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야만의 규칙.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이하고도 뜨뜻미지근한 감정. 분명 처음으로 겪어보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만찬장에 들어온 뒤로 한시도 소녀에게서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번에 찾아온 손님 중에 하나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에서 살아온 그가 그녀를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까. 원래 이곳에서 살던 아이였다면 진작에 인기가 많지 않았을까?
"와, 쟤 진짜 예쁘다."
"저 정도면 메디아 아가씨보다 더 한데?"
그것을 증명하듯 그의 친구들도 소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그것이 기분이 나빴다.
"야, 눈 깔아."
"갑자기 왜?"
"그냥 깔라면 깔아!"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녀석들은 그의 말에 투덜거리다 알아챈 듯 그를 보았다.
"설마... 반한 거냐?"
"와, 첫눈에?"
"그래! 반했다 왜?! 불만 있냐?"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 녀석들이 자신을 놀리려는 기색이 보이자 그는 오히려 더 강하게 나갔다. 이런 건 낌새를 보인 이상 숨기려 해봐야 놀림거리만 될 뿐이니까. 이러는 편이 쓸데없는 약점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아, 아니, 별로."
"불만이라고 할 것까지야."
"쟤한테 내 허락 없이 가까이 가지 마라."
그러면서 그는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누군가 선수를 치면 곤란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럼 쟤 옆에 있는 애는 어떻게 하고?"
"이미 사귀는 애가 있는 거 같은데."
소녀의 옆에 웬 놈이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음식을 챙겨주는 각별한 모습을 보이다 끝내 식사 중에 서로 손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에 그는 열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자 눈치를 보는 녀석들에게 말했다.
"쟤 어디 살던 누군지 확실하게 알아 와."
처음엔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들이 매번 가져오는 소식들은 그의 속에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지지는 기분이었다. 아침부터 서로에게 기대어 잠들어있던 모습부터 식사시간마다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까지도.
"감히 메디아 아가씨와 어울려?"
심지어 그를 비롯한 아이들은 쉽게 다가갈 수도 없는 메디아 아가씨와 어울리기까지 했다. 아이올로스 님의 따님인 그녀를 대함에 있어서 실수가 있어선 안 된다는 주의를 언제나 어른들에게서 들어왔다. 때때로 그녀를 질투하여 모함하거나 괴롭혔던 여자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기에 다가갈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것이다. 더욱 분한 것은 메디아 아가씨가 그를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눈에는 그놈이 예쁜 여자아이들과 시시덕 거리는 것만 좋아하는 한심한 남자로만 보였다. 심지어 훈련 때마다 대련 상대에게 지기만 한다는 소식까지 아이들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도 가신의 아들로 성에 머무르고 있다면 마땅히 그만한 실력을 보여야 하는데 매번 대련에서 지기만 하는 녀석이 좋아 보일 리가. 놈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은 계속 늘어만 갔다.
"너 이제 샬럿 안 쓸 거냐?"
"그냥 망이나 볼 거니까 빨리 끝내라."
항상 여인의 속옷을 사용해 자위하는 장난도 질려서 친구에게 양보하고 망보기를 자처했다. 항상 매력적으로 보이던 샬럿이나 여인들의 알몸도 이제는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드디어 샬럿을 마음껏 쓸 수 있다고 환호하는 녀석들이 한심해 보일 정도로. 그리고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사흘간 지켜본 바. 녀석은 기사의 아들로 훈련받으면서도 대련에서는 힘을 쓰지도 못할 정도로 약한 주제에 예쁜 여자아이들과 놀기 좋아하는 몹쓸 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소녀의 무릎을 베고 메디아 아가씨와 함께 낮잠까지 즐기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그래서였다. 결투를 신청한 건. 최소한 녀석이 기사의 아들로서 긍지가 있다면 결투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은 그 결투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녀석에겐 긍지조차 없었다.
"그 자식이 진짜!"
"결투를 거부했다고?"
"걔 기사의 아들이 맞기는 하대?"
"너희도 따라와. 그 자식은 철저히 밟아놔야 해."
그래서 다음엔 녀석이 도망가지 못하게 친구들을 불러 도망칠 곳을 막고 결투를 받아들이라고 했던 것인데. 소녀와 메디아 아가씨는 그의 생각도 모르고 놈을 감싸고 그를 내쳤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현재에 이르렀다.
"야, 파벨! 같이 가자고 했으면서 먼저 도망치면 어떡하냐?"
"어쩌냐? 메디아 아가씨까지 저러는 걸 보면 결투는 꿈도 못 꾸겠던데."
뒤늦게 그를 따라온 친구들의 말에 그는 동의했다. 그래, 메디아 아가씨가 저 녀석을 감싼다면 직접 손을 쓸 방법은 적었다.
"그러면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만들면 그만이야."
하지만 아예 손쓸 도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뭐가?"
메디아의 물음에 어셔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되물었다. 그에 메디아는 이마를 짚었다.
"역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결투를 거절하셨던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마치 그를 대책 없는 사람으로 보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어셔가 울컥하며 답하니 메디아는 정말로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건데! 내가 저 결투를 받아들여서 싸운다고 해봤자. 여기 정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도나르 아저씨한테 폐만 끼치는 거 아니야?"
녀석이 기존의 가신의 아들이라면 일이 더욱 성가셔질게 뻔했다. 더욱이 그딴 일에 벨카를 걸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어머, 제가 말하려던 게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 생각은 하셨다니 다행이네요."
"뭐가 또 문제인데?"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어셔가 부루퉁하게 있으니 메디아는 쓰게 웃었다.
"그건 직접 겪으시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그것이 마냥 그를 놀리는 태도가 아니라서 어셔는 더욱 찝찝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잘 시간이 부쩍 다가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어셔와 벨카는 방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래도 벨카와 같이 잘 수 없는 건 유감이네요."
"좋은 꿈 꿔."
"네, 벨카도요."
"그럼 우린 간다!"
메디아가 아쉬운 듯 벨카의 손을 잡고 놓지 못했지만 어셔는 혹시라도 그녀들이 손을 놓지 않을 새라 벨카의 반대쪽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메디아는 손을 흔들었다. 벨카도 그에 따라 손을 흔든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그 모습을 복잡하게 바라본 어셔는 소녀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그보다 메디아의 시녀가 된 건 벨카가 원해서 하는 일은 맞는 거지?"
벨카가 메디아의 시녀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같이 있을 시간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대부터 하고 나섰지만 그녀의 설득에 납득해야만 했다. 어셔에게는 여행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선 힘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금을 모으는 것도 중요했다. 소녀는 그를 위해 돈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응, 원래는 조금 다른 일을 하려고 했지만."
어셔는 역시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이번에는 메디아의 결정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녀가 더 험한 일을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메디아의 시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놀이친구 같아 보였고 딱히 고된 일을 시킬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벨카에게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 건 메디아에 대한 작은 심술이었다.
"헥헥."
다음날, 오늘도 새벽부터 시작하는 훈련에 힘이 들었지만 어셔는 열심히 연무장을 뛰었다. 벨카가 일을 하는 건 돈을 벌고자 하는 건 그 때문이었으니까. 그에게는 소녀를 지킬 힘을 기르기도 바쁜데 돈을 벌 능력이 없었으니까. 어셔는 그것이 더 화가 났다. 자신이 지금보다 더 강했다면 더 돈을 많이 벌수 있었다면. 소녀가 상처를 입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 메디아의 시녀가 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에겐 돈을 벌 수단도 마땅하지 않았다. 힘이 없었으니까. 성년이 되었어도 아직은 어리니까. 하지만 이 모든 건 벨카를 지키지 못한다는 변명이 될 뿐이다. 싫다. 정말로 싫다. 그런 것으로 어쩔 수 없다고 낙담하고 마는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아니면 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만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건 상상으로 그칠 뿐인 이야기다. 마법이라는 건 그 자체만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조건조차 미지의 것.
사용자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해서 배워서 똑같이 사용할 수도 없는데 꿈꾸기만 해봐야 시간만 아까웠다. 어셔는 손에 넣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고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해도 그것이 언제가 될지 알 수도 없는 그런 불확실한 마법을 갈망하기보다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을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구차해 보일 것을 각오하고 도나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훈련에 토를 달지 않았다. 숨이 끝까지 차올라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악!"
그가 달리던 땅이 갑자기 확 내려앉아서 넘어지고 만 것은. 어셔의 목소리에 앞서 달리고 있던 로기가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도나르도 무슨 일인가 하며 다가왔다가 이상을 발견했다.
"두더지...는 아닌데."
분명 평평하게 땅이 골라진 연무장이었다. 아니, 원래 연무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연무장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평평한 곳이었다. 그런데 어셔가 넘어진 곳에는 누가 봐도 티가 날 정도로 누군가 땅을 파내어 놓은 흔적이 있었다. 주변이 잔디로 가득해서 갈색 흙이 드러난 모습이 더 선명했다. 달리기는 이곳보다 떨어진 곳에서부터 시작하기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중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걸리지 않고 넘어가버렸던 것 같지만 이번에는 운 나쁘게 걸리고만 것 같았다.
"누가 파놓은 건가?"
도나르가 그 흔적을 살피면서 의아해하면서 파내어진 흙을 보충하고 있으면 로기가 어색하게 어셔에게 손을 내밀었다.
"쯧, 저리 치워."
땅이 파내어진 것 때문에 넘어지긴 했어도 발을 삐거나 다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녀석에게 도움 따위 받고 싶지 않아서 어셔는 스스로 일어났다. 하지만 사흘 동안 이곳은 아무 일도 없이 멀쩡했는데. 대체 누가 갑자기 무슨 이유로 저렇게 땅을 파 놓았을까?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것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로도 미심쩍은 일은 계속 일어났다.
"어셔, 잠깐."
"왜?"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소녀가 그가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먹으려던 것을 멈춰세웠다.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린 소녀가 그의 숟가락을 대신 들어 빈 접시에 털어버리자 수프에 웬 커다란 파리 한 마리가 빠져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게 여기서 왜..."
"이건 못 먹을 것 같으니까. 나눠먹자."
다행히 벨카의 몫으로 나온 수프를 나눠 먹는 것으로 아침은 해결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그냥 운이 좋지 않았겠거니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시녀의 일로 메디아에게 먼저 찾아간 벨카를 만나러 정원으로 나가는 길에 갑자기 2층에서 그의 근처로 화분이 떨어져 산산조각 났던 것이다. 놀라서 올려다본 2층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셔. 신발을 털어야 할 것 같아."
"이건 또 뭐야?"
정말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건 새벽에 달리느라 피곤해진 발을 쉬게 하려 벗어놓았던 신발 속에 날카로운 바늘이 가득했을 때였다. 그 신발은 어셔가 시골에서 신고 왔던 나무신이 아니라 도나르가 훈련할 때 사용하라며 그에게 선물했던 군화로 신발의 안쪽이 보이지 않는 형태였다. 때문에 벨카가 아니었다면 제대로 걸어 다니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후우, 벌써 시작했나 보네요."
메디아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말했다.
"시작하다니 뭘?"
"뭐긴요. 그들이 어셔 씨를 괴롭히는 것 말이에요."
"결투니 명예니 운운하던 녀석들이 이렇게 치졸하게 나온다고?"
어셔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물으면 메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번엔 특히 심한 거 같긴 하네요."
그러면서 메디아는 그의 신발 속에서 나온 바늘들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혹시 아직도 신발 안에 뭐가 남아있나 싶어 계속 털어봤지만 다행히 뭔가 더 들어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물어봤었잖아요?"
"그게 이런 거였어?"
어셔는 황당했지만 이미 그의 대응법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 그는 바빴다. 이런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됐어. 하다 보면 질리겠지. 괜히 뭐라 하면 더 좋아할걸?"
"우와."
이때 어셔는 메디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감탄한 이유를 미처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