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야만의 규칙.
처음 어셔는 아이들이 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다른 아이들에게 관심 같은 건 없었고 이 넓은 성에서 그 녀석들과 마주칠 일도 딱히 없을 것이라 여겼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진짜 더럽게 거슬리네!"
며칠이 지난 지금 그는 자꾸만 자신을 찌르는 시선들에 이를 갈며 소리쳤다. 쌓이고 쌓인 것이 폭발한 탓이었다. 원래는 잘 느끼지도 못했던 시선들이었지만 점점 예민해지다 보니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제가 집요하다고 했었죠?"
거 보라는 듯 메디아가 말했지만 어셔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좀 더 새겨들었어야 했음을 인정했다. 그냥 무시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관심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오기라도 생긴 것처럼 좀 더 집요하게 어셔를 괴롭히려 들었다. 화분이 떨어지거나 신발 안에 바늘이 들어가 있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건 단순히 신발을 털어내거나 머리 위를 조심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음식의 경우에는 그가 자꾸 제 것을 두고 벨카의 것을 나누어먹으니 낌새를 느낀 도나르와 시프가 걱정하기 시작하자 음식에 손을 대는 일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꼼꼼히 확인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오히려 더 대담하고 철저하게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2층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 쉬운 화분 같은 것이 아니라 걸레 빤 물 같은 것이 뿌려졌고 신발에는 오줌이라도 싼 건지 지독한 냄새가 맴돌았다.
때문에 매일 빨래와 목욕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허튼짓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신발을 들고 다니니 복도를 걷다 보면 쌩하니 밀치고 가거나 발을 거는 일이 생겼다. 이게 또 골 때리는 것이 주변에 다른 사람 없이 그 혼자 있을 때 귀신같이 찾아와 일을 벌인다는 것이다. 특히 등 뒤로 맞으면 아프거나 거슬릴만한 물건들이 날아들어서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으니 이쯤 되면 이것들이 정말 기사의 아들인지 암살자의 아들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끄떡하지 않자 이제는 규모를 키웠다.
"대체 몇 명이나 나 하나 괴롭히는데 신경 쓰고 있는 거야?"
고작 셋이서 하기엔 그 일들이 일어나는 범위가 드넓어서 어디에서도 쉽게 행동할 수가 없었다. 무슨 훈련이라도 받은 것처럼 철두철미하게 괴롭히는 아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장난이라 취급하기엔 악의가 너무나 선명하다. 상처가 난 부분을 파먹는 벌레처럼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차오르는 물처럼 아이들의 악의는 그를 좀 먹으려 했다. 누군가를 특정할 수 있는 증거 또한 전혀 남기지 않는 점이 더 지독했다.
"아마 대부분의 아이들이 관여하고 있지 않을까요."
메디아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여상히 말했다. 당연하다는 듯 확신에 찬 어조에 어셔는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메디아는 초탈한 듯 혹은 관심이 없는 듯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잘도 그의 말에 대답해 줬다 싶었다.
"혹시 이거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물어볼 수 있었다.
"어머,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는 건가요?"
"너라면 알 것 같아서."
그녀는 짐짓 놀란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되물었지만 어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감일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런가요."
그녀는 잠시나마 떠오른 허탈한 표정을 금세 지워버렸다.
"그럼 조건이 하나 있어요."
"켁, 이런 거에 조건까지?"
"세상에 공짜란 없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메디아의 모습이 얄미웠지만 그에겐 딱히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무슨 조건인데?"
이어서 메디아의 조건을 듣게 된 어셔는 황당했지만 그다지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기에 수락했다. 그녀의 조건은 간단했다.
"역시 생머리도 잘 어울린다니까요."
"우으, 하지만."
벨카는 평소와 달리 묶어놓지 않아 발아래까지 땅에 닿을락 말락 하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꼭 껴안고 그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메디아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셔는...?"
"별로 상관없어. 어떤 모습을 하던 결국 벨카잖아."
메디아의 조건이란 바로 소녀의 머리카락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벨카의 머리카락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냥 벨카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아?"
굳이 그런 것을 조건으로 달 필요가 있을까 하여 물었었지만 메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말이죠. 어셔 씨가 좋아하는 모습이라며 유난히 고집을 부려서 설득도 못해봤다구요."
생각해보니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소녀가 머리를 묶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녀에게 머리카락을 묶는 끈을 선물했었던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모습이 당연해져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녀는 그 끈을 머리카락을 묶는데 쓰는 대신 손목에 팔찌처럼 묶어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간지러워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그게 우리가 성 밖에 나오는 거랑 해결 방법은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메디아의 조건을 받아들인 지금, 그들은 성 밖에 나와있었다. 곳곳에서 시선이 모여들어 그들의 볼을 찔렀다. 그야 당연하리라 어셔는 그저 평범한 소년일지라도 그와 함께 있는 벨카와 메디아는 어딜 가도 보기 힘들 만큼 예쁜 아이들이었으니까.
"어떤가요? 기분전환도 되고 나쁘지 않죠?"
"그거야 그런데..."
이 시선들도 제법 기분은 나빴지만 성안의 아이들처럼 대놓고 악의적인 시선은 없어서 마음은 편해졌다. 하지만 딱히 해결 방법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은가?
"그럼 간단한 요깃거리부터 사러 가볼까요."
어셔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에 애매하게 답했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들을 이끌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그녀를 따랐다.
"다과는 어떤가요? 달콤해서 인기가 많다구요?"
"이거 엄청 비싼 거 같은데."
지금 보고 있는 쿠키만 해도 한 끼 식사로 때울 수 있는 빵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어셔는 뒤로 물러났다. 은화 2전이라니. 화폐의 단위부터가 달랐다. 그의 기겁한 모습에 메디아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한 모습이다.
"비싸다니요? 확실히 평범한 농민에겐 보름치 생활비가 되겠지만 기사분들의 봉급이라면 그리 무리가 가는 가격도 아닌걸요?"
"나는 기사가 아니거든!"
도나르가 기사라지만 그가 기사는 아니었다.
"그러면 벨카가 신고 있는 구두는 누가 산 건가요?"
"내가 샀는데."
그러자 메디아는 더욱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럼 문제없지 않나요?"
"어디가?!"
자꾸만 엇갈리는 대화에 서로가 답답해하기를 잠시. 그녀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어셔 씨.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지금 약 1온스의 철전 1전의 가치가 동화로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어셔는 잠시 구두를 팔던 노인의 말을 떠올렸다. 동화 150전? 155전이라고 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철전 12전이라고 했었으니.
"12전? 13전?"
"흐응, 그럼 은화는 철전으로 얼마나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10전쯤?"
"그래서 그랬던 거군요!"
메디아는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 속에서 은색의 돈을 꺼냈다.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딱 봐도 은화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빛이 나는 화폐였다.
"자, 이게 은화에요. 물가에 따라 변동되기는 하지만 대략 철전 5전의 가치를 가지고 있죠."
"...고작?"
"고작이 아니에요."
그러면서 은화 두 개를 더 꺼낸 그녀는 이어서 금색 화폐를 꺼내곤.
"그리고 이 금화는 은화 3전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죠."
"무조건 10개 단위가 아니네?"
"그렇죠. 애초에 철의 유용성은 대체가 거의 불가능한데 은화 하나에 철전 10개가 되는 이상한 물가의 나라가 있다면 엄청나게 배가 부른 나라라고 밖에 못할걸요."
설명을 끝낸 그녀가 돈을 다시 지갑에 넣는 순간이었다. 타다닷 누군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 건. 발소리를 죽인다고 죽인 것 같았지만 요즘 부쩍 예민해진 어셔에겐 확실하게 들렸다. 그 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너덜너덜한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덩치로 보면 그와 비슷하거나 더 많은 나이로 보였는데. 아무래도 그들을, 정확히는 메디아를 노리는 기색에 어셔가 그녀를 지키듯 앞선 찰나.
인파 속에서 누군가의 팔이 불쑥 튀어나와 이쪽으로 달려오던 자를 붙잡더니 그대로 끌고 사라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에 그가 다시 그 자가 있던 곳을 보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이곳을 향해 달려오던 자는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시나요?"
"어? 아무것도 아니야."
어셔는 위화감을 어떻게든 지우고 메디아의 물음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무튼 요깃거리는 쿠키로 결정이네요."
"끄응, 그래도 한 끼 식사도 아니고 간식거리에 은화 2전은 너무 비싼 것 같은데."
소녀의 가죽신을 살 때 철전 12개 값을 지불하긴 했지만 가죽신은 오래 신을 수 있는 물건이다. 그보다 조금 안되는 철전 10개 값으로 조금 먹고 끝일 간식거리를 산다는 것이 아까웠다.
"흥, 누가 어셔 씨에게 돈을 내라고 했었나요? 돈은 제가 낼 테니 안심하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쿠기가 가지런히 담겨있는 작은 상자를 사 왔다.
"벨카, 같이 먹어요."
"고마워."
소녀는 메디아가 내미는 상자에서 쿠키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냄새는 고소하면서 달달한 것이 식욕을 자극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그림의 떡이라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다. 메디아가 그를 부르지만 않았다면.
"안 가져가시고 뭐 하시나요?"
돌아보니 그녀가 그에게 새초롬한 표정으로 쿠키가 든 상자를 내밀고 있었다.
"나도?"
"먹고 싶지 않으시다면 상관없지만요."
"누가 안 먹겠데!"
그는 메디아가 슬쩍 다시 가져가려는 쿠키 상자에서 재빨리 쿠키 하나를 빼내었다. 처음으로 보는 쿠키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마치 바짝 마르거나 실패한 빵 같달까.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만 아니었다면 케이트 아줌마가 만들어 주었던 무척이나 단단하고 맛없는 빵을 작게 만든 것이라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심스레 쿠키를 물었지만 생각 외로 간단하게 부서져내리며 입안에 퍼지는 쿠키의 맛에 감탄했다.
과일의 좋게 말해서 은은하고 나쁘게 말해서 밋밋한 단맛과는 다른 강렬한 단맛과 그와 동시에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짭조롬한 맛이 좋았다. 분명 빵과 비슷한 재료를 써서 만든 것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맛이 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쿠키 하나 정도는 두 입만에 금방 사라져버렸다. 하나만으로는 아쉬운 마음에 쿠키 상자를 든 메디아를 바라보면 곧바로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빙그레 웃은 메디아는.
"어머, 사기 전에는 그렇게나 아깝다~ 아깝다~ 노래를 부르시던 분은 어디로 가셨죠?"
"내가 언제?!"
비싼 것 같다고 고민하긴 했지만 노래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쿠키가 탐이 나지 않는 건 아니라서 더욱 짜증 났다. 그래 그 정도 가치가 있는 간식이기는 했다. 그래도 제돈을 주고 사 먹기엔 아까운 값이라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그런 그를 알아챘는지 메디아는 그를 더욱 도발했다.
"저는 그저 맛이라도 보라고 한 번 주었을 뿐인걸요? 나머지는 직접 사드시던가 하시는 게 어때요?"
"으악! 이게 정말!"
그러면서 쿠키 상자를 가볍게 흔드는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어셔는 저 쿠키 상자를 빼앗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메디아가 쿠키 하나를 집어서 보란 듯이 깨물어 먹으며 그를 놀리는 모습에 어셔는 이를 갈다가 지금까지 조용한 벨카를 떠올렸다.
"벨카! 메디아가 쿠키를...!"
그녀라면 자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보았으나 어셔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제 고자질을..."
메디아 또한 어셔와 같이 할 말을 잃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벨카는 쿠키가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쉬운지 깨물지 않고 작은 혀로 살짝살짝 핥아가며 먹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물러진 부분을 사각사각 갉아서 천천히,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껴 먹었음에도 결국엔 사라진 쿠키의 모습이 아쉬운 듯 빈손을 바라보는 소녀. 그 모습을 끝까지 본 메디아와 어셔는 아무 말 없이 벨카에게 남은 쿠키와 함께 쿠키 상자를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