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3화 〉야만의 규칙. (93/220)



〈 93화 〉야만의 규칙.

류드밀라와 메디아는 서로를 애칭으로 불렀다. 분명 선을 그어놓았었지만 서로를 애칭으로 불렀던 것은 어떤 책 때문이었다.  책에서는 친하게 지내던 두 사람이 멀쩡한 이름을 두고도 다른 이름으로 불렀으니까. 그것이 친구 행세를 해야 한다면 적어도 애칭으로 부르는 것이 좋다는 핑계였다. 어쩌면 두 사람은 그것이 단순한 변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모르는 척 넘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제가 류다를 좀 더.  더..!"


메디아는 류드밀라를 껴안은 뒤, 놓지 못하고 연신 사과만을 반복했다. 메디아와 함께 카페로 돌아온 어셔는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다 메디아가 껴안으며 함께 납작하게 눌려버린 류드밀라의 옷소매를 쳐다보았다. 유독 한쪽 소매만이 저렇게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깨닫지 못했다. 제대로 보기도 전에 메디아가 뛰쳐나갔고 그는 그녀를 쫓아 달려나갔으니까. 하지만 메디아의 이야기를 듣고 난 지금.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는 바보에요. 그렇게나 배신 당해 놓고선 친구라는 말이 너무 달가워서. 또 믿어버리고 말았어요."


메디아는 그렇게 자책했다. 그저 애정이, 호의가, 친구가 좋았을 뿐인데. 그것을 믿었다는 사실만으로 괴로워했다. 류드밀라보다 늦게 만난 아이였지만 메디아는 시간이 갈수록 그 아이가 더욱 편하게 느껴졌다. 류드밀라를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그어 놓은 선이 자신이 넘지 못하는 선이 메디아에겐 너무나 높은 벽이었다. 눈에 보이는 뚜렷한 선은  거리감이 되었다.

새로 메디아의 친구가 되었던 아이는 세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마땅히 선을 그어놓은 것도 아니었고 이전의 다른 아이들처럼 메디아를 귀찮게 여기지도 싫은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옆에 있으면 족하다는 듯 함께 했으니까.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세 달이 넘어갈 무렵. 메디아는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잃었다. 이제야 겨우 친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생각에 류드밀라는 찬물을 끼얹었다.


"그 녀석이랑은 더 이상 친하게 지내지 않는  좋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메디아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없었다.

"지금 네 모습을 보고 생각해! 그 녀석이 정말로 너를 친구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여?"

류드밀라는 활달하기보다 조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소리치는 경우는 정말로 드물었다. 그게 그녀를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걸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메디아는 이미 친구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달콤한 독에 취해 있었다.


"세실을 나쁘게 이야기하지 말아요!"

그녀들은 그날 처음으로 다투었다. 메디아에게 세실은 처음으로 다가온 친구였다. 그것도 대화 상대 같은 아이올로스의 제안 없이. 하지만 류드밀라는 그의 제안으로  아이였고 메디아와 친구가  생각이 없다고 했었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균열이 되어 그녀들을 갈라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친구라는 허울 좋은 감투를 뒤집어쓴 세실에게 더 끌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멀어졌다.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서로 말을 거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세실이 끼어들었기에 그녀들에게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꾸 류드밀라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마음에 걸려서 메디아는 먼저 그녀를 찾아 나섰다. 마침 세실이 따로 할 일이 있다고 하여 자유로웠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류드밀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을 찾았다.


"...!"

어딘가 신경질적인 그녀의 목소리에 화를 내고 있는 거라 생각해 마음을 졸이면서도 그동안 서먹하게 대했던 일들을 사과하고 싶어서 문 앞으로 다가갔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이제는 질린다. 질려. 그 꼴을 겪고도 찰거머리처럼 붙어있고 싶어? 얌전히 나한테 양보하라고!"


그건 분명 세실의 목소리였다. 처음으로 메디아에게 친구가 되어주었다고 생각한. 하지만 언제나 사근사근했던 평소 그녀의 목소리와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다르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너 같은 애한테 메디아를 이용당하게 내버려 두라고? 난 그렇게는 못해."

그리고 화가 잔뜩 어린 류드밀라의 목소리는 지쳐있는 짐승이 악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 마치 남일처럼 말하네? 너도 실컷 이용해 먹었잖아? 너만 깨끗한척하지 마."
"...아니에요."

그런 세실의 말에 메디아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다행히 문을 사이에 두고 있어 안쪽까지 들리진 않은 것 같았지만. 이용이라니? 류드밀라는 그녀의 대화 상대로 고용되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 어떤 때에도 그녀는 메디아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단지 함께 음료를 마시거나 함께 놀았을 뿐이었다. 사소한 돈마저 제 몫을 따로 내거나 먼저 계산하면 다음에 갚아주는 식이었다. 그런 것에 이용이라니.


하지만 세실은 어땠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애써 외면했던 친구라는 이름에 가려졌던 일들이. 처음  달간은 그다지 요구받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세실은 그녀와  많은 걸 함께하길 원했다. 그것이 설령 메디아가 원치 않더라도 친구니까 함께 해야 했고 친구니까 같이 무언가를 사야 했다. 그것이 메디아에겐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거나 쓸모가 없는 것이라 해도.

어느새 문고리를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 이용했다고 쳐. 하지만 적어도 너처럼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은 없어!"
"그게 뭐가 나빠?! 난 걔 친구고 그냥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걸 얘기했을 뿐이야! 나머진 걔가 알아서 해준 거라고!"
"넌 메아를 말려 죽이고 있어!"
"헛소리하지 마! 걔 친구는 나야!"

그녀들이 다투는 목소리에 이어서 쿠당탕! 방 안에서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메디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는.

"메, 메디아? 네가 여긴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올 것이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당황하는 세실과 여러 명의 아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세실이 자신의 친구라며 소개했던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한 중심에 있는 건.


"메아."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듯 메디아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류드밀라였다. 그녀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는 뜯기기라도 한 것처럼 산발이었고 그녀의 옷도 일부가 찢겨 있었다. 류드밀라의 뺨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무릎에선 새빨간 피마저 흐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조금씩 늘어가던, 하지만 세실에게 정신이 팔려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류드밀라의 상처들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깨달았다.


"메디아! 이건! 그러니까 류드밀라가 일부러!"
"닥치세요."

메디아는 세실을 쏘아보았다. 세실이 말하던 친구라는  그저 자신을 이용하기 위한 허울이었다는 걸 그녀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렇게나 겪어놓고서도. 메디아는 세실을 밖으로 쫓아내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류드밀라와 다른 아이들에게 전해 듣고 분노했다. 그녀는 세실의 행동에 대해 아이올로스에게 낱낱이 고했고 세실은 성 밖으로 쫓겨났다. 그래도 가신의 딸이었기에 도시 내에 있는 가신의 별장에서 살게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하지만 메디아와 류드밀라의 사이는 좀처럼 회복될 수 없었다. 메디아는 류드밀라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으니까.

"...같이 놀러 나가지 않을래?"


그런 상황에서 류드밀라는 먼저 방으로 찾아왔다. 정작 메디아는 지레 겁을 먹고 꼼짝도 할  없었는데 놀러 가자고 말하는 류드밀라를 메디아는 거절할  없었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둘이서 거리를 걸었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불편하고도 편안한 시간. 그러다 그녀들이 멈춰 선 건 마차들이 다니는 길목에서였다. 그곳에서 류드밀라는 무언가 말하려 했었다. 메디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때 류드밀라가 누군가에 의해 마차가 달리던 길목을 향해 밀쳐졌으니까.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없었으면!"


메디아는 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씩씩거리던 세실과 끝에서 붉은 선혈을 흩뿌리며 허공을 헤매던 팔을.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는 기억밖에. 그리고 그녀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볼 수 없었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류다를 다치게 만들었어요. 류다에겐 잘못이 없어요. 차라리 제가 제가 그렇게 되었어야 했는데. 어째서 저는 이렇게 멀쩡한 건가요?"


어셔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말을 토해내는 메디아를 보다 못해 소리쳤다.

"정신 차려 멍청아! 그게 왜 네 잘못이야!?"
"하지만 저는!"
"잘못한 건 너나 류드밀라라는 애가 아니야! 그런 짓을 했던 세실이라는 녀석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에겐 잘못이 없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둘 다 겁쟁이였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만났잖아? 왜 도망친 건데?"
"제가 류다를 볼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저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한 메디아를 지켜보다 어셔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자신이 두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고.


"그래서 너는 지금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이렇게 헤어지고 싶어?"
"그건..."
"아니잖아? 다시 만나고 싶잖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잖아?"

메디아는 그의 말에 정곡을 찔린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네가 정말로 싫어졌다면 네가 자주 오는 곳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을 리가 없어. 내가 그 녀석이라면 말이야..."

류드밀라는 자신을 껴안고 있는 메디아 때문에 당황하면서도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미안해요.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사과의 뒤에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류드밀라가 눈을 크게 뜨고 메디아를 보았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자신을 껴안은 메디아를 마주 안았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같은 두 사람을 지켜보며 어셔는 안도했다.

"벨카, 아무 일도 없었지?"
"응."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던 마음이 소녀의 대답에 사라졌다. 어셔가 메디아를 데리고 오기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간단한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보단 보고 싶었다는 말이 더 듣고 싶었을 거야."


메디아는 부정했지만 그녀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였으니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다시 만난  사람을 어셔와 벨카는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이쪽은 류다, 그러니까 류드밀라라고 해요."
"윽, 저기. 안녕."


텅  옷소매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던 류드밀라는 그들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처음 만났을  사납다고 느꼈던 것이 무색하게도 부끄러움이 많은 모습이다.

"그리고 류다. 이쪽은 벨카와 어셔, 이번에 사귄 친구들이에요."

어셔는 자신과 소녀를 소개하는 메디아의 말을 듣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나도?"
"그,  되나요?"
"그런 건 아니고!"

메디아가 자신감을 잃고 어셔를 올려다보자 그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죄책감도 들었지만 그녀의 옆에서 류드밀라가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덩치는 엄청나게 작은데 눈길이 사람 하나 정도는 그냥 묻어버릴  같은 기세였다.

"그런데 우리가 없는 동안 마셨어? 잔이 비었네."


어셔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잔은 하나 더 늘어났지만 비워진  개의 잔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류드밀라가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메아! 내가 옐은 되도록이면 마시지 말라고 했었지!"
"조금 봐주세요. 이번엔 정말 오랜만에 마시러 온 거니까요."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얘네들 이거 술이라는 건 알고 시킨 거 맞아?"
"이게 술이라고?"


그는 버릇처럼 자신의 잔을 들어 내용물을 마시다가 류드밀라의 말에 놀랐다. 어셔가 알던 술은 쓰고 맛이 없어서 성인식    번 입을 대고 학을 떼었었다. 그런데 이건 단순한 주스처럼 단맛이 났던 것이다. 이런 것이라면 그도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을 정도였다.

"옐은 그게 더 문제라는 거야. 너무 부담이 없으니까. 많이 마셨다가 얼마나 고생했었는데!"


류드밀라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었다. 어셔는 성가신 녀석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