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간극.
아이올로스는 오늘도 창문을 통해 정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옛날부터 그의 딸아이는 뒤뜰의 정원에서 노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녀가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메디아는 정원에 꽃이 만연하는 때가 되면 항상 뒤뜰에 머물렀다. 봄이 되면 봄에 피는 꽃을, 여름이 되면 여름에 피는 꽃을, 가을이면 가을에 피는 꽃을, 겨울이면 겨울에 피는 꽃을 보기 위해. 뒤뜰의 정원은 늘 붉음이 피었다 저물기를 반복했다.
그가 만든 정원이었지만 정작 그곳에 발을 들이면 너무나 행복해서 오히려 가슴 아픈 추억이 떠오를까 봐 그녀가 죽은 뒤로는 단 한 번도 직접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늘 이렇게 정원을 찾는 자신의 딸을 바라만 볼 뿐. 그런 곳에 상단과 함께 찾아온 소년과 그녀와 똑 닮은 소녀가 메디아와 함께 놀고 있다. 그녀는 이제야 온 지 3일째일 텐데 붉은 꽃이 만연한 정원에 그 누구보다 어울려 보였다. 그러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소녀의 모습에 그는 창가에서 멀어졌다.
"왜 그러시나요?"
메디아가 자신과 실뜨기를 하다 말고 성 쪽을 바라보는 벨카를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누군가 보고 있었던 것 같아서."
"하지만 그쪽엔 아무도 없는걸요?"
그녀의 말대로 벨카가 바라본 창가에는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만 그 창문 쪽을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에 메디아도 그쪽을 바라보다 우연찮게 다른 시선을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저희를 몰래 훔쳐보는 사람들 중 하나였겠죠.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가끔 그런 이들이 있었다. 이 성에는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말고도 가신들의 가족도 머무르고 있다. 그들의 피가 꼭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영지를 하사받아 독립하는 경우도 있기에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되는 숫자의 자제들이 성에 머무른다. 나이 차이가 나는 이들도 있고 그들 또래의 아이들도 있지만 메디아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니, 한때는 관심을 가졌기도 했었다.
"응."
곧 흥미를 잃었는지 벨카는 메디아의 손에 엮인 실을 유심히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소녀가 실을 엮어 손으로 가져가며 모양이 바뀌었다. 메디아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친하게 지내기도 했었지만 후에 그들이 부모로부터 친하게 지내라는 말에 친하게 지내는 척하고 있었다던가. 신분을 보고 다가왔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놀았을 때는 몰랐지만 알고 난 이후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에게선 누가 억지로 어울리는 것이 아니랄까 봐 귀찮은 기색이 보였다. 왜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가끔씩은 그녀의 몸을 기분 나쁘게 훑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떠했던가? 그러나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진심으로 자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 아이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누구도 메디아를 똑바로 봐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들에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불편한 존재였을 뿐이다.
벨카의 손에 엮인 실을 다시 자신의 손으로 가져오면 다시 그녀가 가져가는 것을 느끼며 메디아는 힐긋 정원의 한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들어 있는 소년을 보았다. 그는 그녀들을 아득바득 뒤따라와서는 그녀들이 실뜨기를 하는 것을 구경하다 어느새 잠들어버린 어셔였다. 실뜨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더니 얼마 못가 잠들어버린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신기했다. 그래도 그녀들이 일어나기 전 꼭두새벽부터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저런 모습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메디아는 벨카도 벨카지만 어셔 또한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은 또래의 소년 같으면서도 때때로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들이 있었다. 조금 심한 장난을 쳐도 생각 이상으로 화내는 일이 없었고 알게 모르게 그녀를 배려해 주는 느낌이 있었다. 벨카의 경우도 그랬다. 따지고 보면 그가 억지로 소녀를 데리고 가도 할 말이 없었는데도 그녀들을 떼어놓는 일은 없었다.
어미를 쫓는 아기 새처럼 졸졸 따라오며 툴툴 대기는 하지만 그 정도면 정말 귀여운 수준이었다. 장난을 치면 곧잘 반응해서 놀리는 재미도 있었고. 그러다 메디아는 쓰게 웃었다. 이제 와서 스스로의 행동을 되짚어 보니 어셔를 시험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배척받은 건 그녀 자신이 못돼서,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 또한 그런 이유가 아닐까?
그때 소녀의 곤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이건 어떻게 해야...?"
메디아는 그녀가 실뜨기는 처음이라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도와주고자 벨카를 보았을 때 그녀는 놀라고 말았다. 왜냐하면 얽히고설키다 못해 기하학적인 조형을 그리는 실이 손을 묶고 있는 꼴이 되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손만 꼼지락거리는 소녀가 있었으니까. 그건 그래도 실뜨기를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는 메디아로서도 처음 보는 모양이었기에 실을 도저히 풀 수가 없어 결국 가위로 잘라주어야 했다.
"실뜨기로 자기 손을 묶어버리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아우, 미안해."
"어차피 남은 실을 활용한 거라서 상관없으니까요. 그런 건 드물지 않게 나오거든요."
벨카는 그녀가 책망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사과했지만 메디아는 진심으로 감탄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 실뜨기를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실을 쓰지 못하게 되어 실뜨기를 할 수 없게 된 그녀들은 가만히 앉아 정원을 바라보았다.
"역시 성 안에서는 할 일이 얼마 없으니까 심심하단 말이죠."
실뜨기도 어느 하녀가 가르쳐주어 알게 된 놀이였고 이 성에는 놀 거리라고 할만한 것이 정말로 적었다. 그녀는 뛰어놀기엔 무리가 있는 몸이었기에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건 좋아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같이 있으면 한시라도 가만히 있는 일이 없었고. 혼자 노는 것이 익숙한 그녀에게 여럿이서 할 수 있는 놀이 같은 건 생소한 것이었으니까.
"후아암."
따스한 햇살 때문이었을까? 메디아는 몰려오는 잠기운 탓에 나와버린 하품을 손으로 가렸다. 아직은 봄에 가까운 초여름의 날씨는 덥다기보다는 따뜻했고 그 햇살을 받고 있으면 절로 잠이 쏟아졌다. 그러자 벨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왜 그러시나요?"
무언가 할 일이 생겼는지 물어보려는 찰나 메디아는 소녀가 어디로 향하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나무 그늘 아래. 어셔가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대체 왜 이곳으로 왔나 싶어 그녀를 지켜보고 있으면 벨카는 나무에 기대어 앉아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던 어셔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그 모습에 그녀는 어셔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메디아에게 끼어들 틈을 안 준다며 투덜거렸지만 정작 그녀가 보기에 그들에게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까? 아마 모를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메디아가 지켜만 보고 있으면 문득 소녀가 자신의 반대쪽 무릎을 톡톡 손으로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더불어 그녀를 바라보는 금빛에 메디아는 그 의미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저도 누워도 되나요?"
벨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디아는 망설였지만 계속 그녀를 바라보는 금빛에 사양하지 못하고 소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정원에는 많이 와보았지만 이렇게 풀밭에 누워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녀의 몸에 닿는 파릇파릇한 잔디들의 간지러우면서도 빳빳한 감촉이 신기했다.
"끄으, 허리야."
어셔는 잠을 잘 못 잤는지 아니면 꼭두새벽부터 몸을 혹사시켰던 탓인지 뻐근한 허리에 몸을 뒤틀다 소녀들이 노는 것을 구경하다 잠이 들어버렸다는 걸 떠올렸다. 설마 잠이 든 그를 내버려 두고 그녀들끼리 어디로 가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번쩍 눈을 뜨면 마주치는 금빛.
"잘 잤어?"
그리고 들려오는 소녀의 고운 미성이 그의 걱정이 단순한 기우였음을 가르쳐주었다. 그녀의 뒤로 솟아올라 나뭇잎으로 따가운 햇살을 조각조각 부서뜨리는 나무의 모습이 느티나무 아래를 떠올리게 만들어 울적해졌지만 그 감정이 소녀의 사랑스러움마저 퇴색시키지는 않았다.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그저 저 금빛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좋아 계속 바라만 보고 있으면. 갑자기 성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어수선한 분위기에 몸을 일으켜보면 어셔와 함께 왔던 도나르들과는 다른 갑옷을 입은, 이 성의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지만.
"연기가 올라오고 있어서 그러는 것 같아."
"연기?"
소녀의 말에 성벽 위를 바라보면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을이 불타서 올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더 흐릿했고 연기 기둥도 좀 옅은 것을 보면.
"봉화라는 거지? 저거."
"응."
봉화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건 즉.
"몬스터가 쳐들어왔다는 거잖아!"
떠오르는 것은 짐을 챙겨 마을을 빠져나가려 했던 그날 그들을 습격했던 거대한 여치, 혹은 귀뚜라미 같은 모습의 몬스터였다. 어셔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앞에 두었을 때의 그 공포를 녀석에게서 풍겨오던 지독한 악의를. 어셔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무기를 챙겨두고자 일어서려 하면 벨카가 그를 붙잡아 안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요동치던 심장이 소녀의 품에 안기자 천천히 가라앉는다.
"괜찮을 거야. 지금은 우리를 지켜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어셔는 그녀의 말에 도나르들을 떠올렸다. 이곳은 마을과는 사정이 달랐다. 이곳은 그들 말고도 많은 기사들이 있었고 그들이 지켜줄 테니까. 어쩐지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부끄러워져 그는 소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마을이나 영지의 외곽도 아니고 가장 안전할 곳에서 저 혼자 설레발을 친 것 같았다. 그러다 뒤늦게 뭔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메디아는?"
이쯤 되면 방금 그걸 빌미 삼아 놀렸을 누군가의 목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소녀는 그런 그의 입술에 조용히 해달라는 듯 검지를 대었다. 그리고 그녀의 금빛이 향하는 곳에는.
"...얘가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메디아가 하얀 듯 하얗지 않은 듯 빛나는 은발을 풀어 늘어트리고 소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든 것이 보였던 것이다. 설마 지금까지 그와 함께 소녀의 무릎을 베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다 성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가씨! 메디아 아가씨!"
연한 갈색 머리의 하녀가 다급하게 이쪽으로 메디아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다 잠들어 있는 메디아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줄이는 그녀.
"또 만났구나. 그런데 아가씨는."
"그냥 잠든 거뿐이에요."
"그렇니."
그러자 그녀는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쉰다.
"그보다 무슨 일이에요?"
"몬스터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었니? 혹시 모를 일이니 방으로 모시라는 말을 들어서. 너희도 빨리 성 안으로 들어가렴."
그녀는 곧 잠들어 있는 메디아를 들어안았다. 어셔도 그녀의 말을 듣고 벨카와 함께 성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읏!"
"벨카?!"
소녀가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에 어셔가 손을 잡고 보자 그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 다리가 안 움직여."
어셔는 잠들어 있는 동안 벨카가 그와 소녀에게 무릎을 내어주고 있었음을 생각하고 그도 그녀를 들어 안았다.
"우리도 방으로 돌아가자."
"응."
그러자 어셔는 그들을 바라보는 묘한 시선을 느꼈다.
"...왜요?"
"너희들 정말로 사귀고 있었구나."
"그게 이상해요?"
"앗, 그런 게 아니라!"
그녀는 변명하려는 듯 급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어셔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뒤였다.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면 곤란하다는 듯 혹은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저 시선은. 마치 자신과 벨카가 사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왠지 메디아가 그녀에게 차갑게 대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어셔는 신경질이 났지만 그의 품에는 소녀가 있었기에 분을 삭이고 얌전히 그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때문에 뒤뜰의 정원에서부터 그들을 엿보던 시선이 그곳까지 따라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