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야만의 규칙.
"그래서 5년간 한 번도 올 생각을 안 하더니 어쩌다가 여기에 올 생각을 다 한 건데?"
빈 잔들을 대신해 옐이 아닌 다른 주스를 주문한 류드밀라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수상쩍다는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그게 말이죠."
메디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주로 이 외출의 계기가 되었던 어셔의 따돌림을 말이다.
"세상에 너도 잘 알지도 못하는 걸 가르쳐 주겠다고 나왔단 말이야?"
특히 메디아가 그에게 해결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이유를 핑계 삼아 밖으로 놀러 나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류드밀라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방법은 아이들을 피해 다니는 것밖에 없어요."
그녀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 숙연해졌다. 하기야 그녀가 해결책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진작에 본인의 문제부터 수월하게 해결하지 않았을까?
"우, 죄송해요. 어셔."
"별로 상관은 없는데."
그보다 어셔는 격식 없이 자신을 부르는 메디아가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하아, 곤란하네. 나도 그런 건 잘 모른다고."
류드밀라도 골치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그녀들은 자신이 따돌림을 받을 때에도 제대로 대처해 본 적이 없었다. 메디아는 최후에 가서야 아버지에게 의지했고 류드밀라도 당하면 당했지 해결한 적은 없었다. 그녀들 모두 도망치거나 버티고 버티기만 했을 뿐이다.
"일단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자 네가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어떤 애가 신청한 결투를 거부해서라고?"
"어? 그렇지."
"거기다 상대는 그레고리 경의 자제에요."
어셔의 대답에 메디아가 덧붙이는 설명을 들은 류드밀라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레고리 경이라면... 근위대 단장 님이셨지?"
"맞아요."
"너, 엄청 성가신 상대한테 걸렸구나."
그녀의 측은한 시선이 어셔를 향했다. 따돌림의 주모자가 아이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성가신 것은 사실이지만 주모자의 부모가 대단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성가셨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강한 힘과 예쁘거나 멋진 외모였으니까. 아이들은 그것이 곧 명예이고 권력이라 생각했다.
"일단 녀석의 결투를 네가 거부한 시점에서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걸 거야. 남자애들은 단순해서 기사들이 하는 건 무조건 좋아 보일 테니까."
정작 어른들이 말하는 명예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따지고 보면 기사들에겐 그와 동등할 만큼 중요한 것이 많았지만 기사를 동경하는 아이들에게 있어선 명예만큼이나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이다. 뛰어난 기사를 부모로 두고 있는 아이들일수록 그런 허울이 좋아 보일 테니까.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기사 같은 군인에게 있어서 명예란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과 보람을 주는 중요한 요소니까.
"게다가 어른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이 드물어. 아이들은 그걸 알고 더 교묘하게 이용하겠지."
아이들의 동경이 된다는 것 또한 좋은 일이다. 동경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일을 꿈꾸게 되고 그것은 미래의 기사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러나 아이들은 제대로 된 명예와 권력의 뜻을 안다 해도 실감하는 경우는 드물다. 때문에 자신들에게 맞게 편의에 맞추고 왜곡해서 받아들인다.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아이들은 단순한 만큼 상대를 증오하기 쉽다. 한 번 미움 털이 박히기 시작하면 온갖 사소한 것조차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고 트집을 잡는다. 그것은 곧 한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만큼 무섭게 덩치를 키운다. 류드밀라는 텅 빈 어깨에서 통증을 느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혹시 걔가 너한데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알고 있어?"
그녀의 진중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어셔는 왜 이 둘이 그렇게 아픈 상처를 입고도 몇 년을 괴로워하며 무서워했으면서도 서로를 그리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역시 벨카겠지."
소녀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말에 그녀들의 시선이 조용히 주스를 마시고 있던 벨카에게 돌아갔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갑자기 집중된 시선에 고개를 기울였다. 창을 통해 비쳐들어온 햇빛에 오묘한 빛을 반사하는 붉은 머리칼과 요요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그들을 마주했다.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곧바로 납득했다.
"혹시 둘이 무슨 사이야?"
류드밀라가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물었다.
"후후, 직접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요?"
"읏."
메디아가 놀리듯 이야기하자 소녀가 주스가 들어있는 잔 뒤로 얼굴을 숨겼다. 덤덤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왜 저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끄러울까? 어셔는 괜히 볼에 물방울이 맺힌 잔을 갖다 대어 식혔다.
"자존심 싸움에 연애 문제까지 겹쳤다니 더 골치 아파졌네."
류드밀라가 붉은 얼굴로 문제에 집중했다.
"이래서야 알아도 해결할 방법이 없어."
"왜?"
"혹시 너희들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질 거야?"
"아니.""싫어."
어셔와 벨카의 목소리가 겹쳤다. 그런 그들을 류드밀라가 멍하니 쳐다보고 메디아가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된 이상 무슨 수를 써도 해결하긴 힘들 거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성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까지 그들은 변변찮은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성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알리자 메디아와 류드밀라는 아쉬운 표정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놓지 못했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다시 헤어져야 하는 이 순간이 너무나 아쉬웠던 것이다. 그들은 이별을 질질 끌다 결국 성의 바로 앞까지 와버렸다. 서로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를 얼마간. 쓰게 웃으며 먼저 손을 놓은 건 류드밀라였다.
"아."
메디아가 안타까운 듯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았다. 본디 비어있던 손이건만 그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류드밀라는 애써 웃었다.
"미안해. 이제 아버지에게 가야 할 시간이라. 다음에 또 보자."
"네, 다음에 또."
그녀들은 서로에게 이번이 끝이 아님을 알렸으나 어째서 서로를 향하는 아쉬움은 줄지 않고 늘어만 가는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메디아와 벨카, 어셔가 성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그녀들은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이윽고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고작 쪽문을 이용하는 것이었지만 두 사람을 갈라놓는 그 순간이 어찌나 느리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그렇게 문이 완전히 닫히려던 순간.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
소녀가 속삭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붙잡아. 이럴 땐 조금은 솔직해져도 좋아."
그녀의 속삭임에 결국 메디아는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요!"
그녀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문을 닫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닫히려던 문을 밀어내자 문이 다시 열릴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듯 놀란 류드밀라가 있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메디아가 사라지는 모습을.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다잡으며 류드밀라의 손을 붙잡았다.
"같이 들어가요. 류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가야 해."
그녀의 아버지는 엄격했다. 언제나 류드밀라를 손안에 두지 않으면 직성에 풀리지 않는 것처럼 굴어서 답답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야 아버지에게 혼나지 않고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으니까.
"이건 제 억지예요. 제가 류다와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혼날 거라면 제가 혼나면 돼요. 그러니까 돌아와 줘요."
류드밀라는 자기 대신 혼나겠다고 말하는 메디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처럼 겁쟁이였던 제 친구는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아니 달라진 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은 메디아의 손은 여전히 겁을 먹고 덜덜 떨고 있었으니까. 류드밀라는 문득 메디아의 뒤로 자신들을 지켜보는 금빛과 마주쳤다. 이내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알겠어."
류드밀라는 언제나 자신을 가르치던 아버지의 말보다 처음으로 다른 것을 선택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그녀는 돌아왔다.
"여기는 바뀐 게 없네."
"네, 언제나 그대로 두었으니까요."
그녀들은 먼저 성을 돌아보았다. 메디아에겐 익숙하다 못해 지겨울 텐데도 성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류드밀라와 추억을 되새겼다. 어셔와 벨카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뒤를 따라다녔다. 그녀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다행이야."
"그러게."
문득 들려오는 벨카의 목소리에 어셔는 동의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빨리 오지 않고 뭐 하나요?"
그들의 발걸음이 늦다는 걸 알아차린 메디아의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그녀의 재촉에 어셔는 그녀들에게 뛰어갔다. 그리고 그날 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어셔는 오늘도 메디아의 방 앞에 혼자 남겨진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 억울했다. 그래도 별 수 있으랴? 그는 방문을 두드리기보다 방안까지 들리도록 소리쳤다.
"내일 봐! 벨카!"
그리고 안에 있던 소녀들은 옹기종기 침대에 모여있다 그 소리를 들었다.
"평소에도 저래?"
"그렇지는 않지만 웬만하면 떨어질 생각을 안 해요. 정말 지극정성이라니까요."
"저런 건 좀 부럽네."
"아우."
벨카는 메디아와 함께 머리를 빗기엔 몸이 불편한 류드밀라를 위해 머리카락을 빗겨주다 그녀들이 나누는 대화에 고개를 숙였다. 그래봐야 붉어진 귀는 감출 수 없었지만.
"그 놀리기 좋아하는 성격은 여전하구나."
"어머, 벨카가 오해할 말은 하지 말라구요?"
"사실이잖아."
류드밀라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손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메디아는 눈으로 좇다 입을 열었다.
"...머리가 많이 새었네요."
"그렇지 뭐."
류드밀라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메디아는 그런 그녀의 말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그래도 검은색이 대부분이지만 마치 무늬가 새겨진 것처럼 군데군데 하얗게 새어버린 류드밀라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원래 그녀의 머리카락은 흑발과 백발이 어정쩡하게 섞인 모습이 아니라 빈틈 하나 없이 새까만 흑발이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때도 머리카락이 손에 얽히는 감촉이 부드럽긴 했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연약했다.
조금만 빗어봐도 툭툭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머리카락들이 걸려 나오는 것이 보일 정도로. 그래서 벨카와 메디아가 함께 오랜 시간 공들여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어준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계속해보고 싶었어."
류드밀라의 멋쩍은 듯한 말에 벨카가 손을 쥐었다 피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후후,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싶으신 거죠?"
"응."
그녀들은 곧 잠들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벨카를 중심에 두고 메디아와 류드밀라가 누운 모양새였다.
"너 좋은 냄새가 나네."
류드밀라의 말에 벨카가 자신의 팔에 코를 대어 보았지만 그녀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겠어."
"확실히 난다니까."
류드밀라는 벨카에게서 마치 이 성의 정원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 향기가 나는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난쟁이인 그녀 못지않게 덩치도 작아서 껴안고 있기도 편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딱히 잠이 든 건 아니었다. 할 말이 없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메디아는 입안에서 말을 고르고 골라 말했다.
"미안해요. 좀 더 류다를 빨리 찾아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말에 류드밀라는 코웃음을 쳤다.
"흥, 아까는 보자마자 도망쳐버렸으면서."
"앗! 그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요!"
"퍽이나. 이 겁쟁이가."
"류다가 할 말이 아니에요!"
그녀들이 옛날처럼 투닥거리고 있으니 사이에 끼어있던 소녀가 당혹스럽게 그녀들을 보았다.
"저기 싸우지 말아 줘...?"
"아하하! 싸우는 게 아니에요."
"싸우는 게 아니야?"
"네, 그럼요."
그런 벨카와 메디아의 대화를 들으며 류드밀라는 자신의 팔과 손에 닿은 온기를 느꼈다. 악의로 인해 상처받고 한 팔을 잃고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하지만 그보다 큰 아픔은 더 이상 친구를 잡아줄 손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비록 한 쪽 밖에 남지 않은 팔이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도 새로운 친구를 안을 수 있었다. 잘못해서 잃을 수도 있었던 친구의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었다. 그 사실에 류드밀라는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