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야만의 규칙. (92/220)



〈 92화 〉야만의 규칙.

""....""


어셔가 메디아를 쫓아 달려간 후. 류드밀라는 남아있던 벨카를 불만스러운 듯 노려보고 있었다. 밝은 갈색 눈동자에 담겨있는 경계심과 그녀의 매서운 눈빛은 난쟁이의 정말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아이 몇은 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정작  대상이 된 소녀는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없는 금빛으로 그녀를 마주  뿐이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벨카였다.


"같이 앉아."
"하?"

류드밀라는 지금 자신이 들은 것이 확실한지 의심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벨카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리며 친근하게 느껴질 만큼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 있었다. 류드밀라는 그런 소녀를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다 그녀가 두드리는 옆자리가 아닌 반대편으로 가서 앉았다. 그래도 딱히 상관이 없는 것처럼 벨카는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


메디아가 가게 밖으로 나가기 전에 주문했던 음료를 들고 온 웨이터가 주문하기 전보다 줄어든 인원과 바뀐 사람에 잠시 당황하다 두 컵을 빈자리에 두고 남은 컵을 벨카의 앞에 두고 돌아갔다. 그에 류드밀라가 인상을 구겼을 때. 벨카는 자신의 앞에 있던 컵을 잡고 그대로 그녀에게 밀었다.

"마셔."
"지금 동정이라도 하는 거야?"
"마시고 싶지 않아?"

그에 더욱 표정을 구긴 그녀는 날카롭게 물었지만 소녀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잠깐 입술을 깨문 류드밀라는 웨이터를 불렀다.


"웨이터! 여기 같은 걸로   더!"


그리고는 벨카의 컵이 아닌 남은 두  중에 하나를 들어 쭉 들이켰다.  작은 몸에는 커 보이는 컵을 한 손으로 들고 꿀꺽꿀꺽 한 번에 컵의 반이나 해치운 그녀는 푸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살짝 어지러운지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컵을 노려보았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는 옅은 갈색빛을 띄는 노랗고 투명한 음료가 거품을 내고 있었다.

"이거 옐이잖아. 예전부터 몰래 마시긴 했지만, 이젠 성인이라고 이렇게 당당하게."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작게 혼잣말을 하는 류드밀라의 모습을 보면서 소녀가 컵을 들어 입에 머금었다.

"너, 그거!"
"?"

그녀가 놀란 듯 소리쳤지만 벨카는 그저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보고 있다. 자기가 방금 마신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은  모습에 류드밀라는 검은색과 흰색이 뒤섞인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마구 헤집었다.

"그게 뭔지나 제대로 알고 마셨어?"

그녀의 물음에 벨카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거 음료수처럼 달긴 해도 술이라고."
"술이라는 건 단 거구나."
"그게 아니야!"

류드밀라는 소녀의 지극히 단순한 결론에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짚었다.

"하아, 됐어. 이런 애한테 무슨."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술이라는 건 말이야. 마시면 어지럽다고 과하게 마시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난동을 피울걸?"
"그러면 어째서 마셔?"
"그건 나도 몰라. 잊고 싶은 일이 있는 걸지도."
"잊고 싶은 일이 있어?"
"그런 일이야 많..., 잠깐 이런 얘기를 하려던  아니잖아!"

저도 모르게 다른 이야기를 하게  류드밀라는 빼액 소리쳤다.


"아무튼 술이라는 건  좋은 거니까!"
"안 좋아?"
"무조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마시지 말라니까?! 너 같은 애는 잘못하면 큰일 난다고!"

말을 하는 도중에도 옐을 마시려 하는 소녀의 모습에 소리친 류드밀라는 제 컵에 남아 있던 옐을 꿀떡꿀떡 전부 마셔버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너, 그거 마시라고 했었지? 지금 내놔."


벨카는 그녀의 요구에도 별다른 불만 없이 자신의 컵을 내밀었다.

"으으, 달긴 하지만   이상은 버티기 힘든데."
"그러면 내가 마셔도."
"난  먹어 본 적이 있으니까 상관없거든! 넌 처음 먹는 거 아니야?!"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거 보라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겠지! 처음 마신다면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마셔!"


그러나 류드밀라는 곧 자신이 가져온 컵에 슬그머니 손을 대는 벨카의 모습을 보고 입꼬리가 굳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더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마셔?"
"그런데 왜 옐을 마시려 하는데?"

소녀는 말하는 대신 류드밀라를 빤히 쳐다보았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벨카의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린 그녀는 이윽고 폭발했다.

"넌 처음 보는 사람한테 경계심을 좀 가져!!"


류드밀라는 그 대화만으로 지쳐버렸는지 헥헥 거리다 옐로 목을 축였다.

"후우, 정말. 내가 그 녀석 때문에 또 무슨 고생을."
"메디아와 친해?"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을까? 메디아에 대해 묻는 소녀를 류드밀라는 빤히 쳐다보았다.  오랜 침묵 속에서도 벨카가 고요한 금빛으로 그녀와 마주 보니 결국 먼저 눈을 피해버린 건 류드밀라였다.


"아니."
"거짓말."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호하게 돌아온 소녀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묻고 싶었던 류드밀라였지만 오롯이 그녀를 응시하는 금빛에 그 말을 입속에서만 오물거리다 다물었다. 그래,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거짓말이라 여기면서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던. 옐을 급하게 들이켰기 때문일까? 그녀는 5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을 붙잡고 말았다.

타국에서 오는 상단과는 다르게 그저 란투아의 연맹들 사이를 돌아다니기에 해산되는 일 없이 왕복을 반복하는 상단은  자체만으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류드밀라는 그렇게 란투아를 돌아다니는  상단 중 하나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밑에서 태어났다. 그건 말할 필요도 없이 큰 행운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연맹의 영지들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삶에 시달리는지 보아왔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동화 하나라도 아끼고 아끼면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철전이라도 손에 들어오면 귀하다며 쟁여놓는 이들이 사람들이었다. 정작 그녀는 철전이나 은화가 제일 익숙했는데. 또한 그들은 몬스터들에게 공격받을까 영지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때문인지 상단을 운영하며 연맹을 돌아다니는 상인을 돈에 목숨을  수전노 정도로 본다는 것도 깨달았다. 정작 그녀는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에게 안전하게 보호받았는데.

덕분에 류드밀라는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었지만 때문에 그녀에겐 친구가 없었다. 사실 억지로나마 사귀고 있는 녀석들, 정말로 가끔 만나는 아이들 정도는 있었지만 그걸 친구라 부를  있을까? 아버지의 말로는 그게 다 인맥이라며 친구란 넓고 얕게 사귀어야 한다고 그녀에게 가르쳤지만 류드밀라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면 정작 일이 어려울 때 누가 자신을 도와준단 말인가?  누가 자신을 이해할  있는가?

"이해는 한다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거다. 그런 걸 생각할 시간에 공부를 하거나 네 친구들이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파악해라. 그게 네 인생에 더 도움이 될 거야."


그 말이 자신에게 어떤 상처가 되었는지 그녀의 아버지는 평생이 가도 알 수 없으리라. 어른들이란 늘 그랬기에 류드밀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다루기 쉬운 착한 아이였다. 자신의 생각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당당하게 굴며 고집을 굽히지 않던 아버지가 이번에야말로 정말 잘 보여야 한다며 그녀에게 신신당부한 건.


아이올로스란 사람은 말 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사람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에게 굽신 거리는 것 또한 그렇기 때문이었을까? 종종 아버지가 그렇게 대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를 대할 때만큼은 유독 심해 보였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딸이 메디아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군."

그녀가 메디아의 친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의무가  건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그냥  대화 상대로 고용된 것뿐이니까.  이상을 바라지는 마."


메디아와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치리만큼 딱 잘라 선을 그어버린 건 어쩌면 어른들에 대한 반발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녀는 메디아 때처럼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어도 그렇게 친구를 사귀어 왔으니까. 그런 방법밖에 알지 못해서 그렇게 선을 긋고 말았다. 같이 생활하면 할수록 메디아와 자신이 생각보다 더  맞는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가 익숙해진다는  말하지 않아도 배려하고 배려 받는다는 건 무척 이상하면서도 편안한 감각이었다.

"후회하고 있어?"


소녀의 물음이 술기운으로 인해 과거로 돌아갔던 그녀를 현실로 붙잡아주었다. 후회라.

"그런  언제나 하고 있어. 내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그 녀석도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먼저 선을 긋지 않았다면 진작에 친구가 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가 그어놓은 그 선을 자신이 넘을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류드밀라는 확신하지 못했다. 먼저 그렇게 선을 그어놓고 뻔뻔스럽게 다가가면 과연 누가 자신을 좋아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그녀는 감각이라곤 전혀 없는 옷소매를 반대쪽 손으로 붙잡았다. 이건 그녀의 어리석음이 불러온 대가이며 상처였다.


그럼에도 한 손은 펜을 들 수는 있었기에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상단 일을 배워갔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일이 있기 전보다 집중을 잘한다며 칭찬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영지에 들리는 때면 항상  카페를 찾아와 시간을 죽이곤 했다. 그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자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앉아서. 언젠가는 그녀가 먼저 찾아와주길 기다리면서. 먼저 다가갈 용기는 없으면서 기다리고만 있는 자신이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드디어 이곳에 찾아온 메디아를 반겨주고 싶었는데. 그녀의 곁에는 이미 또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소녀와는 친근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다가가 버렸다. 혹시 또 메디아를 이용하려 하는 아이가 아닐까 싶어서. 그럴 자격도 없는 주제에. 하지만 이렇게 대화하고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소녀가 메디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그 녀석은 잘 지내?"
"누구?"
"메디아 말이야! 메디아!"

누군지 뻔한데도 어설프게 모르는 척하는 소녀가 얄미워 류드밀라는 소리쳤다. 그러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벨카.

"그런 건 직접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그런 건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하지만 무서운 걸 어떻게 해."

그래도 걱정되니까. 그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항상 이 영지에 오면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메디아의 곁에는 이미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메디아는 말이야. 정원에 있는 걸 좋아하면서 더운 건 싫어하니까. 그곳에서 놀게 되면 나무 그늘에서 놀아."


그건 류드밀라도 마찬가지였다. 땀에 옷이 젖어 달라붙는 느낌은 찝찝해서 최악이었다.


"가끔 놀러 나오면 체력도 안 되는 주제에 무리하게 달려버리니까. 꼭 말리고 이곳에 데리고 와."

이곳은 사람들의 시선도 많으니 웬만하면 험한 일을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옐은 적당히 마시라고 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 몰래 마시더니. 몸도 안 좋으면서 말리지 않으면 5잔까지 마셔버리니까."

최고 기록은 10잔이었던가. 덩달아 많이 마시고 말았던 류드밀라는 다음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서 고생했는데 메디아는  한  마시고 개운한 모습으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해서 그런 점은 질리기도 했다. 그래도 술이 그리 몸에 좋은 것은 아니라 꼭 말려야 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따져가며 주의해야 할 것이나 조심해야 할 것들을 가르쳐주면서 류드밀라는 자신이 이렇게 메디아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는 것에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돌봐줘. 그 녀석 혼자 두면 끝도 없이 땅을 파니까."

그렇게 마지막 말이 끝났다. 소녀는 단순히 주정이라 취급할 수도 있었던 그녀의 말들을  기울여 들어주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겨우 만족할 수 있었다. 이제는 류드밀라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가슴이 아팠다.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것처럼 괴로웠지만 아주 조금 후련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있는 옐을 바라보았다. 두 잔은 조금 버거웠지만 이제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마시지 못할 옐이었다.

그녀는 유리잔 속의 옐을 전부 들이켜버렸다. 역시 기분 나쁜 취기가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처음으로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가볼게. 메디아에겐... 아니다."


그렇게 류드밀라가 자리를 떠나려 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누군가 그녀를 껴안은 건. 반쯤 달려들듯이 안겨와 조금 충격이 있었지만. 그와 함께 몰려온 그리운 향기에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류다!"

정말로 오랜만에 들려온 애칭까지. 그녀는 결국 울컥 쏟아져 나오는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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