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0화 〉야만의 규칙. (90/220)



〈 90화 〉야만의 규칙.

어셔는 생각했다. 차라리 성 밖에 놀러 나오지 않는 편이 몸은 더 편했을 지도 모른다고. 쿠키를  먹은 뒤 메디아는 가녀리다 못해 병약한 인상이 거짓말이라 주장하듯 그와 벨카를 이끌고 신나게 도시를 돌아다녔다. 어찌나 활기찬지 뛰어놀기 좋아하는 어셔도 질릴 지경이었다. 아니, 이렇게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은 어셔도 좋았다.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던 도시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주변의 사람들이었다.

"너는 이런 상황에서 잘도 돌아다니네."
"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주변이 어떤지 모르는 건지 아니라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인지 깨끗한 얼굴로 묻는 메디아의 모습에 어셔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건 어쩔  없다고 넘길  있었다. 그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가끔씩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그런 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인파 속으로 끌려가 사라져버렸다.

"그냥 마저 구경이나 하자."
"뭔가요? 괜히 신경 쓰이게."


그녀가 투덜거렸지만 정작 투덜거리고 싶은 건 어셔였다. 방금 그 사람까지 합쳐서 벌써 5명 째였으니. 하지만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도움을 주는 것이니 어셔는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너무 예민해진 탓에 그들의 행동이 자꾸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으니까. 메디아는 미심쩍은 듯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이번엔 저기로 가볼까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딱 봐도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는 대장간이었다.

"대장간은 왜?"


설마 무기 같은 것이라도 사려는 건가 싶었는데.

"저기서 주로 취급하는 건 유리거든요."


그녀가 대장간 앞에 놓인 팻말을 가리키자 그제야 그것을 발견한 그는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표드르의 대장간' 유리 공예 전문?"


어셔가 알기로 유리는 상당히 비싼 값을 자랑했다. 재료 자체는 구하기 쉬운 편이라 들었지만 중요한 건 유리를 가공하는 대장장이의 실력이었다.

"새 창문이라도 달려고?"
"저희 성의 창문은 전부 상등품인걸요? 딱히 깨진 곳도 없으니 아직 주문할 필요는 없답니다."

그가 성의 창문을 일일이 다 들여다본 건 아니었지만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만들어져 밖이 훤히 보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실력이 좋지 않은 이가 창문에 쓰이는 유리를 가공하거나 실수하면 영 좋지 않은 결과물이 나오기도 해서 그런 창문을 통해 밖을 보면 이상하게 뒤틀린 세상을 볼  있었다. 어셔는 그것이 재미있어서 그런 것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사람들은 보다 깨끗하고 확실하게 밖을 볼 수 있는 창문을 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볼 건  그대로 공예품이니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그곳은 다른 대장간과 다르게 검이나 창, 농기구 같은 것은 없었고 커다란 진열장에 크고 작은 유리병이나 동물들의 모습을 본  만든 듯한 유리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게 전부 다 유리로 만들어진 거라고?"


하지만 그것이 전부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엔 그가 아는 투명한 색과는 달랐다. 어떤 것은 피를 그대로 굳혀버린 것처럼 빨간색을 띠고 있었고 또 어떤 것은 노랗고 파랬다. 그럼에도 투명한 모습이 신기했다. 이건 마치 유리보다는 그가 얼굴에 날아드는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도나르에게 잠시 빌린 적이 있었던 모자 같은 것에 달려 있던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을 통해 보면 그냥 볼 때보다 오히려 선명하게 볼 수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문득 그 재질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철과 비슷한 질감이었으면서도 그것은 철이 아니었다. 돌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돌처럼 무겁지 않았다. 유리처럼 투명했지만 두드려보면 유리와 같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뭐라고 불러야 되는 것인가? 그가 고민할 때였다.

"어셔."

소녀가 그를 부른 것은. 그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벨카는 알고 있을까? 때때로 그녀의 그런 말이 그의 호기심에 더욱 불을 지핀다는걸. 어셔는 결국 가지각색의 유리 공예품을 제대로 눈에 들이지도 못하고 그것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별다른 수확은 없었지만. 소녀의 쓸쓸한 금빛만이 그를 뒤따랐다.

"슬슬 다리도 아프니까 잠깐 카페에서 쉴까요?"

어느새 유리 공예품의 구경이 끝났는지 생각에 푹 빠져 있던 그와 소녀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 메디아의 말이었다.

"거긴 뭐 하는 곳인데?"
"으음, 뭐라 하기 애매하지만 간단하게 음료를 마시며 대화하는 곳쯤일까요?"

어셔는 그녀의 설명에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실 것을 팔면 그냥 마실 것만 팔면 될 텐데 말이다. 그는 그런 곳이 과연 장사가 될지 의문이었지만 메디아와 벨카와 함께 찾은 카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보였다.

"의외네. 이런 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구나."
"어셔 씨는 모르겠지만 이런 곳은 꽤 인기가 많답니다? 주로 잘나가는 상인 분들에게요."
"...그거 여기 오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는 소리지?"


그녀는 그의 말에 답하는 대신 생긋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카페의 안으로 들어갔을  어셔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안 그래도 단순히 음료만 파는 가게의 건물치고는 너무 으리으리하다 싶었는데. 내부는 더욱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반질반질하게 광택이 나는 흑백으로 나누어진 바닥과 티끌 하나 묻어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새하얀 벽지. 곳곳에 들어선 기둥조차도 깔끔한 하얀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뿐이랴? 벽에는 커다란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사람을  따 만들어진 새하얀 조각상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빛을 산란한다. 그 외에도 꽃과 왜 있는지 알 수 없는 소품들이 곳곳에 장식된 이곳은 되려 그들이 지내던 성보다  화려해 보였다. 특히 이곳저곳에서 그들에게 날아드는 호기심 어린 시선, 그 시선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냥 나가면 안 되냐?"

그가 부들부들 경련하는 입가를 애써 고정시키며 메디아에게 물었지만.


"안돼요. 어차피 잠깐 쉬다가 나갈 생각이니까. 조금 부담스러워도 참으라구요."
"조금이 아니니까 그렇지!"


조용히 항의해 보지만 그녀는 이미 이곳에서 쉬었다 가기로 마음먹은  같았다.


"벨카도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
"?"


소녀는 갑자기 나온 자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기울였지만 어셔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벨카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다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으니까. 아프면 말해주면 좋을 텐데 그녀는 자신의 아픔엔 늘 둔감했다. 결국 자리 잡은 카페의 한 테이블에서 메뉴판을 잠깐 훑어본 어셔는 기함할 뻔했다. 카페에서는 이용료와 주문할  있는 음료가 따로 있었는데.


"시간당 이용료가 금화 1전이라고...?!"


심지어 메뉴판의 메뉴들은 기본 단위가 은화였다. 이 정도면 차라리 아까 먹었던 쿠키가 귀여워 보일 지경이다. 대체 얼마나 돈이 썩어 넘쳐나야 이런 곳에서 시간을 펑펑 쓰며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의 격차가 이렇게 크게 와닿을 수가 없었다. 어셔가 경악으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아는지 모르는지 메디아는 메뉴판을 보고 음료  개를 주문했다.

"저도 웬만하면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돌아다니다 피곤해지면 가끔 들리곤 했어요."
"가끔 들리다간 거지가 될  같은데."
"후후, 그런가요?"


그녀는 어셔를 보며 웃었다.


"정 그렇게 불편하시다면 저와 어울려주시는 보답이라 생각해도 좋아요."


그는 그런 메디아를 바라보았다. 또다 또 저 얼굴이었다. 어셔가 그녀에게 대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물어보려 했을 때.


"뭐야, 너. 뻔뻔하게 잘도 여기를 찾아오면서."

어셔의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메디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 녀석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냐?"

파벨은 잔뜩 짜증 난 목소리로 한 아이에게 물었다.

"아, 아니,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던데."


그에게 질문을 받은 아이는 겁을 먹은 듯 어버버 거리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화가   다른 아이에게 물었다.

"네 쪽은?"
"이쪽도 안 보여서. 그냥 왔어."


아이들은 힐끔힐끔 서로의 눈치를 보면서 혹시라도 그의 화가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전전긍긍했다. 지금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없는 어셔를 찾아내는 것. 파벨은 아이올로스의 신임을 받는 기사의 아들이라는 것과 또래 중에서도 강한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그런 그가 타깃으로 정한 어셔는 괴롭힐만한 가치가 있었다. 또한 아이들은 그가 어셔를 괴롭힌다고 했을 때 마침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굳이 시키지 않아도 어셔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들을 퍼뜨렸다. 그러면서 어셔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늘어났다. 그들 사이에서 그는 이미 기사의 아들이면서도 훈련을 게을리하고 예쁜 여자아이들과 시시덕 거리기 좋아하는 탕아였다. 그들은 그 근거조차 없는 소문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에게 벌을 주는 것일 뿐이라며 자신들이 옳다고 여겼다. 그것에 희열을 느끼면서. 그래서 오늘도 아이들은 저마다 어셔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빨리 찾아내!"
"아, 알았어."

파벨이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다급해졌다. 어셔가 갑자기 사라지면 곤란했다. 그들에겐 놀잇거리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자신들의 안위였다. 잘못하면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이들은 겁을 먹었다.


"파벨! 그 녀석 어디로 갔는지 알았어!"

그들에게 다행히도 그와 자주 어울리는 칼이 어셔에 대한 소식을 들고 달려왔다.


"어디 있는데?"

파벨이 묻자 칼은 달려오느라 지친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그 녀석 외출했다더라."
"뭐? 외출이라고?"


아이들은 그 소식에 놀라며 웅성거렸다. 그들이라고 해서 외출을 하지 못하는  아니었으나 그건 주로 축제가 벌어지거나 아버지인 기사가 휴가를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특히 축제날 운이 좋지 않으면 아버지의 당번이나 몬스터들의 습격과 겹쳐서 축제를 나가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는 만큼 외출이라는  성의 아이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마 그 녀석 아빠가 휴가라도 냈다는 거야?"


그것도 가신이 된지 얼마 안  시점에서? 파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니고 메디아 아가씨가 시찰을 나가시는데  여자애랑 함께 데려갔다나 봐."


아니나 다를까 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아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파벨은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그 소식에 더욱 화가 났다.


"매일 훈련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메디아 아가씨를 꼬셔서 놀러 나가?!"
"정말 미친 새끼 아니야?"


아이들은 파벨의 말에 동의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그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중요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메디아와 함께  밖으로 놀러 나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누구인가? 다름 아닌  땅과 성의 주인인 아이올로스의 따님이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메디아와 친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또래 중에서 가장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다. 어른들마저 존대하는 그녀와 어떤 아이가 친해지고 싶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메디아와 친해짐으로써 얻을  있는 많은 이득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그녀와 친해지고자 접근했던 아이들은 많았으니까. 심지어 남자들 중엔 메디아를 마음에  이들도 상당수였으니. 그러나 그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어떻게 되는지 또한 똑똑히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메디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아무도 이득을 취할 수 없으니 취할 필요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굳이 남보다 앞서갈 필요가 없다는 안정감을 주었기에 어느새 아이들은 아무도 그녀와 친해지려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혹시 누군가 메디아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 해도 그들은 그를 교묘하게 따돌리거나 협박해서 그녀와 친해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외부에서  아이들이 대뜸 그녀와 친해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질투에 눈과 귀가 멀어 있었다.

"그 녀석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기는 내일까지 녀석이 절대로 거부할 수 없게 판을 짜야지."


파벨은 그런 그들을 이용할 줄 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