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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화 〉야만의 규칙. (91/220)



〈 91화 〉야만의 규칙.

그건 뭔가 화가 난  같으면서도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뾰족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메디아의 굳은 표정을 살핀 어셔가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새로운 친구라도 사귀었나 봐?"

그곳에는 무척이나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검은 바탕에 언뜻 하얀색이 군데군데 자리 잡은 머리카락과 밝은 갈색 눈동자. 핏기가 부족한 창백한 피부 때문에 유약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대신 맹금처럼 매서운 눈매가 오히려 그녀를 신경질적이고 날카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건 그녀의 작은 덩치다.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살짝 내려다볼 만큼. 그러나 그녀를 또 정말로 어린아이라고 보기엔 위화감이 있었다.

벨카처럼 그저 몸집이 작은 것이 아니라 마치 그들 또래의 아이를 작게 줄여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 모습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히스라고 하는 회색 난쟁이다.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비슷한 키였으니 아직 어리다면 더 작은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와 눈을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감정에 일그러지는 모습이 언뜻 보였지만 그녀는 관심을 잃은 듯 그를 외면하고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순간이었다. 메디아가 자리를 박차고 튀어나간 건.

"야, 너?!"

그녀의 모습에 어셔가 따라 일어섰지만 메디아는 이미 카페 밖으로 나가버린 후였다. 잠깐 마주친 여자아이는 입술을 깨물고 카페를 튀어나간 메디아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들이 대체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지만 그는 먼저 메디아를 따라가기로 했다.


"하아하아."

메디아는 얼마 달리지 않았는데도 가슴 끝까지 벅차오른 숨에 벽을 짚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정신없이 달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좁은 건물의 틈에 들어와 있었다.


"...또 도망쳐버렸네요."
"얼마 달리지도 못할 거면서  도망친 거야?"

그 사실에 그녀가 씁쓸하게 웃었을 때. 들려온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메디아는 놀라 돌아보았다. 골목의 입구에는 어셔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셔 씨가  이곳에."
"그러면 그렇게 도망치는데 안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냐?"

그의 말에 메디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벨카와 류드밀라는."
"그 여자애 이름이 류드밀라야?"

어셔가 처음 듣는 이름에 반응하자 그녀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마치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입으로 직접 말해버린 모습이었다.

"아, 아무튼 그냥 내버려 두고 오신 건가요? 여자아이들만 내버려 두면!"
"누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그래요! 그런데 대체 왜?!"

정작 메디아는 다짜고짜 도망쳐서 이런 음습한 골목길에 있으면서 멀쩡하게 카페에 있을 그녀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아까부터 우리를 따라다니던 아저씨들 중에서 몇 명이 남아있으니까."
"근위대인가요."
"알고 있었냐?"
"네, 호위 없이 다니는 건 역시 무리일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래도 딱히 모습을 보이진 않아서 깜박하고 있었네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메디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신분이 신분인 만큼 호위가 따르지 않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자유롭게 다니고 싶어 하는 그녀를 헤아려 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보다 어째서 저를 따라오신 건가요?"

하지만 지금 메디아가 가장 의문이었던  어셔가 그녀를 따라온 이유였다. 아무리 안전이 보장되었다지만 그녀가 아는 그는 일단은 소녀의 곁을 지키고 있을만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녀를 따라왔다는 것이 더욱 의외였다.

"그야 네가 없으면 돈은 누가 내는데?"
"에?"

다만 그 이유만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 그녀는 멍하니 어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말을 곱씹던 메디아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왜 웃어?!"


어셔에겐 나름대로 심각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철전이 생각보다 가치가 높아서 무리하면  낼 돈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저렇게 비싼 곳에 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해서 그리 많은 돈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벨카의 안전을 확인하고서야 그녀를 쫓아왔는데. 정작 데려가야 할 그녀가 이유를 듣고 웃으니 할 말이 없었다.

"후후, 죄송해요. 비웃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됐고 빨리 돌아가자. 왠지는 몰라도 그 여자애도 기다리고 있고."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프다는 듯 배를 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서 어셔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메디아는 그의 손을 잡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그 이전에 어셔 씨에게 사과드려야만 하는 게 있어요."
"뭐가?"
"저에게 아이들이 괴롭히는  해결할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하셨었죠?"
"어? 그랬었지."

어셔는  무슨 문제가 있나 했지만 도시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잊고 있었던 사실이다.


"미안해요. 사실 저도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네, 전혀요. 정말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는 메디아의 목소리는 씁쓸함으로 가득했다.


"조금 옛날이야기를 해드릴게요."

뜬금없이 무슨 이야기인가 했지만 때때로 그녀가 짓던 후회와 자괴로 가득했던 표정들이 떠올랐다. 곪아버린 상처를 강제로 찌르는 것처럼 괴로운 그녀의 얼굴에 어셔는 조용히 쳐다보았다.


"벌써 5년이나 지난 이야기에요."


그녀에겐 친구...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그저 계약 관계라고 해야 할지 모를 대화 상대가 하나 있었다. 그때 메디아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대화 상대로 고용되었던 아이들은 조금도 친근하게 여기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어떤 아이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누구보다 친하게 보였으면서 정작 아무도 없을 땐 손바닥을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 은밀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어떤 아이는 그저 그녀와 친구가 되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보고 다가오기도 했다.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그 아이가 그녀에 대해 뒷말을 하는 것을 들키기 전까지 메디아는 잠시나마 친구를 사귀었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물론 진실을 알고 나면 돌아오는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듯 사무치는 배신감이었다. 그로 인해서 메디아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아이들에게 있어선 그저 까다롭고 성가신 비위를 맞추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는걸. 그래서 그녀는 조금이라도 다른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스스로를 깎아나갔다.

싫어하는 것이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좋아한다고 말했고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라 해도 싫어해야만 했다. 스스로를 감추고 가식으로 자신을 덮어야만 아이들과 온전히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그래도 친구라는 것을 사귀었다는 것에 작은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들었다. 듣고 말았다.

"메디아 말이야. 웃기지 않아?"
"싫어하는  뻔히 보이는 데 좋다고 말하는 거? 아니면 우리랑 친해지고 싶어서 노력하는 거?"
"그냥 다! 우리도 딱히 안 좋아하는 건데 말이야!"
"그거 기억난다! 안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는데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강제로 다 먹으라고 줬었는데."

메디아는 그녀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최선을 다했다. 하고 싶지 않은 놀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했었다. 숨이  끝까지 차올라도 열심히 했었다. 싫어하는 음식이라도 꾹 참고 먹었다. 그런데 그녀가 해왔던  모든 노력이 다른 아이들에겐 그저 재미있는 유흥거리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메디아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 따위와 더 이상 친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사소한 성격부터 신분까지. 아이들에게 다르다는 건  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특별함이란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질투의 대상이었다. 아이들은 메디아를 자신보다 아래로 끌어내리기를 원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마치 몬스터와도 같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아이들과 결코 친해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메디아는 참고 있던 모든 걸 터뜨렸다. 그녀는 미련할지언정 자신의 위치마저 모르지는 않았다.


단지 최대한 의지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는데 일조했던 아이들을 집요하게 축출했다. 아이들은 뒤늦게나마 울고 불며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아이들은 항상 그녀에게 무례했으니. 그녀도 아이들에게 굳이 친절할 필요는 없었다. 메디아는 더 이상 비굴하게 애정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건 참 편한 일이었다. 자신과 동등한 대상이 아니라 자신보다 하등한 대상을 처리하는 기분이란.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자신을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그녀에게 해방감을 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홀로서 완성되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네가 메디아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처음 보는 여자아이였다. 성내에서 살았다면  번쯤은 본 적이 있었을 텐데. 전혀 만나본 적이 없는 낯선 아이.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 기대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들이란  거기서 거기일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그냥 네 대화 상대로 고용된 것뿐이니까. 그 이상을 바라지는 마."


그녀 또한 메디아의 아버지에게 대화 상대로 고용된 아이였다. 그래, 어차피 별다르지 않은 아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메디아로서도 처음이었다.  어떤 아이도 자신이 그녀의 대화 상대로 고용되었다는 걸 숨기려고만 했지 그렇게 당당하게 드러내고 말하지는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녀는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메디아의 비위를 맞춘다거나 눈치를 보지도 않았지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사실을 깨달았을 때 메디아는 그녀를 어느 누구보다 편하게 여길  있었다. 그녀들 사이에서는 무례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고 서로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니 그녀들은 서로 친구라 여기지 않았음에도 어느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그녀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것도 책을 좋아하는 것도, 식물을 돌보는 것이나 동물을 좋아하는 것까지. 그녀들에겐 공통점이 참으로 많았다. 어느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챙겨줄 만큼.

그녀들은 서로에게 익숙해져갔다. 그럼에도 막상 친구라 여기지 못했던 건 그녀가 그어놓았던 선이 메디아에겐 너무나 높은 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렴풋이 그 선을 넘으면 정말로 친구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겁이 났다. 그녀는 그저 대화 상대로서 메디아에게 최소한의 호의를 보이는 것뿐일 텐데. 혹시 애정에 목마른 자신이 그것을 착각해서  혼자만 친구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거 봤어? 조금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친구라 생각하고 꼬리 흔드는 거!"
"진짜? 그렇게 순진해서 어째."
"잘만 하면 더 좋은 것도 퍼줄걸? 너희도   친한척해 줘봐."

메디아는 그 어떤 것보다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저도 모르게 그 선을 넘어버렸을 때. 어떤 아이가 했던 그 말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만큼 가슴에 새겨져 있었기에. 그렇게 메디아와 그녀는 그저 계약 관계라 말하기에도 친구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관계로 남아 시간을 보냈다. 어느 누구도 선을 넘지 않았기에 유지되었던 평화였고 또한 그렇기에 전진하지도 못하고 정체되어 있던 침묵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사이에 끼어든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그녀들은 영원히 그 경계에 멈춰 서서 얼어붙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또 다른 아이가 메디아의 대화 상대로 오게  건.


"너 예쁘다!"


그 아이는 초면부터 메디아를 보고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건 또 다른 충격이었다. 남자아이들이라면 몰라도 같은 여자아이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처음부터 메디아에게 호의적인 눈길을 보내던 그녀는 금세 그녀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건 있었다.  아이가 끼어든 후에도 그녀와 메디아는 선을 넘지 않았다. 그 아이만이 장난을 치듯  선을 넘나들었다.

그렇다 해도 의심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호의에 자꾸만 그녀를 의심하는 자신에게 실망감이 들어서 메디아는 경계심마저 잃고 그녀의 호의에 취해버렸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최악의 실수가  것이라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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