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야만의 규칙.
아직은 해가 떠오르지 않은 새벽. 창밖은 아직 옅은 어둠 속에 잠겨있었지만 소녀들이 잠든 방은 작은 촛불에 의지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조도 없이 벨카가 눈을 떴다. 메디아와 류드밀라의 사이에 끼여 일어나기 힘든지 낑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작게 지친 숨을 내쉬다 아직까지 방안을 밝히던 촛불을 보았다. 밤 사이 스스로를 불사르며 한계에 달한 초는 더 이상 방을 밝히지 못하고 서서히 꺼져갈 운명이었다.
벨카는 촛대가 올려진 작은 서랍장에서 또 다른 초를 꺼내들어 꺼져가던 촛불을 이어주었다. 새로운 초에 불꽃을 옮겨준 촛불은 소녀가 직접 바람을 불어 꺼트려 주었다. 그 자리에 새로운 초를 놓아둔 그녀는 메디아와 류드밀라가 깨지 않도록 하녀복을 찾아들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들어갔다. 본래 그녀의 방에서 씻으려던 벨카였지만 메디아의 배려였다. 몸의 구석구석 빠지는 일 없이 씻어낸 그녀가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히익! 깜짝이야!"
어느새 일어난 류드밀라가 벨카를 보고 놀라 소리친 것이다. 침대에는 소녀가 씻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그보다 웬 하녀복?"
"일해야 하니까."
"흐아암, 제가 너무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벨카."
벨카의 류드밀라의 물음에 간단하게 답하자 그녀들의 대화소리에 깨었는지 메디아가 뒤척이며 일어났다.
"메아, 일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죠. 벨카가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고용인 자리에 신청해서 제가 은근슬쩍 제 시녀 자리로 옮겼거든요."
"그거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이던가?"
"공적인 일에 문제만 없다면 말이죠."
류드밀라는 아직 이상한 점이 남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돈이라면 부모님이 아이올로스 님의 가신으로 있다면 딱히 부족하지는 않지 않아?"
메디아는 그제야 류드밀라에게 벨카와 어셔의 독특한 사정을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그들이 도나르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흐응, 그래? 그럼 무슨 일을 시키는데?"
"옷 갈아입히기라던가요? 벨카는 예쁘니까 뭘 입혀도 좋더라구요."
"...그냥 인형 취급이잖아."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저는 괜찮다고 하지만 벨카는 굳이 일을 찾아서 하는걸요."
예를 들어 메디아의 목욕을 도와준다던가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주기도 하는 둥 간단한 청소까지 어디서 배워왔는지 가르쳐 주지도 않은 일을 해준다는 말에 류드밀라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냥 편하게 지내면 될 텐데. 너도 참 피곤한 성격이구나."
그녀의 말에도 소녀는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커다란 쇳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성문이 열리는 소리네요."
이 성의 문을 전부 이용하는 경우는 커다란 마차가 들어오거나 기사들의 출정, 아이올로스가 공식적으로 외출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어두운 새벽에도 저 멀리 봉화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봐선.
"몬스터구나."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몬스터들의 습격이란 심하면 하루 종일 이어지거나 하루마다 찾아오기도 하는 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으니까.
"진짜 한 번을 못 치네."
겨우 태양이 고개를 내미는 아침. 어셔는 바닥에 드러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상대가 되었던 로기도 쉬는 듯 그와 떨어진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도나르를 비롯한 기사들은 오늘 새벽에 봉화가 피어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몬스터의 처리를 위해 성을 나선 상태였다. 그래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도나르가 가르쳐 주었던 것들을 토대로 훈련했다. 그 후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몇 번이고 로기에게 도전했지만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먹일 수 없었다.
"이렇게 차이가 나도 되는 건가."
로기가 실력이 좋다는 건 몇 번이고 대련을 해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 먼저 기사 훈련을 받아왔을 테니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하다는 것도. 그래도 또래의 아이를 한 대도 치지 못하고 진다는 사실은 어셔를 더욱 분하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다시 일어나 로기에게 덤비고 싶었지만 그는 자신이 대련을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억지로 계속하다간 분명히 다치고 말리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벨카에게 그런 짓을 저지른 녀석을 두들겨 패기는커녕 일방적으로 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화가 나게 만드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로기가 조절을 실패해서 다치는 일이 더욱 많은 것이고 그렇게 되면 또 벨카를 걱정시킬 것이 뻔했다. 오늘은 마침 상처가 생기지도 않았으니까. 하루쯤은 그녀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곧 식사시간이다.
"벨카랑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도나르가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새벽부터 훈련을 하느라 배가 너무 고팠다. 그리고 습격하는 몬스터들이 강하거나 끈질길수록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지니까. 그를 기다렸다가는 식사시간을 놓치는 경우도 있어서 그들은 도나르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식사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가 만찬장으로 가기 위해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
"뭐야?"
어셔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아이들을 발견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도나르와 어셔가 연무장으로 사용하는 이곳은 성내에서도 제법 한적한 것이라 다른 아이들이나 기사들이 사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사들은 물론이고 다른 아이들이 이곳에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는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너희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어셔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가두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어셔를 빙 둘러싼 아이들은 길을 터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특히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의기양양하게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자 이제 비겁하게 도망칠 생각은 못 하겠지?"
그 녀석은 어셔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파벨이었으니까.
"대체 뭐 때문에 그깟 결투에 안달을 내는 건데?"
이유야 뻔했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는 내내 그를 몰래 괴롭히던 녀석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는지 궁금했다.
"결투에서 도망친 겁쟁이가 결투를 모욕하지 마!"
그러나 녀석은 오히려 화를 내며 자신이 화가 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기사의 아들이면서 훈련도 게을리해서 대련에서 매번 지기만 하고 여자애 치마폭에 빠져서 어리광밖에 부릴 줄 모르는 어린애가!"
파벨은 어셔에게 저번과 똑같이 장갑을 던졌다. 이번에는 장갑을 잡아채어 보았지만 역시 저번과 똑같은 장갑이었다.
"싸워라! 싸워라!"
어셔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그는 그것이 참 한심해서 녀석의 헛소리를 들어줄 마음도 들지 않았다.
"결투 놀이나 하며 놀고 싶으면 다른 녀석이나 찾아봐."
그가 잡아챈 장갑을 다른 곳으로 던져버리고 그대로 뒤돌아 가려고 했다. 길을 막고 있는 아이들이야. 강제로 치우면 그만이었으니까. 그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그러면 네 여친 내가 따먹어도 상관없지?"
"...너 뭐라고 했냐?"
어셔는 발걸음을 멈췄다. 간신히 가라앉혔던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네 여친 내가 따먹는다고 했다."
파벨은 못 들은 척하는 그가 우습다는 듯 다시 말했다.
"어차피 힘도 없어서 빌빌거리는 주제에 무슨 여자친구와 사귄다고? 제대로 지켜줄 수는 있냐?"
그동안 소녀가 겪어왔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벨카가 원치 않았는데도 강제로 범하고 상처 입히면서 저 혼자 만족스럽게 웃는 끔찍한 녀석들을. 그가 어리기 때문이었다. 그가 힘이 없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강제로 그런 일을 겪어야만 했다.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꽃을 꺾는 것처럼. 그럴 때마다 벨카는 괴로움을 채 털어낼 길이 없어 울었다. 그저 그의 품을 갈구하며 상처를 씻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상처가 아닌 결코 씻어낼 수 없는 흉터라는 걸 어셔는 어쩌면 그녀 스스로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벨카는 언제나 그 없이는 불안해했고 어셔나 도나르 같은 이들이 아니라면 남자들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며 시선을 받는 것조차 꺼려 했다. 그렇게나 상처받고 아파하면서도 그를 걱정시킬까 내색하지 않는 소녀였다. 그에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벨카였다. 그런데 이 녀석은 지금 뭐라고 하고 있는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한테 주라고. 너 같은 겁쟁이한테 그렇게 예쁜 애는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내가 잘 써먹... 컥!?"
계속 어셔를 도발해 결투를 하게 만들려고 했던 파벨은 갑작스럽게 턱을 치는 충격에 혀를 씹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는 곧 자신이 멱살을 잡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웃었다.
"꼴에 니 여친이라고 화가. 끄윽!?"
"그 더러운 입으로 벨카에 대해 떠들지 마. 개새끼야."
파벨은 연이어 턱을 맞아 아팠지만 상관없었다. 이제라도 이 녀석을 실컷 패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거 결투를 받아들인 거라고...?!"
어셔가 멱살을 붙잡은 것을 손으로 쳐 떼어내려고 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야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대련에서 계속 지는 모습만을 봐서 간단하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여자애들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비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멱살을 풀려고 해도 꽉 잡혀서 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어셔는 주먹을 들었다.
"그래, 하자고.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결투 말이야."
"이게 무슨 결투..."
파벨은 이딴 게 무슨 결투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셔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후려갈기는 게 먼저였다. 그는 계속 발버둥 쳤지만 몇 번이고 얻어터졌다. 이미 코에서는 피가 터져 나와 얼굴을 흘렀다. 하지만 파벨이라고 해서 무조건 맞기만 한 건 아니었다. 멱살을 잡고 있는 어셔에 비하면 양팔이 자유로웠으니까 그도 주먹으로 어셔를 때려서 그도 엉망진창이다. 그런데 아무리 때려도 멱살을 풀 생각을 안 하는 게 아닌가?
주먹만으로 모자라 머리로 들이받고 어셔는 끈질기게 그를 두들겨 팼다. 오로지 그것이 목적인 것처럼 자기가 맞는 건 신경 쓰지도 않고 그를 때린다. 파벨은 발버둥 친 끝에 겨우겨우 멱살을 풀고 벗어나 결투를 위해 들고 왔던 가검을 빼내 들려고 했지만 갑자기 모래가 눈에 들어왔다.
"아악! 웁!"
그가 가검을 빼드는 것도 잊고 고통에 눈을 부여잡고 소리를 지르지만 곧바로 그의 배를 강타하는 고통에 토할 것 같았다. 이건 파벨이 기억하는 결투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가 아는 결투란 그의 아버지가 그리고 기사들이 자신이 갈고닦은 기술을 사용해 실력을 겨루는 명예로운 것이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막싸움이 아니라. 파벨은 그를 발로 차 떨어트렸지만 모래가 들어간 눈은 좀처럼 떠지지 않았다.
두 팔로 간신히 얼굴을 가리려 하면 배에 느껴지는 충격. 발로 힘껏 차기라도 했는지 배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고통에 몸부림치지만 상대는 고통이 가시길 기다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를 때린다. 발로 찍고 차고 누워있는 상태로는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었다. 파벨은 어떻게든 손으로 눈을 비벼 모래를 빼내었지만 다시 모래가 눈으로 들어왔다. 너무 아파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가 원하던 결투는 이런 게 아니었다.
너무 아파서 결투 중이라는 것도 잊고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파벨을 알고 있었다. 먼저 결투를 신청하며 이 상황으로 끌고 온 건 바로 그였다. 그런 자신이 도움을 구하는 것만큼 꼴사나운 행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놈이 계속 때리지만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이렇게 해서라도 고통을 줄이고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러다 드디어 어셔가 지친 것처럼 때리는 횟수가 줄었을 때 벌떡 일어나 주먹질을 하려고 했다.
"꺼으윽?!"
무언가 철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일어나려던 그의 머리를 후려치지 않았다면. 충격에 어지러운 머리를 간신히 가누고 그게 무엇인지 확인했을 때 파벨은 경악했다. 그의 머리를 후려친 건 그가 들고 왔던 가검이었다. 파벨이 뒤늦게 자신의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그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텅 빈 검집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