 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새벽의 훈련은 고되었고 그럴수록 밥 생각이 깊어지는  당연했다.

"잔말 말고 조금만 들어봐.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

그러면서 자신을 붙잡는 도나르가 꽤 귀찮았지만 어셔는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다른 건 아니고 싸우는 방법을 따로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싸우는 방법이라면 이미 배우고 있지 않아요?"
"너는 항상 검을 들고 있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냐?"


그는 실전에서는 사용하던 검이 부러지거나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는 예사롭지도 않은 일이라서 기사들에겐 여러 가지 무기의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 괜히 필수 조건이 아니라고.


"특히 중요한  맨손 싸움이다."
"맨손 싸움이라고요?"
"그래, 맨손 싸움. 흔히 막싸움이라고도 하지."
"그런 건 왜요?"


검을 배우는 중에 그런  배워도 되는가 싶었지만 도나르는 그것이  중요할 때가 있다고 한다. 아무리 잘 훈련되고 준비된 기사라도 무기를 잃으면 예비 무기로 그마저도 잃으면 맨몸으로 팔이 없으면 다리로 다리가 없으면 이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 언젠가는 찾아올 수 있다고.


"정석적인 방법도 좋지만 너무 정석적인 싸움법은 오히려 독이 된단 말이지."

그러면서 그는 연무장을 파헤쳐 흙을 손 위에 올리고 짚으로 만든 연습용 인형의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에 던져서 흩뿌렸다.

"자, 이렇게 하면 상대가 어떻게 하겠냐?"
"그야 눈을 감지 않을까요?"
"그렇지 그때가 중요한 순간이다. 특히 상대가 제대로  전투준비를 하지 못했다면 최상이다."
"하지만 그건 비겁하지 않아요?"


그것을 기사의 싸움법이라고 보기엔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도나르는 그게 별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전쟁과 전투에 비겁이 어디 있겠냐? 이기면 그만이지. 아예 상대에게 뿌릴 수 있는 모래주머니를 힐디스비니에게 지고 다니게 하는 경우도 수두룩해."

기사에겐 명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승리  자체라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패배란 용납되지 않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싸워서 이길 줄 알아야 한다. 상대의 약점을 노리고 때로는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 그 무기로 주인을 쓰러트린다. 비겁하고 오물을 뒤집어쓸지언정 승리만큼은 쟁취해야 한다.

"아무튼 내가 지금 너에게 가르쳐 줄 것들은 주로 이런 것들이다. 진짜 별거 아니긴 한데. 이걸 알아두냐 모르냐의 차이는 꽤 크니까  외워둬."

어셔는 도나르가 식사 시간까지 미루어가며 추가로 가르쳐주었던 것을 귀찮아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벨카를 모욕한 녀석을 두들겨  수 있었으니까. 아이들은 파벨이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야, 도와줘야 하는  아니야?"
"결투에 끼어들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
"쟤 저러다가  날 것 같은데."

아이들은 적어도 싸움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신나 있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했다. 특히 파벨의 코에서인지 입에서인지 모를 정도로 철철 흐르는 피와 상대가 쓰러졌음에도 자비 없이 발로 내려찍고 눈을 뜰라치면 모래를 뿌려 시야를 빼앗고 때리기를 반복하는 어셔의 모습은 아이들이 섣불리 말릴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건 그들이 기대했던 기사의 결투 같은 것이 아니라 처절한 혈투였다.


"도나르 아저씨는 쟤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건지."


아이들이 어셔를 둘러쌀 때 로기도 같은 곳에 있었기에 지금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어셔가 싸움을 시작했을 때. 지려고 하면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어셔가 진짜로 상대를 죽이기 전에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될 정도였다. 로기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을 때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메디아를 비롯한 세 명의 소녀들이 놀란 눈으로 이곳으로 다가왔다. 로기는 메디아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이곳 영주의 따님이라는 것은 알기에 바싹 긴장했다. 그녀의 뒤에는 그는 처음 보는 난쟁이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벨카가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소녀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셔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로기는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전에 먼저 파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 항복! 항복!! 그만 때려!"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 피투성이로 쓰러진 파벨과 씩씩 거리며 서있는 어셔의 모습을 발견한 그녀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야 파벨은 어제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어셔를 괴롭히게 만든 원흉이었으니까. 지금까지 결투를 거부했던 그가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상대를 피투성이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항복? 항복이라고? 웃기지 마. 나라고 해서 결투의 규칙을 모르는 건 아니거든?"


지금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소녀가 이곳에 왔음에도 어셔는 보이지 않는 듯 쓰러진 파벨을 밟고 추궁했다.

"결투를 신청했을 때. 나한테  조건으로 걸라고 하려 했는지 말해."
"그건 그냥 네가 마음에  들어서..."
"말하라고!"
"꺼윽!"

어셔가 그의 가슴팍을 누른 발에 힘을 주자 파벨은 숨이 막혀 꺽꺽거렸다. 아이들은 이미 눈이 돌아간 어셔의 모습에 끼어들지 못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변의 아이들의 추궁해 이야기를 들은 소녀들도 일단 잠자코 지켜보았다.

"아니면 이대로 죽고 싶어?"

어셔가 점점 더 발에 힘을 강하게 주자 정말로 위험을 느꼈는지 파벨은 숨이 넘어갈 듯 헉헉거리며 입을 열었다.

"네, 네 여친을 내놓으라고."

그에 아이들은 웅성거렸고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정말로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사실에 인상을 구겼다. 때문인지 어셔는 결투에서 이긴 후였음에도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네가 진짜로 벨카를 좋아하는 거였다면 나에게 결투 같은 걸 신청할 게 아니라 결과가 어떻든 벨카에게 먼저 고백했어야 했어."

중요한  소녀를 갖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었으니까. 파벨은 뒤늦게 깨달은 표정이었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다.


"그런데 너는 나에게 결투를 신청하며 벨카를 걸라고 했어!"

소녀의 마음과 의사는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자신은 그 무엇도 걸지 않았으면서 그에게 소녀를 건 결투를 강요했다. 마치 물건처럼.


"하지만 내가 이겼지. 그럼 나도 네가 나에게 강제로 걸었던 조건과 걸맞은 조건을 너에게 요구할 자격이 있겠지."
"그건!"
"아니라고  생각은 당장 집어치워! 네가 그러고도 나에게 기사의 결투에서 도망친 겁쟁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어?!"

무어라 말하려는 녀석의 입을 곧바로 틀어막았다. 녀석들이 그를 따돌리며 쓰던 말로.


"나는 너희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똑똑히 들었어. 결투 중에 상대가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다고. 나한테 그게 무서워서 도망친 거라고 말이야."


녀석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요구할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직감한 것 같았다.

"그, 그런 건! 그냥!"
"그냥이라고? 그냥!?"

그런 녀석이 지금까지 집요하게 결투를 강요해왔는가? 그토록 자신들이 만들어낸 편견으로 더럽고 무자비하게 그를 괴롭혔는가?


"내가 요구하는  단 하나야.  목숨."
"그런  불가능...!"
"헛소리하지 마! 이미 결투의 조건으로 나에게 벨카를 걸라고 한순간부터  녀석은 나에게 목숨을 걸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였어."


주변에서 결투를 지켜보았던 아이들  하나가 녀석의 편을 들어 말하려 했지만 어셔가 이를 갈며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다른 아이들도 그 살벌한 기세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켜볼 뿐이었다.  모습에 어셔는 메디아가 했던 말이 정확하다는  실감했다. 보아라 그가 정당한 이유로 결투를 거부했음에도 그동안 그를 겁쟁이라 부르며 핍박하던 것들이 지금 그들의 우두머리를 쓰러트리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겁을 먹는 모습이란.


참으로 한심하고 야만적인 족속들이었다. 어셔가 마무리를 하려는 것처럼 검을 들었을 때였다. 아이들 사이로 누군가 걸어 나온 것은.

"어셔."

아이들은 자신들의 틈을 비집고 나온 소녀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벌어진 혈투를 보았음에도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동떨어진 평온하고 나긋한 미성이었다. 그저 하녀복을 입은 소녀였을 뿐인데 아이들은 그녀의 모습과 분위기에 얼어붙었다. 그녀의 모습에 어셔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방금 전까지 피에 미치기라도  것처럼 파벨을 죽일 것 같은 모습은 어디 가고 마치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 같았다.

"벨카, 하지만  녀석은."

소녀는 방금 전까지 그런 일을 한 어셔가 꺼림칙하지도 않은지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이제는 상관없으니까.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잖아."
"...알았어."


그제야 어셔가 손에 쥔 힘을 푸니 가검이 땅을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벨카는 그런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아이들 틈을 벗어났다. 파벨과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포위망을 벗어나는 그들을 도저히 붙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피해 다니시더니 결투에서 이겨버리셨네요."
"우와, 너희 정말 서로 죽고 못 사는구나."

아이들 틈에서 벗어난 그들을 반겨주는 건 메디아와 류드밀라였다. 대단하다는 듯 혹은 대견하다는 듯 뜨뜻미지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모습에 어셔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열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지금은 얼굴이 뜨거워서 미칠 지경이다. 그렇게 그들이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려 했을 때. 깐깐한 난쟁이, 히스와 마주쳤다. 그는 곧 옆에 있던 류드밀라를 보았다. 류드밀라도 그를 알아차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숙부님."

어셔는  말에 놀라서 류드밀라와 히스를 번갈아보았다. 이제 보니 좀 닮은  같기도 했다.

"오랜만이구나."
"네."


그렇게 잠깐 대화를 나눈 그들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가족이나 혈육을 만났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삭막한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스는 메디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아가씨, 이번 일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동안의 사정은 히스도 알고 있겠죠?"
"예."
"그레고리 경에게 합당한 처벌을 부탁드리겠다고 전해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히스는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류드밀라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정말이지. 저 골렘 같은 모습은 어째 바뀌지를 않아."
"후후, 저래 봬도. 류다에 대해 많이 걱정하셨다구요?"
"말도 안 돼."

어셔는 잠깐 자신이 생각을  밖에 내뱉었나 생각했지만 그건 류드밀라의 말이었다.


"정말이라니까요?"
"메아. 차라리 이 녀석들이 헤어질 거란 말을 믿겠어."
"우리가 왜?!"
"그만큼 못 믿겠다는 거지."

어셔가 발끈하자 어깨를 으쓱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저런 모습도 메디아와 비슷했다. 한편 아이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서있던 로기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못 당하겠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반대편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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