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야만의 규칙. (86/220)



〈 86화 〉야만의 규칙.


"하아,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어셔는 메디아의 방문 앞에서 처량하게 앉아 시간을 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라면 뻔하게도 메디아가 벨카를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그녀 때문에 벨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건 불만이었지만 그렇다고 메디아를 떼어놓을 순 없었다. 마음 같아선 소녀를 독차지하고 싶은  사실이었지만 메디아는 벨카에게 있어서 그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친구라 부를만한 상대였으니까.

그는 벨카를 위해서라도 둘을 따라다닐지언정 방해하지는 않았다. 같은 여자아이가 아니었다면 이야기는 달랐겠지만. 그러다 자신에게도 친구라 부를만한 이들이 있었다는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커너랑 로버트는 어떻게 됐을까."


마을의 실체를 서서히 알게 되면서 어셔는 그들을 거부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들이라고 해서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 필요 이상으로 배척했던 건 아니었을까? 고민했지만 그와 함께 릴리가 떠오르며 조금은 후회되던 마음이 사라졌다. 흐릿한 인상에 이름마저 몰라서 그저 동네 바보라 불렀던 여자아이. 그의 기억 속에서 가장 강렬히 남은 기억이란 로버트와 커너에게 몸을 내어주던 모습이었다.

그것이 그가 처음으로 목격한 여자의 나신이며 남녀의 관계였기 때문에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엔 그 의미조차 알지 못하면서 자각해버린 욕구를 풀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맥의 명령으로 커너나 로버트만이 아니라 마을의 남자들과 관계를 맺어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셔는 혐오감에 몸서리쳤다. 또한 그녀를 동정했다. 바보라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런 일을 하며 맥에게 이용당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맥의 입으로 그녀가 백치가 아니라 단순히 그런 행세를 하고 있었을 뿐이며 어셔와 벨카와의 관계를 일러바친 것 또한 그녀였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이 그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알았을  느낀 배신감이란 이루 말할  없었다.


"어차피 이제 만날 수도 없으니까."


혼자서 가만히 있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는 커다란 방문에 등을 기대며 머리를 식혔다.


"우으, 이제 그만, 용서해 줘."

쉬는 시간도 없이 자꾸만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탓일까? 벨카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요. 앞으로 몇 벌은 더 입어야 한다구요."

하지만 메디아는 아직 소녀를 대상으로 한 이 인형놀이를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느냐 한다면 때는 메디아가 정원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로 돌아간다.

"벨카도 참. 그냥 깨워주셨으면 일어났을 텐데."


메디아는 익숙하지 않은 낮잠으로 인해 찌푸둥한 몸을 풀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어셔가 도나르와 훈련할 시간이었기 때문에 벨카도 그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소녀를 찾아 걸어갈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길이 엇갈리지 않아 다행입니다."
"히스."


키는 그녀와 엇비슷했지만 또래의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그는 키만 작을 뿐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냉철하기로 소문난 그녀의 아비보다도 깐깐함이 드러나는  냉소적인 표정은 그를 만만하게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요즘 따라 자주 마주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죠?"

딱히 불편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얼굴을 보고 있으면 메디아는 절로 딱딱하게 대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성격상 주로 공적인 일이 아니라면 마주칠 일이 없다는 것도 있었지만.

"고용을 원하는 인선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번에 들어왔다면, 파시페니아 분들 쪽이겠네요."


가신으로 들어오는 자들은 주로 전문적으로 훈련된 기사, 즉 엄격한 시험에 합격한 무관이나 전투보다는 행정을 도맡는 문관이었다. 문관보다는 무관의 수요가 많으므로 주로 가신으로 들어오는 자들은 기사들이다. 영주는 그들의 가족을 책임질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도 함께 받아들이는데 간혹 가신의 가족 중에서 성에 고용되길 원하는 아녀자가 있다면 고용하고는 했다.

영지와 성을 관리하는 그들의 입장에선 가신의 가족들이 그저 놀고먹는 것보다는 임금을 주고 노동력을 얻는 것이 더 이득을 얻을  있기 때문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성의 안주인이 심사하고 결정할 일이지만.

"서류는요?"
"여기 있습니다."

그 역할을 맡았어야 할 그녀의 어머니가 없으므로 메디아가 일부나마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많은 일이 주어지진 않았지만 이런 기본적인 역할은 할  있었다. 다만 이번에 들어온 가신들에게 가족이 있는 자가 몇 없기 때문인지 서류는 한두 장으로 끝이었다.


"그런 대단한 분들에게 정혼자는커녕 애인이 있는 분들마저 드물다니 의외네요."


그것은 정말로 의외였다. 그들의 실력을 본다는 이유로 상대가 되었던 기사들은 기사들 중에서도 특출난 자들을 선별한 근위대였으니까. 그들을 단 한 명도 빠트리지 않고 승리한 기사들이 애인이나 정혼자가 드물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몬스터들의 왕이라 불리는 드래곤을 상대할  있다는 기사들이 말이다. 어디에서나 몬스터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실력이 뛰어난 기사는 최고의 신랑감이나 다름이 없었기에.


덕분에 성에 고용된 하녀들이 꺅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일이 많아졌다. 그야 그녀들 입장에선 최고의 신랑감들이 넝쿨 째 굴러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가신을 가족으로 둔 고용인은 당연히 일반적인 하녀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는다. 아마 이번 일을 기회로 보는 하녀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 뻔했다. 그건 그들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기에 제제하기 보다 오히려 장려하는 중이라는 것도 메디아는 알고 있었다.

"이분은 도나르 경의."


가장 첫 페이지에 나온 초상화와 이름은 메디아에게도 안면이 있는 이의 것이었다. 그녀의 친구인 벨카와 어셔를 거둔 이의 가족이니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우선은 보류해둔 그녀는 다음 장으로 넘겼고 그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벨카의 초상화를.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히스."
"그것이."

그녀가 물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그는 소녀가 먼저 고용을 원했다는  알려주었다.

"...좋아요. 어차피 이 둘 밖에 지원자가 없으니 바로 결정하도록 하죠. 시프 씨는 원하시는 부문에 자리도 있으니 그대로 고용하겠지만."

그녀는 벨카가 원하는 부문이 청소나 빨래 같은 허드렛일이라는 것을 보고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후, 저에겐 말하지도 않고 이런 걸 신청하셨으면서 저와는 만나기도 힘든 곳에 지원하셨다는 거죠?"


이런 소녀의 행동이 기특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마  사실을 메디아가 알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을 어쩔 수는 없었다.


"히스, 그녀가 신청한 부문은 이미 빈자리가 없으니 제가 임의로 바꿔도 상관이 없겠죠?"
"물론입니다."


비록 그가 깐깐하다고 할지라도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살짝의 욕심을 채워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근 몇 년간 채워진 적이 전혀 없는 자리에 그녀를 채용해도 아무도 뭐라 할 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메디아가 벨카를 고용한 부문은 그녀의 시녀였다. 소녀는 입장상 가신의 가족으로 취급되기에 흠잡을 데도 없다. 그리하여 자신의 시녀가 된 벨카를 메디아가 심술을 부려 인형 삼아 옷을 갈아입히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성실한 것도 좋지만 벨카는 너무 심하다구요! 이득이 된다면 적당히 이용할 줄도 알아야죠!"
"그렇지만."
"쓰읍! 그리고 그쪽으로 고용되었다면 저랑  시간이 없어져 버린단 말이에요! 벨카는 저를 외롭게 하실 생각인가요?"
"아우, 미안해."


사실 벨카와 함께 있을 시간이 줄어도 너무 줄어든다는 것이 그 이유였지만 말이다. 더욱이 그녀의 친구를 그런 허드렛일을 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자! 이제 마지막 옷이랍니다. 이게 앞으로 벨카가 입고 다닐 옷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녀가 내민 것은 소녀의 또래에 맞추어 만들어진 하녀복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쉽네요.  더 좋은 옷을 입혀드리고 싶었는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한걸."
"제가 만족스럽지 않은걸요!"


그렇게 하녀복으로 갈아입은 벨카를 본 메디아는 불만을 잊고 감탄했다. 또래 중에서도 여린 소녀이기 때문일까? 어른들이 입는 것보다 크기만 작을  같은 디자인의 하녀복을 입고 있음에도 아무리 보아도 단순한 하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원에서 피어나는 꽃과도 다름없는 붉은 머리카락 위에 얹어진 하얀 레이스가 장식된 검은 카츄샤와 가녀린 몸을 감싼 흑백 톤의 하녀복이 정말 하녀가 입는 것과 같은 것이 맞는지 괜히 의심스러워질 정도다.

그 작은 몸과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얼굴, 백합이 떠오르는 맑은 피부, 금빛의 눈동자가 만들어내는 분위기 때문인지 소녀는 하녀복을 입혀 놓은 정교한 자기 인형 같았다.


"정말, 어떻게 하면 어떤 옷을 입든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을까요?"


덕분에 약간의 심술로 끝났을  갈아입히기가 기세를 타고 오래 걸린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소녀를 대상으로 한 인형 놀이가 끝났을 무렵. 그녀들은 문밖이 소란스럽다는 걸 알아차렸다.

"야, 네가 말했던 애 쟤 아냐?"
"맞는 거 같은데? 머리 색도 그렇고. 아가씨  앞에 아무렇지 않게 있는 것도 그렇고."

메디아의 방문 앞에 앉아 있던 어셔의 귀에 문득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덕숙덕 소리는 작았지만 신경을 건드리기엔 알맞은 크기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가 고개를 들자 보이는 아이들에 혀를 찼다. 정확히는 그 사이에 섞여서 이쪽을 보고 있는  소년의 모습 때문이었다.

"너! 아까는 잘도 도망쳤겠다!?"


그는 다름 아닌 어셔에게 장갑을 던지며 결투를 신청했던 녀석이었으니까. 녀석은 앉아 있는 그의 앞까지 다가와 씩씩거렸지만 어셔에겐 안중에도 없는 상대였을 뿐이다.


"흐아암, 그래서 그런 시답잖은 이유로 지금까지 날 찾아다니고 있었냐?"

그에겐 이렇게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귀찮게 구는 녀석이 한심하게만 보였다.

"시답잖은 이유라니! 신성한 기사의 결투에서 도망치는 겁쟁이가!"
"하아? 신성한 결투?"
"그래!  겁쟁이 녀석!"
"겁을 먹지 않고서야 결투에서 도망칠 리가 없잖아!"


심지어는 그 녀석을 따라온  명의 아이들이 외치며 어셔를 에워쌌다. 그에겐 참 어이없는 소리가 따로 없었다. 도나르에게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면 더더욱. 어셔는 식사 때 들은 결투에 대해 떠올렸다.

"그래서 그 결투라는 건 뭐 때문에 벌어졌는데요?"
"기사들의 치정 싸움 같은 거지.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켰다거나 정말 억울할 때 신청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가 하면. 남의 전리품이나 공훈이 탐날 때 다른 이유로 결투해서 그걸 빼앗기도 하거든."


들으면 들을수록 기사라는 것이 동화나 낭만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직업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엄청 속물적인 이유네요."
"그렇지. 하지만 보통 군기를  중요하게 여기니까 거의 사장된 문화다."
"왜요?"
"애초에 기사라는 게 전문 군인이기도 하지만 지휘관의 역할도 수행한다고. 결투를 하면 한쪽이 죽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애꿎은 고급 인력을 줄이는 것밖에 더 되겠냐?"

어느 곳이던 여러 위험과 몬스터와의 전쟁으로도 바쁘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는 이들은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밖에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걸 과연 신성한 결투라고 말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남의 여자가 탐이 나서 힘으로 빼앗겠다고 하는 거나 다름없으면서 그런  신성한 결투라고?"
"이익! 내가 언제!"


애초에 그가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니 녀석이 발뺌할  있다는 것이 성가시다.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결투를  하는 거겠지!"
"이기면 그만이잖아!"


주변에서 계속 시끄럽게 구는 녀석들이 정말 짜증이 났지만 아직까지는 봐줄만했다. 보통이라면 싸움을 받아들였겠지만 벨카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신세를 지고 있는 도나르와 시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참으려 했다.

"받아들이라면 받아들이라고!"

자꾸 무시당하자 화가 났는지 녀석이 어셔를 발로 찼다.

"악! 이게 진짜!"

하필이면 맞은 곳이 로기와 대련 때문에 무리가 온 종아리라 어셔가 일어나려 했을 때.


"남의  앞에서 이게 무슨 소란이죠?"


문이 열리며 메디아와 벨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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