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간극. (84/220)



〈 84화 〉간극.

마을은 때아닌 폭설에 매몰된 것처럼 하얀색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눈이 내렸다고 하기엔 주변의 푸른 초원은 조금도 하얀색에 물들지 않았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실들로 뒤덮인 마을은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아 생존자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각각 2인 1조로 나누어져서 생존자와 남아 있을 실크 모스의 암컷을 찾읍시다. 4 기사단 분들은 처음 하시는 일일 테니 짝으로 2 기사단의 단원을 데리고 가셔서 모르는 것을 물어보시면 됩니다."


도나르의 짝은 이번에 말을  게라르두스였다.


"그나저나 단순히 숫자별로 기사단을 지정해 두다니 독특하군요."

도나르는 이름도 없이 숫자로 편성된 기사단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단이라 하면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멋들어진 이름 정도는 정해두는 편이었으니까. 파시페니아도 동부 기사단이나 남부 기사단처럼 기본적으로는 수도를 중심으로 방향에 따라 부르곤 하지만 제각각 이름 정도는 정해두고 부르는 편이었다.

"아이올로스 님은 거창한 이름을 정해두는 것보다는 숫자대로 편성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하셔서 말입니다."

그것참 재미없는 이유였다. 간단한 잡담을 나눈 그들은 가는 곳마다 발에 밟히고 방해하는 실들을 끊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너무 많은 실에 뒤덮여 이곳이 정말 마을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가끔씩 보이는 사람의 흔적들이 이곳이 마을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이게 다 실크 모스가 뿜어낸 것들입니까?"
"예, 주로 은신처나 번식지를 만들 때 이렇게 마을 하나는 뒤덮을 만큼 많은 실을 뿜어내곤 합니다."

이 정도면 왜 이름이 실크 모스였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실은 딱히 끈적거리기보다는 탄력이 있어서 갑옷에 달라붙지는 않았지만 여럿이 뭉쳐져 있는 경우 질겨서 날카로운 검으로 끊어내야 겨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불로 지지면 쉽게 없앨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 되면 마을을 불태울 뿐만 아니라 남아 있을 생존자마저 죽을 것이 확실했다. 귀찮더라도 날붙이로 일일이 실을 끊고 실들을 걷어내는 것이 옳을 터였다.


커다란 고치의 실을 검으로 끊어내고 파헤치다 보면 실을 끊어내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 들었다. 천이나 가죽 따위를 찢는 것처럼 부욱 하는 소리. 좀  실들을 걷어내자 드러나는 것은 거대한 애벌레 같은 것이 아닌 동물의 가죽이다. 무두질 된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살던 움집으로 보였다. 게라르두스가 실을 걷어낼  사용하던 낫을 앞세우고 움집의 안으로 들어가고 도나르도  뒤를 따랐다.

그리고 안쪽에서 발견한 것은 사람 정도는 들어갈법한 비교적 작은 고치 두 개다.  모습에 그들은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이 각자 고치를 뜯어냈다. 이번에는  고치를 파헤칠 때보다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기에 도나르는 단검을 이용해 실을 끊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굳이 모든 실을 끊어낼 필요도 없었다. 고치를 형성하는 실들을 끊다 보면 얇아진 고치가 안쪽에 있던 내용물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토해내고 말았으니까.

"역시."

고치가 뜯어지면서 나온 것은 방금 고치에서 막 태어난 것처럼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여인이다. 그러나 몬스터가 인간을 낳을 리가 없으므로 이 여인을 실크 모스가 모태로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녀의 아래쪽에서 흘러나오는 희끄무레한 액체를 보면 확실했다. 그는 처참한 모습에 혀를 차며 움집의 일부를 검으로 베어내어 그녀의 몸을 가려주었다. 이것이 몬스터가 습격한 곳에 생존자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가 어셔에게 말했던 것처럼 몬스터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을 번식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실크 모스도 몬스터였으니 당연한 사실이다. 이 여인의 뱃속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몬스터의 알과 씨로 가득하겠지.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조차 이 여인에겐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들이 여인들을 대충 수습해서 데리고 나오면 이곳저곳에서 여인들을 데리고 나오는 이들이 보였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으며 여인이라는 사실이다.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실크 모스의 암컷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서 그들의 운명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기사들은 구출한 여인들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눕히거나 기대어 두었다. 어차피 사방이 실 투성이라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끼리리리릭!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로 수컷과 같은 종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모습의 몬스터를 발견했다. 확실히 복슬복슬한 털로 가득한 모습은 수컷과 같았지만 문제는 그 크기와 형태다. 크다고 생각했던 수컷보다 세 배는 커 보였지만 날개는 너무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다. 몸은 너무 비대해서 저래서야 날 수 있는 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는 듯 마구 날뛰는 실크 모스의 암컷.


"날뛰는 걸 막아! 근처에 아직 생존자가 남아 있다!"
-끼리릭!

놈은 애벌레처럼 커다란 몸을 휘둘러 기사들을 떨쳐내었다. 껍질은 제법 튼튼한 편인지 상처투성이지만 그래도 체액이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저 비대한 몸으로 아무렇게나 날뛰기만 했는데 벌써 근처는 엉망이다. 기사들은 지금도 창을 앞세워 놈이 함부로 발버둥 치지 못하게 만들고 간격을 좁혀 놈을 찌르려 하지만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놈이 발버둥 치면 창이 꿰뚫기는커녕 튕겨나가 창을 붙잡고 있는  한계로 보였다.

"컥!"
"저 창 누가 꽂았어?!"


 좋게 창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고 해도 그건 행운이 아니었다. 하나 정도 꽂아봐야 그 창은 역으로 놈이 휘두르는 무기처럼 되어서 그들을 후려갈겼으니까. 뒤에도 창날이나 추가 있는 타입의 창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놈에게 약점 같은  없습니까?"

도나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게라르두스에게 물었다. 이 지역의 몬스터에 대해선 그보다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가슴 아래가 약점이긴 하지만 먼저 창들로 놈의 옆구리를 일제히 꿰뚫어 발버둥 치지 못하게 하지 않으면 노릴 수도 없습니다!"


도나르는 그의 말을 듣고 실크 모스의 옆이 보이는 곳으로 돌아가 자세히 보았다. 온몸에 난 털과 놈이 계속 날뛰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놈이 다리를 이용해 자신의 가슴 부분을 가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슬링 사용할 수 있는 녀석들! 어쭙잖게 따라 하지 말고 일단 놈이 약점을 가리고 있는 다리부터 타격해!"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들과 함께 창을 들고 있던 동료 중에서 몇몇이 빠져나와 슬링을 들었다. 분명 이곳의 몬스터에 대해선 토박이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놈의 갑각이 얼마나 튼튼한지는 몰라도 드래곤이나 가재보다는 단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실크 모스는 제대로 힘이 실리지도 않는 창에도 몸에 상처가 나며 애를 먹고 있지 않는가?

-끼리리릭!!

이내 슬링의 탄환들이 연이어 가슴을 가리고 있던 놈의 다리를 타격하자 고통스러운 듯 소리를 지르는 실크 모스 암컷. 역시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탈피한지 얼마 되지 않은 가재의 갑각보다도 훨씬 약하다. 슬링의 탄환에 타격당한 놈의 다리들은 깨지고 으스러져서 이미 너덜너덜해져 투명한 체액을 흩뿌렸다.

"한 번 더!"
"오케이!"


다시 한번 탄환 세례에 타격당한 놈의 다리가 전부 부서져 떨어지며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트!"

마침 근처에 있던 기트를 부르자 그는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 창으로 실크 모스의 가슴 중앙을 깊게 찔렀다. 거대한 몬스터의 아래로 들어가는 잘못하면 그대로 깔릴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기트는 파고들었던 기세 그대로 미끄러지듯이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끼릭, 끼익...!

그곳이 심장에 해당하는 곳이었는지 놈은 꺽꺽거리는 듯한 단말마로 신음하다 축 늘어지며 숨이 끊어졌다. 게라르두스를 비롯한 기사들이 그들을 놀랜 눈으로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드래곤이나 가재처럼 정말로 터프한 녀석들을 상대해왔던 그들에게 그저 날뛰는 것만이 전부인 덩치는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그보다 지금은 생존자를 찾는  더 중요했으니까. 암컷을 쓰러트리고 놈이 튀어나왔던 거대한 고치의 안을 살펴보았지만 안쪽은 피와 분비물의 냄새로 가득했다.


"이미 다 먹어치워버린 건가...."


어차피 규모도 작은 마을, 사람을 다 먹어치우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몬스터의 모태로 사용되지 못하는 남자들은 이미 전부 암컷에게 먹혀 뼈와 찌꺼기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처럼 고치의 안은 끔찍했다. 사방에 널린 핏자국은 그렇다 해도 사방팔방에 가득한 지독한 오물의 냄새. 그것이 모두 인간을 먹어치운 결과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오물은 차라리 다른 것을 먹어치웠다고 하는 것이 더 믿겨질만큼 사람의 살아생전의 모습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건 이제 인간이 아닌 몬스터의 오물일 뿐이었다. 이래서야 이 마을이 만에 하나라도 유지된다 치더라도 정상적인 기능은 하지 못할 것이다. 마을의 일꾼들이 전부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더 이상 남은 생존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오면 정신을 차린 여인들이 몇 보였다.


"아아아악! 괴물! 괴물이!"
"진정하십시오. 이제 그것들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야?! 내가 얼마나! 얼마나!"


제정신이라 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렇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곳은 이미 절규와 비탄으로 가득한 여인들의 새하얀 지옥이었다. 그러다 마침 그가 구출했던 여인이 보였다. 그녀는 그가 덮어주었던 가죽을 쥐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기사 님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은 안심하면서도 답하면.


"다행,이네요."
"예?"


그러나 여인이 그 후로 입을 여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도 좋지 않은 일을 겪은 그녀를 추궁할 수는 없었기에 난민을 태우기 위해 몇몇 힐디스비니가 이끌고 온 수레에 태워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먼저 영지로 돌려보내고 나면 게라르두스가 말을 걸어왔다.


"이제 다음 마을로 가면 될  같습니다."

왠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지만 아직 그들에겐 할 일이 남아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