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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화 〉야만의 규칙. (85/220)



〈 85화 〉야만의 규칙.

어셔가 벨카를 데리고 그들의 방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거기 너!"

누군가 사람을 부르는 듯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는 처음 듣는 목소리였기에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걸어가자 다다닥 복도가 울릴 만큼 뛰는 소리가 바로 뒤까지 다가왔다.

"너 말이야! 너!"


어셔는 그제야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였다는 걸   있었다.

"뭐야?"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면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열이 받은 듯 벌게진 얼굴로 그의 앞까지 다가온 이름 모를 소년이 보였다. 상단의 아이는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어셔보다 나이가 적어 보였으니까. 그렇다면 원래부터 이 성에 살던 누군가의 아이일 터였다. 그가 다른 아이에게 시비를 걸거나 화나게 할만한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일 같은 건 없었다. 이 성에  뒤로 메디아를 제외하면 그다지 다른 아이들과 엮인 적도 없었으니까.

"걔랑 무슨 관계야?!"
"누구를 말하는 건데?"

화난 것처럼 보이는데 계속 어셔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시선을 피하며 목소리만 높여 소리치니 알아들을 겨를이 없었다. 혹시 메디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네가 안고 있는 걔 말이야!"
"벨카?"


노골적으로 소녀를 가리키는 말에  녀석이 무슨 이유로 찾아왔는지  것 같았다.

"그, 그래!"

그러자 붉어 보여서 화가 났다고 생각했던 소년의 얼굴이 그저 화가 나 보이지 않는다는 걸  수 있게 되니 어셔는 짜증이 났다. 안 그래도 아냐라는 하녀에게 그들의 관계가 이상해 보이는 눈치를 받았던 직후라 더욱 그랬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겨 쫓아내고 싶었지만 아무 이유 없이 그랬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 품에는 아직 벨카가 안겨있었기에 참았다.


"사귀는 사이다 왜?"

이제야 슬슬 실감하고 있는,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이런 녀석 앞에서 숨기고 싶지는 않아서 부러 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더욱 붉어진 얼굴로 어버버 거리며 그를 바라보는 녀석. 왠지는 알  없었지만 한 방 먹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그나마 좋아진 기분으로 그들의 방에 돌아왔다.

"시프 누나는 어디로 갔지?"


방에는 돌아왔지만 어째선지 방 안에는 도나르는 물론 시프마저 보이질 않았다. 도나르는 기사니까 몬스터와 싸우러 갔다고 하지만 시프는  방에 없는지 모를 일이다. 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소녀를 침대에 눕혀놓으려 했었는데.


"저기, 벨카?"
"응."
"왜 계속 붙잡고 있어?"


어째선지 소녀가 그의 목에 두른 팔을 풀지 않고 계속 껴안고 있었다. 때문에 다시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물으면.

"...안 될까?"

달콤한 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부탁을 그가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언제나 그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벨카였지만 이따금 그녀가 부리는 어리광은 어셔의 몫이었다. 그것이 퍽 기꺼워서 그는 그냥 소녀를 눕히려 했던 침대에 같이 누워버렸다. 먼저 끌어들인 건 그녀였으면서 정작 그가 다가가니 어쩔 줄 모르는 소녀. 그러면서 스치는 옷깃과 맞닿는 체온이 뭉근하게 가슴을 달아오르게 만들어 숨이 차올랐다.

손끝이 간지러워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침대의 위에서 소녀와 마주 안고 있으면 삿된 마음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지금은  따스하면서도 몽글몽글한 감각을 더 만끽하고 싶었다. 그렇게 서로를 품고 있으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셔."
"왜?"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가득해 듣고 있는 귀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어셔, 어셔."

들뜬 기색으로 계속해서 그를 부르길 반복하는 그녀가 이상해 고개를 들어보면 붉은 끼가 감도는 소녀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입술에 닿는 촉촉한 감촉. 이제는 익숙해진 듯하면서도 그 행위의 의미를 생각하면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일을 해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는 벨카에 어셔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흐에."


그가 벌떡 일어나 소녀의 위에 올라타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가 보였다. 정말이지 자신이 예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러는 소녀가 꽤나 불만이었다. 아니면 그가 이렇게 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짓궂은 생각을 하면서 자꾸 이러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되는지 실컷 가르쳐 주고자 했을 때였다. 똑똑 하고 누군가 찾아온 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건.


어셔는 누군가 찾아올 일이 있는지 생각했지만 그런 이는 없었다. 시프나 도나르에겐 이 방의 열쇠가 있었으니 그냥 열고 들어오면  일이었고 메디아라면 잠들어서 하녀가 방으로 데려갔다. 그는 일단 조용히 있기로 했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안에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문쪽으로 다가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물으려고 했다.


"분명히  방에 들어가는 걸 확인했는데."

문밖에서 그런 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 목소리는 방금 그들의 관계를 물었던 소년의 것이었다. 그 사실을  어셔는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짜증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 방해하다니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열어주지 않아도 돼?"

문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오는 그의 모습에 소녀가 의아해했다.


"됐어. 중요한 일로 온 건 아닐 거야."


어차피 벨카에게 말이라도 붙여보고자 찾아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면 어른인 도나르나 시프가 있을 때 찾아왔을 텐데. 도나르는 몬스터를 잡으러  모양이고 시프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기분도 별로니 그냥 소녀와 함께 누워있으려 하면. 쿵쿵쿵! 이제 갔나 싶었더니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
"?"

쾅쾅쾅! 인내심이 다했는지 두드리는 것을 넘어 문을 부수려는 듯 거센소리가 들려오자 어셔는 결국 문을 열고 나갔다.

"왜 자꾸 문을 두드리고 난리야!"
"역시 안에 있었잖아!"


어셔는 씩씩 거리며 화난 목소리로 외치는 소년이 어이가 없었다. 지금 화내야 할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럼  봐도 불순한 목적으로 찾아온 녀석한테 누가 문을 열어줘?"
"뭐, 뭐? 누가 그래!?"


녀석은 되레 화를 냈지만 그건 찔린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무슨 중요한 일이길래 생판 남의 방까지 찾아온 건데?"

이쯤 되면 무슨 일인지 오히려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건..! 그러니까..."
"뭐?"
"벨카란 애는."
"그래서 왜!"

정작 볼일을 물으니 말을 더듬으며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녀석의 모습이 답답해 재촉하니 결국 터진 것일까. 얼굴이 까매 보일 정도로 빨개진 녀석이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그에게 던졌다. 짜악!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며 그의 시야를 가렸다. 기분은 나빴지만 요란한 소리에 비하면 아프지도 않아 실속이라곤 없었다. 자신의 얼굴에서 떨어지려는 그것을 반사적으로 잡아보면.

"장갑?"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가져왔는지. 녀석의 손에는 맞지도 않아 보이는 커다랗고 낡은 가죽 장갑이었다. 이런 걸 남의 얼굴에 던져놓곤 한다는 말이.


"결투를 신청한다!"


같은 이상한 말이다.

"그래서 볼 일은 그게 끝이냐?"
"어? 어?"

볼일을 더 말해보라는  노려보고 있으면 그 역시 녀석의 생각과는 달랐는지 당황스러워 보였다. 어셔는 녀석이 던졌던 장갑을 잡고 녀석의 얼굴에 던졌다. 짜악! 다시 한번 복도에 울리는 요란한 소리.


"꺼져!"

쓸데없는 이유로 남의 방에 찾아와서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어! 어셔는 어안이 벙벙한 녀석을 내버려 두고 거세게 문을 닫아버렸다. 이후로도 녀석이 문을 몇 번 두드렸지만 얼마  기사들이 돌아온 뒤에야 포기하고 돌아갔다.

"아하하하! 그래서 그대로 돌려보낸 거냐?"


어셔가 기사들과 함께 돌아온 도나르와 늦은 점심을 함께 하며 그 녀석의 이야기를 하니 저런 반응이 돌아왔다. 넓은 만찬장에서도 시선이 약간이나마 모일 만큼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그렇게나 재미있는 이야기였나 의문이  정도다.


"그럼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애한테 신경을 써요?"

어셔에게 있어서 그 소년의 행동이란 정말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상한 행동에 불과했다. 특별히 관심이 가는 상대도 아니었으니 관심이라도 달라는 듯한 그 행동이 거슬릴 뿐이다. 특히나 소녀를 보는 눈길 때문에 더욱. 그것이 도나르의 가르침으로인해 어쩔 수 없이 마주치는 로기가 벨카를 바라보는 시선과 유사함을 눈치챘기에 경계심만  늘었다.

"큭, 그런  아니라 녀석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한 거였을 거다."
"남에 얼굴에 낡은 장갑이나 던지면서요?"


그냥 질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케케묵은 전통 같은 거지. 주로 기사끼리 결투를 원할 때 쓰는 방법인데. 애가 어디서 이야기를 주워들었는지 참."
"저는 기사가 아닌데요."


물론 그 녀석도 아닐 것이다. 기사였다면 본인의 장갑을 던졌겠지. 자기한테 맞지도 않는 장갑이 아니라. 게다가  두서없이 무작정 결투를 신청한다고 하면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목적이야 뻔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결투는 더욱 받아들일  없었다.

"대신 견습 기사잖냐. 그걸 아는 거 보니까 그 녀석도 견습 기사일지도 모르지. 풋."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나요?"

그때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시프가 걸어와 도나르의 옆에 앉았다. 보이는 방향에 따라서 빛이 산란하는 아름다운 금발, 숲을 닮은 녹색 눈동자. 어셔의 기억 속에 남은 가족과도 닮은 그녀는 어디를 가나 시선을 모은다. 지금도 몇몇 이들은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다.

"시프 누나? 지금까지 어딜 가셨던 거예요?"
"미안, 걱정했니? 일손이 필요하다고 해서 도와주다 보니."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하얀 손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웃고 계시나요?"
"아아, 그게 말이지."


시프의 의문에 이번엔 도나르의 입에서 그가 했던 녀석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 게 보통 아이들끼리도 효력이 있던가요?"
"없지. 보아하니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뭔가 있어 보여서 따라 한 거 같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걱정스럽게 어셔를 보았지만 도나르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죠?"

어셔는 안 그래도 신경 쓸 일이 많았는데 그런 녀석 굳이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어떤 분에게 결투 신청을 받았다면서요?"

때는 도나르에게 오후 훈련을 받고 이번에도 로기에게 엉망진창으로 깨진 그에게 다가온 메디아가 한 말이었다. 잠들어서 하녀에게 안겨 돌아가더니 그가 훈련하는 사이 깨어난 모양이다.


"그거? 별로 의미도 없다는데. 무시하면 그만 아니야?"
"그게 정말 마음대로 될지 모르겠네요."
"무슨 소리야?"


의미심장한 메디아의 말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녀를 보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좋은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듯 괴롭게도 보이는 쓸쓸한 모습이다.

"저도 그게 별로 의미가 없다는  알고 있지만 아이들이란 생각보다 훨씬 집요해요."
"집요하다고?"
"네. 무작정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는 것 같아도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규칙이 있으니까요."

웬일인지 메디아는 그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예를 들어. 결투를 신청했는데 거부하면 겁쟁이 취급한다든지 말이에요."
"뭐야? 그 바보 같은 규칙은."

애초에 해서 이겨도 얻는 것이 없고 져도 손해만 보는 결투였다.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네, 바보 같죠. 원시적이고 야만스러워요."

심지어 그의 말에 동의하다 못해 덧붙이는 그녀. 한이라도 서린 듯 그 말에는 혐오와 경멸이 가득했다.

"너 오늘 뭔가 잘못 먹기라도. 악!"
"입은 만악의 근원이랍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놔!"

메디아는 아파서 발버둥 치면서도 이미 훈련으로 온몸에 힘이  빠진 후라 벗어나지 못하는 어셔를 내려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자신이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도 모르는 그의 모습을 보니 그녀도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좀 더 조심하세요. 당신이 잘못하면 피해를 보는  벨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메디아의 목소리에는 우려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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