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1화 〉간극. (81/220)



〈 81화 〉간극.

"끄으으, 하필이면 왜 이런 새벽에 훈련을 하는 건데요. 배고파 죽겠네."


때는 아침을 먹기에도 이른 아침. 아직 태양은 보이지도 않았고 하늘만이 푸르게 밝아오고 있었다. 오늘도 어셔는 도나르에게 불려 나와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평소보다 일찍 깨어나 비몽사몽한 상태로 하는 훈련은 더욱 고되었다.

"넌 몬스터나 적이  먹는  기다려주는 거 봤냐? 밥을 먹을 때는커녕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싸워야  때도 있다고."
"...어째 기사라는 건 들으면 들을수록 하기 싫어지는데요."
"그러라고 하는 소리니까 잘 들어 놔."


이런 시간에 훈련을 하는 것에 불만을 느껴도 저런 말이 돌아오니  말이 없었다. 대체 기사는 얼마나 힘든 일이란 말인가? 그래도 자세를 잡는 것이나 대처법을 배우는 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훈련의 마지막이 항상 로기와의 대련이라는 것이다. 이 편이 실력이 빨리 는다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결과는 어김없이 어셔의 패배였다.

"우와, 오늘도 엉망진창으로 깨지셨네요."
"시끄러워."


어셔는  그래도 비참한 기분을  부추기는 메디아의 말에 짜증이 났다.


"너무 성급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로기랑은 훈련을 해온 시간이 다르잖냐."
"알고 있다고요. 그런 거."

도나르는 태양이 떠오를 즘부터 멀리서 그들의 훈련을 구경하다 끝이 나자 다가오는 벨카와 메디아에 더욱 창피해하는 어셔를 지켜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겠지만 여자아이들 앞에서 대련으로 지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지. 어셔가 그것을 양식 삼아서 더 열심히 훈련하는 걸 노리고 있는 도나르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어셔를 치료하며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소녀의 금빛만큼은 버틸 수가 없어 어색하게 웃고 마는 그였다.

"그나저나 샬비, 네가 로기를 맡기로 한 거냐?"


도나르가 따가운 시선을 피할  이번에는 어셔의 훈련에 함께 참관한 그의 친구에게 물었다. 로기는 어셔나 벨카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단 내에서도 애매한 위치였다.


"그렇지 뭐. 후임 가르친다 생각하면서 키워두면 나중에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지."

기사로서는 유망주였다고 해도 아직은 어린 나이에 보호자도 없다. 그래도 키우면 확실하게 능력 좋은 기사가 되겠지만 사람들이 선뜻 데려가기엔 아직 어린 나이라는 것이 문제였으리라. 사람들이 로기 같은 아이에게 원하는 건 키워주고 먹여줄 객식구보다는 돈을 벌어올 일꾼이나 자신들의 안위나 재산을 지켜줄 사윗감 정도일 테니까. 미래를 보고 키워주고 먹여줘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데려갈 이들은 없었겠지.


"이 바닥은 늘 인력난이니까."

그래도 로기가 기사 아래에서 훈련받은 견습 기사라는 걸 알면 나중에 데려갈 이들은 꽤 많을 것이다. 아직 신체적으로 완전히 성숙하지 않아 실전에 투입시키기엔 이른 것 같지만 좀 실력이 있다 싶으면 용병으로 데려가려는 이들도 많으니까. 마찬가지로 어셔도 훈련에 좀 익숙해지면 그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생길 것이다. 정작 본인은 어디에 발붙일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셔에게 몬스터에 대해선 가르쳐주고 훈련시키고 있는 거지?"
"아, 맞다."

도나르는 샬비의 말에 가장 중요한 것을 깜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기는 파시페니아에서 먼저 교육을 받았을 테지만 어셔는 이야기가 다르니까.


"이 돌대가리야! 그걸 안 가르쳐주고 대인전 기술부터 가르치고 있었냐?!"
"일단 그게 제일 급하다고 보지 않냐?"


그는 벨카에게 보살핌 받는 어셔를 보았다. 심한 상처는 없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소녀를 어셔가 걱정하지 말라는  달래는 모습이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둘이 아니었다. 이번에 아이올로스의 가신으로 들어온 그들에겐 가족이 있는 이가 드물었지만 기존의 가신들의 자제들인 듯 멀리서나마 이쪽을 보는 시선이 상당히 많았다.


"쯧, 어쩔 수 없긴 하겠네."
"그렇지?"

되도록 인적이 드문 곳을 빌렸는데도 이쪽을 구경하는 남자들이 보였다. 여자나 또래 아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꽤 나이가 되어 보이는 녀석들도 상당하다. 그 모습을 본 샬비도 혀를 차며 동의했다. 적어도 어셔와 벨카가 성 안에서 사는 동안은 몬스터보다는 같은 사람을 더 주의해야 했다. 아이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겠냐 싶겠지만 이런 일은 오히려 아이들이 더 저지르기 쉬운 것이니까. 도나르는 로기를 흘깃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벨카와 어셔가 깊은 관계라는 것만으로도 질투하는 이들이 생길 텐데. 아이올로스의 딸인 메디아도 아닌 척 어셔를 신경 쓰는 모습이다. 때문에 일이 더 크게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런 일로 문제가 생기면 아이올로스가 중재를 하겠지만 그쪽도 무작정 신뢰하기엔 소녀를 보는 눈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기본적인  정도는 틈틈이 가르쳐 줘라."
"그래야지. 그냥 내버려 두기엔 너무 걱정되는 아이들이라."


그러지 않아도 그는  수 있는 한 아이들을 돌봐줄 생각이었다. 도나르는 어제를 마지막으로 에르미스와 헤어질 때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도나르, 그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직접 보답하지 못 한다는 게 아쉽지만 우리가 성벽을 통과한 데에는 그 아이들의 덕이 컸을 걸세."


그는 자세한 이야기는 가르쳐주지 않고 부탁한다는 말만을 하며 헤어졌다. 결국 아이들을 보호할 이유가 하나 늘었을 뿐 딱히 바뀌는 건 없었다.


"오전 훈련은 이제 끝났으니까 적당히 쉬다가 점심에 계속하자고."
"으엑, 또요?"
"이 정도는 해줘야. 기본은 한다고."

어셔가 불평했지만 원래는 아침 식사 후 점심 전까지도 하는 훈련이었다. 솔직히 소녀의 눈치가 보여서 더 심하게 하기가 그랬다. 오전 훈련을 마친 그들은 만찬장에 모여 식사를 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손님을 초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렇게 주군과 가신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것이 일상인 듯했다.


"몬스터에 대해 알고 있냐고요?"
"그래."

그는 샬비에게 말을 들은 김에 식사를 하면서 몬스터에 대해 간단히 말해주기로 했다.

"그냥 유난히 공격적인 동물들을 싸잡아서 부르는 거 아니에요?"
"꼭 틀린 말은 아닌데. 사실은 조금 다르지."


보통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대부분이 그랬다. 몬스터는 보통의 생물에겐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몸조차 사리지 않는 극단적인 공격성이 있었으니. 심지어 지성이 있는 것들은 더욱 치밀하게 더욱 간사하게 인간을 습격하기 때문에 대놓고 쳐들어오는 드래곤들보다 까다로울 때가 종종 있다. 마치 그것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병기처럼. 사람보다도 더 사람 같은 방식으로 공격해오는 녀석들이.


하지만 진짜 이유는 평범한 동물들과 몬스터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동물들은 그냥 자기들끼리 번식을 하는데 몬스터는 인간을 숙주로 삼는다는 거다."
"쿨럭! 컥! 무, 뭐라, 컵!"

아직 어셔에겐 자극적인 이야기였을까? 그의 말에 그는 사레에 들려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그런  식사 중에 이야기하면 어떻게 해요!"


물론 소녀의 따가운 시선과 함께 시프에게 타박을 듣고만 도나르였다. 약간은 소란스러웠던 아침이 끝이 나고 그들은 손님이 아니라 가신으로서 배정받은 방을 보기 위해 하녀의 안내를 받아 따라갔다.


"저기, 여기가 저희가 배정된 곳이 확실합니까?"


도나르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자신을 안내한 하녀를 붙잡고 물었다.

"네, 이곳이 확실합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시는 점이 있다면 말씀을..."
"아닙니다. 조금 낯설어서."

그는 얼떨떨한 느낌을 지울  없었지만 그녀에게서 방 열쇠를 받았다. 방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이냐고 한다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좋아서 탈이었다. 이전까지 있었던 손님 방만해도 웬만한  크기는 되어 보였지만 이곳은 값이 나가는 집 하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느낌이다.


"여기는 원래 있던 곳보다 좀 더 넓네요."

시프가 신기하다는 기색으로 방에 발을 들였다.

"이제  때만이라도 그 자식이랑 얼굴  봐도 되겠네. 벨카도 이제 같이 자는 거지?"
"아마도."


어셔는 이제 로기와 함께 안 자도 된다며 개운한 모습이다. 아이들마저 아무렇지 않게 방안을 구경하니 도나르는 혹시 자신이 이상한 것인지 고민하며 잠깐 바람을 쐬러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것은 자신처럼 복도로 나와 갑옷 장식처럼  늘어서 있는 꼴이  동료들의 모습이었다.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여기 너무 넓은  같은데."
"나는 저런 방 하나에 14명은 들어가서 같이 잤던 거 같다."
"혹시 여러 명에 하나인 걸 착각한 거 아닐까?"

다행히 그에게 동감하는 그들의 모습에 도나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중 하나겠지. 파시페니아에서 말하는 기사랑 란투아에서 말하는 기사가 이름만 같지 다른 거라던가."
"하는 일은 똑같던데?"
"그럼 여기가 대우가 좋은 거겠지."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뭐냐? 이 차이."

그들은 푸념 아닌 푸념을 나누다 지나가던 하녀들의 놀란 시선을 받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들고 온 짐을 풀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방을 배정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찾아온 손님에  정리는 잠시 미뤄둬야 했다.

"또 뵙네요.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저는 메디아라고 한답니다."
"어, 음, 안녕하십니까. 메디아 아가씨. 도나르입니다."
"시프라고 해요."


도나르는 치마를 살짝 들었다 놓으며 인사하는 메디아의 모습을 보며 어색하게 답했다. 이전까지 면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긴장되었다. 시프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후후,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은데 말이죠."
"제가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파시페니아 분들은 좀 더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이런 부분에선 더 고지식하시네요."


그녀는 재미있는 점이라며 웃었다. 그 모습마저 처연한 듯 우아한 소녀다.


"켁, 너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
"어머, 제가 찾아오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어셔가 방까지 찾아온 메디아의 모습에 질색하자 그녀는 서운하다는 듯이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우아한 영애의 모습은 어디 가고 장난기 넘치는 모습이다. 그는 코앞까지 다가온 메디아의 얼굴에 결국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러자 볼일이 끝났다는 듯 이번엔 벨카에게 다가가는 그녀.


"벨카는 앞으로 여기에서 주무시는 거죠? 조금 아쉽네요."
"뭘  벨카를 친근하게 부르고 있어!"
"그야 저도 벨카의 친구니까요."
"응."

어셔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벨카의 손을 잡는 메디아를 내버려 두었다. 어떻게 해도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야,  저 아가씨랑 어느새 친해진 거냐?"
"제가 아니라 벨카랑 친한 거겠죠."

어셔는 도나르가  벨카가 아니라 자신에게 저렇게 묻는지 이해할  없었다. 아무리 봐도 그보다는 벨카와  친근한 모습이 아닌가?


"그럼 제 방으로 놀러 가죠!"
"야! 벨카는 왜 또 데리고 가는데?!"


그새를  참고 벨카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가는 메디아에 그 뒤를 따라 어셔가 따라나가려다 멈칫하고 멈춰 서서 도나르와 시프를 쳐다보았다.


"짐 정리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놀다 오렴."

시프의 말을 듣고서야 어셔는 소녀들의 뒤를 쫓아갔다.

"한창 때구만."
"그렇네요."


어셔는 금방 소녀들을 따라잡았다.


"에잇! 끈질겨요! 그냥 저희들끼리 내버려 두면 어디 덧나나요?"
"덧난다 왜? 그리고 끈질긴  너라고!"


그들 사이에 끼어든 건 그녀면서 그가 끼어들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메디아가 황당했다.


"레이디들끼리 모이면 신사는 비켜줘야 하는 게 예의라구요."
"너 그냥 듣기 좋은 말로 날 떼어내려는 거지."
"칫,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이란."


이쯤 되니 어셔는 메디아의 어여쁜 모습에 무심코 두근거렸던 자신이 바보 같아질 정도였다. 아마 그녀의 병약한 인상에 많은 이들이 속지 않았을까.


"악! 뭐야!"


그 순간 어셔는 비명을 질렀다. 메디아가 그의 팔을 꼬집은 것이다. 작게 꼬집은  같은데 정말 그녀가 꼬집은 게 맞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아팠다.


"어셔 씨는 속 마음으로  좋은 생각은 안 하시는 편이 좋겠어요. 티가 다 나거든요."
"...."

어셔는 잠자코 둘을 따라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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