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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야만의 규칙. (87/220)



〈 87화 〉야만의 규칙.

자색의 눈동자가 종아리를 잡고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어셔를 보고 주변의 아이들을 쏘아보았다. 분명 자수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눈이었지만 메디아의 시선을 받은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또 다친 거야?"
"그런 건 아닌데."

뒤이어 벨카의 금빛과 잠시나마 마주친 소년이 얼굴을 붉혔지만 그녀가 일말의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어셔에게 다가가 그를 살피자 인상을 구긴다.

"제 말이 안 들리시나요?  제 방 앞에서 소란을 피우고 계시죠?"
"이 녀석이 자꾸 도망치면서 결투를 안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결투란 말이죠?"


그의 변명에 메디아가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순수해 보이는 반응에 소년의 얼굴이 밝아졌다. 분명 그녀가 결투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그것이  우습다고 생각하며 메디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건 이 녀석이...!"
"혹시라도  앞에서 거짓을 고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소년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려 했지만 곧바로 메디아에게 가로막혔다.


"그레고리 경의 자제분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결투의 사유가 불순하다면..."


그녀는 일부러 말을 끊고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안에 담긴 싸늘한 빛에 그가 굳어서 침을 삼켰다.

"그것만큼 불명예스러운  없을 테니까요."


메디아가 기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는 명예를 들먹이자 소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대로 시간을 끌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무슨 이유죠?"
"그건, 그건!"

소년은 최소한 자신이 어셔에게 결투를 원하는 이유가 명예로 치장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지 한참을 망설이다.

"윽! 두고 보자!"
"엇, 너 어디 가?!"
"야! 같이 가!"


어셔에게 한 마디  내뱉곤 그대로 도망쳐버렸다. 그를 따라왔던 아이들은 원래 이곳에 온 이유였던 소년이 도망치자 그의 뒤를 따라갔다. 메디아는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경멸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이지. 무작정 머릿수와 힘으로 밀어붙이려다 마음대로  되니까. 도망쳐 버리는 건가요? 한심하기는."

도망친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그녀는 어셔를 보았다.

"그래서 특별히 다치신 곳은 없나요?"
"어? 그다지."


그는 메디아에게 걱정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벨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 옷은 어떻게 된 거야?"

왜냐하면 그녀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엄밀히 말해서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어셔도 다른 하녀들이 사이즈만 다르게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정말 같은 옷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소녀가 입은 옷은 다르게 보였다.

"그, 잘 어울려?"
"어, 어. 정말로 예뻐."
"응, 다행이다."


소녀가 가슴 부근에 장식된 리본의 끝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조심스레 묻자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일 만큼. 벨카는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조금 굳어져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런데 그거 하녀들이 입던 거 아니야? 왜 벨카가."
"그야 오늘부터 벨카가 제 전속 시녀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옷이 뜻하는 바를 도저히 무시할  없어서 어셔가 물으니 답하는 것은 메디아였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가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자 메디아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 뭐긴요? 이제 제가 벨카와 계속   있다는 이야기죠!"
"누구 마음대로!?"
"후흥! 먼저 성에서 일하고 싶다고 한 건 벨카인 걸요. 그렇죠?"
"그건..., 응."

정작 소녀가 신청한 건 다른 부문이었으며 해당 부문이 가득 찼다고는 해도 임의로 바꾼  자신이라는 걸 메디아가 쏙 빼먹고 말하니 벨카는 부정할 수도 없이 애매하게 긍정했다.

"나는 반대야!!"

어셔의 외침이 복도를 울려 퍼졌다.

"하필이면 그때 아가씨가 끼어들어서!"


한편 메디아의 추궁에 차마 답하지 못하고 도망친 소년은 이를 갈며 주먹으로 벽을 쳤다. 그도 어셔에게 결투를 신청한 이유가 정당성이 부족하다 못해 불명예스럽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꾸만 머릿속에 그녀가 떠올라 참을 수가 없는데.


"손님들이라니, 알고는 있었는데. 어디 다른 영지에서 사절단이라도 찾아왔대?"
"그런 건 아니고 타국에서 상단이 왔다던데?"

상단이 왔던 첫날, 손님들이 왔다는 소식에 성은 한참 떠들썩했지만 그는 딱히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집중할 것이 있었으니까. 그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면서도 좁은  사이로 밖을 엿보았다. 그곳에는 여인들이 옷을 벗고 있었다. 스르륵 옷자락이 내려가면 보이는  여인들의 새하얀 속살과 또래의 여자아이들과는 다른 뚜렷한 굴곡이다.

"상단이라고? 연맹 내에서도 아니고 타국에서?"
"듣자 하니 그렇다더라."


 모습에 침을 삼키다 소리가 너무 큰  같아 들키지 않을까 긴장하면서도 좁은 틈으로 좀 더 많은 부분을 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여인의 허리와 엉덩이 이상은 보기 힘들었다. 운이 좋아야 가슴이 살짝 보이는 정도고 정말로 운이 나쁘면 아무것도 못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마침 한 여인이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있는 균열이 약간이나마 드러났으니까.

남자와는 다른 여성의 증명. 부풀어 오르는 자신의 물건이 저곳을 원하고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하녀라고 해도 엄연히  성의 고용인이다. 여인들의 인맥은 이곳저곳에 있으니 함부로 건드리기엔 위험했다. 더욱이 그들은 성인이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신체적으로는 미숙한 편이다. 이기려고 하면 못 이길 것도 없지만 그래도 한순간의 쾌락을 위해 도박을 하기엔 너무 위험하다며 손으로 제 물건을 주무르며 달래었다.

"그러면 우리만 바쁘게 된 거잖아. 으으, 이러다 팔에 알통 생기는  아니야?"
"이미 생겼어. 그러게 주방 담당은 힘들다고 했잖아."
"아, 진짜다! 좀 더 늦게 오지. 예정을 듣고 더 느긋하게 준비할 줄 알았는데!"


특히 그의 아버지는 엄격했으니까. 그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 가검으로 그를 두들겨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 위험한 행위가 더 끌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쩌겠어. 아이올로스 님께서 중간에 마주쳐서 기왕 마주친 김에 데리고 오셨다는데."
"으아! 왜 그러셨어요. 아이올로스 님!"
"그래도 다른 곳에서 우리 도와준다잖아."
"정말?! 누구누구래?"

그녀들은 이곳에 또 다른 누군가가 음흉한 눈으로 자신들의 나신을 핥듯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다른 애들은 몰라도 아냐는 확실할걸?"
"아냐라면 환영이야!"


 여인이 기쁜 듯 껑충 뛰자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출렁이는 것이 언뜻 보였다. 좀 더 자세히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너, 아냐에게 아이올로스 님과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는 거지?"
"당연하지! 우리 중에서 경험이 있는 건 아냐뿐이잖아?"
"우리 신랑감은 어디에 있을까? 상냥한 사람이면 좋겠는데. 세상에 있긴  거겠지?"
"...그런  지금 말하지 마!"


그녀들이 모든 옷을 벗어 놓고 욕탕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숨어있던 캐비닛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양옆의 캐비닛도 열리며 두 명의 아이들이 빠져나왔다. 사실 그 혼자서 이곳에서 엿보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친구들 또한 같이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야야, 샬럿 가슴 봤냐? 흔들리는 것 좀 봐. 더 커진 것 같지?"
"진짜 사이에 끼워보고 싶다."
"그걸로 되겠냐? 삽입 정도는 해야지."
"너 꼭 해본 것처럼 말한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들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순서는 정해져 있었지만 으레 그렇듯 자신의 차례가 될 때마다 무시하고 싶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은 하녀들이 이용하는 공동 욕탕에 껴있는 탈의실이었다. 가신을 가족으로 준 고용인은 방에서 갈아입고 씻으면 되니 이런 곳은 필요 없지만 일반적인 하녀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들은 여럿이서 작은방을 함께 사용하고 욕탕도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이번엔 칼, 네가 망볼 차례잖아. 갔다 와."
"칫, 알았다고."

그들의 눈치에 칼은 어쩔 수 없이 망을 보러 바깥쪽 문을 살폈다. 그리고 그와 남은 한 명이 하는 일이란...

"난 샬럿이다."
"진짜, 나도 샬럿 좀 쓰자."
"내가 망볼 때 하면 되잖아."
"그러면 칼이랑 가위바위보 해야 한다고."


그와 투닥거리지만 결국 다른 여인의 속옷을 집어 드는 녀석을 보고 그는 만족스럽게 샬럿의 속옷을 집어 들었다. 저 둘은 주방 담당이라 가장 일찍 일어나는 이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적한 시간대에 일어나 따로 목욕을 했기에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샬럿은 아직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있는 데다가 큰 가슴으로 그녀들의 속옷으로 자위할 때면 주로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의 속옷으로 물건을 감싸면 천의 감촉이 쓸렸다.


천 자체의 감촉은 별로였지만 그녀의 아랫도리를 감싸고 있던 속옷에 자신의 물건이 감싸져 있다는 것과 이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가 다시 사용할 것을 생각하면 흥분이 될 수밖에 없다. 단 좋을 대로 뿌려둘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쌀 것 같으면 꾹 잡아 눌러서 새어 나온 것만을 간신히 묻혀두는 선에서 끝이다. 하지만 이 일도 빨리 끝내고 나가야 했다. 망을 보던 칼이 조용히 소리치기 시작했으니까.


"야! 슬슬 올  같아!"

 둘이 할 일이 많아 유독 빨리 일어나 준비하는 것이지 같은 주방 담당의 하녀들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니까. 마침 자위를 끝낸 둘은 그녀들의 속옷을 최대한 처음과 같은 모양새로 제자리에 두고 기다렸다는 듯 준비한 물을 꺼내 입에 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물이 조각조각 흩어지도록 뿜어냈다. 일부러 물을 묻혔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적당히 물방울이 맺힐 정도면 충분했다.

"빨리! 빨리!"

그리고 다른 이들이 복도에 들어서기 전에 그들은 복도 끝의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곳을 발견했을 땐 먼지투성이라 졸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말았었다. 어차피 쓰지 않는 창고라는 건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문과 오래되어 곰팡이가  물건들, 기어 다니는 벌레들로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의 장점을 알게 된 뒤로 그들은 부지런히 이곳을 청소해서 비밀 아지트로 삼았다.


"램프 좀 켜봐."


그의 재촉에 칼이 램프를 켰다. 그러자 드러나는 창고는 꽤 아늑해 보였다. 기어 다니는 벌레들을 잡아죽이고 열심히 청소했으니까. 팔자에도 없었던 청소지만 그들은 이곳을 열심히 청소하고 정리했다. 귀찮지 않은  아니었지만 안정적으로 하녀들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훔쳐보고 그녀들의 속옷으로 자위할  있다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 매력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포기할 수 없었다.


덕분에 하녀들보다도 일찍 일어나게 된 습관이 생긴 그들이지만 매일 그녀들을 훔쳐보고 하루를 시작하는 쾌감은 다른 단순한 장난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습기야?"
"욕탕이라 그런가 자꾸 습기가 찬단 말이야."
"이제 젖은 속옷은 지긋지긋한데."

그들은 작게 들려오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이번에도 들키지 않았다는 걸 알고 킬킬 웃었다. 이런 은밀하고 중독성 넘치는 장난을 그들이 쉽게 놓칠 수는 없었다. 잠깐 창고에 머무르던 그들은 하녀들의 대화소리가  이상 들려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녀들은 욕탕에 들어간 상태일 테니 그 사이에 이곳을 지나가야 했다. 좀 더 머무르고 싶지만 곧 그들의 훈련시간이었다.


"끄응, 평소에도 그랬지만  아빠도 정말 용서 없다.


훈련을 받고 낑낑거리는 칼의 말에 그는 지친 숨을 고르며 말없이 동의했다. 그의 아버지, 그레고리는 자신의 아들이라 해도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엄격하게 굴었다. 그나마 오늘은 아이올로스의 수행원으로 따라갔기에 아침 훈련이 일찍 끝났지만 그만큼 더 힘들게 한 것 같았다.

"기사가 되는 건 좋은데. 이렇게 빡센 훈련은 그만하고 싶다."
"그러게."


그가 존경하는 아버지라는 건 사실이지만 그는 가끔 그런 아버지의 엄격함에 숨이 막힐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더 몰래 짜릿한 일탈 거리를 찾게  것이었지만 그리고 그들이 만찬장에 도착했을  그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꽃처럼 붉은 소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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